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녀는 상점이 있는 큰길로 가기보다 항상 골목길을 택했다.
그 길 옆 한쪽에 워크맨의 집이 있다.
평소 신경도 쓰이지 않았는데 그곳을 지나자 심장 박동이 절로 빨라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걸음이 빨라졌다.
[야, 이 재란. 같이 가자!]
몇 걸음 떼었다 싶었는데 뒤에서 진수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채 진수. 허물없는 친구중의 또 한 명이다. 워크맨의 조카이기도 하다. 우습지 않는가! 삼촌과 조카사이의 세월이 겨우 5년이니 말이다.
[니 삼촌도 왔는데 놀지 뭐하러 왔냐?]
[야, 우리 삼촌, 왁자지껄 어울려 노는 거 싫어하는 성격이잖냐. 집에 와도 벌써부터 방안에서 꼼짝 않한다. 그런 사람이 나랑 놀려고 하겠냐]
도서관 문을 열고 둘은 자리에 앉았다.
얼음을 넣은 아이스티를 잔 두개에 따랐다.
은숙이 온 건 10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기세좋게 들어선 은숙은 재란의 컵을 뺏어 손수 아이스티를 따랐다.
[채가야. 너그 삼촌 진짜 결혼하냐?]
[야, 우리 삼촌이 결혼하는 거 하고 니하고 무슨 상관인데?]
[대답이나 해봐라, 빨리!]
[만나는 여자가 있는 건 맞는데, 삼촌이 이렇다 할 대꾸가 없더라. 지금 그게 문제겠냐. 실업자가 되느냐 마느냐 하고 있는 판국에]
[뭐 심각한 사이는 아이겠네. 결혼하겠다고 한 건 아니제?]
[모르겠다니깐! 와? 니 우리 삼촌 좋아하냐?]
[좋아하면 안되냐?]
[꿈깨라, 김 은숙! 죽었다 깨나도 니는 안된다. 재란이 정도면 또 몰라]
[나는 와또 갖다 붙이노]
재란이 슬쩍 한마디 거들었다. 은숙이 몰래 씨익 웃었다.
[와. 그게 궁금해가 오라 그랬나?]
[야, 이 동네에서 젤 잘나가는 사람인데, 어떤 여자가 마누라 될지 궁금하지 안 궁금하겠냐? 근데, 너그 삼촌 언제까지 여기 있을건데?]
[뭐...당분간은 있을 모양이더라. 삼촌 말로는 사표 쓰고 왔다 그러고...할아버지도 찬성이셔. 방송국이 삼촌을 망쳤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니깐...]
[재란아. 좋은 기회다]
[기회는 무슨 기회?]
진수가 가자 은숙이 가까이 앉아 속닥거렸다.
[워크맨한테 다가갈 수 있는 기회 말이다. 너그 집하고 워크맨 집하고 친하잖아. 그걸 핑계로 자주 들락거리다 보면 워크맨하고 가까워질 수도 있잖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라.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야 뒤탈이 없는기다. 사춘기적 소녀도 아니고...]
[니 진짜가? 워크맨한테 미련같은 거 없나?]
[있어도 내 감정이고 없어도 내 감정이다. 이제 신경 꺼고 책이나 정리 좀 해라]
솔직히 재란은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워크맨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신경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 대한 사랑인지 사춘기 소녀적의 열정이 남아서인지... 그것은 재란 자신이 풀어야 할 숙제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
어수선한 마음으로 재란은 도서관을 나섰다. 시간이 벌써 11시였다.
워크맨의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2층 어느 한 곳에...
흰 레이스 커튼이 열린 창문으로 보였다. 누구의 방일까...
하는 마음으로 재란은 저도모르게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무심히 올려다 보았다.
라이타 켜는 소리가 찰칵 찰칵 하고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담배 내음이 났다.
고개를 내리려는 순간,
담배를 입에 문 워크맨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천천히...그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면서 재란을 내려다 보았다.
쿵.하는 심정으로,
불에 댄 듯 놀란 표정으로 재란은 얼른 몸을 돌렸다.
부끄러웠다. 창피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얼마나 바보같다고 생각할까. 아구, 내가 미쳤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