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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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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회


BY 액슬로즈 2003-07-03

 

아침 밥상 머리에서 화제가 된 건 단연 워크맨이었다.

 

[지도 채가한테 야기 들었십니더. 한...십년만인가? 하여튼 그 집에선 잔치 분위기네요]

[와 아이겠노. 그 영감탱이가 마흔줄에 본 자슥이라 젤루 이뻐 안했나. 장가 갔나?]

[아즉요. 채가 말로는 뭐...여자는 있다 카든데, 그라믄 곧 안가겠십니꺼?]

[아암...가야제...]

 

할머니와 아버지의 대화다.

그 대화는 재란을 충격에 빠뜨리고도 남았다.

여자...가 있다고?!  장가를 간다고?!

밥알이 콧구멍으로 그대로 튀어나올것만 같았다.

밥맛이 뚝 떨어진 재란은 숟갈을 놓고 자리를 떴다.

 

*

[야, 라면 끓여 먹자!]

 

점심 시간전에 보건소로 들이닥친 뚱한 얼굴의 친구를 은숙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고춧가루에 신김치 넣어 가지고...]

[야, 먼 일이고? 아직 열두시도 안됐다야. 와또 심사가 뒤틀맀노?...니 혹시?]

[뭐?]

[니 워크맨 온다니깐 기분이 거시기해서 그러제?]

[거시기 같은 소리하고 있네. 라면 먹을건지 말건지나 말해!]

[묵자! 그래, 묵자 묵어!]

 

둘은 은숙의 집으로 향했다.

라면 두 개를 거뜬히 해치우고 냉커피를 마시며 마루에 걸터 앉았다.

잔잔한 바람이 더운 열기를 밀고 들어왔다.

 

[야, 워크맨 결혼때문에 온댄다]

[엥? 진짜?]

 

재란의 말에 은숙은 커피를 꿀꺽 삼켰다.

 

[니하고 내 빼고 다 아는 사실이더라]

[확인해봐야겠다]

 

은숙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채가가? 야, 너그 삼촌 결혼한다매? 니 와 그 소린 안했노?...중요하니깐 묻는거 아이가!...응? 알았데이. 니 갔다 와서 우리 좀 보자]

[성질도 급하다...] 재란이 한마디 거들었다.

[채가 지금 워크맨 마중간댄다. 갔다와서 얘기하자네]

 

시계를 보았다. 12시 20분.

포항에서 아침 10시에 출발하는 씨플라워호는 오후 1시면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게 싫은지 재란은 벌떡 일어섰다.

 

[어, 갈라고? 야, 보건소 가서 놀다 가라. 내혼자 심심하다. 보나마나 김선생님은 낚시하러 갔을 건데...응?]

 

얼른 팔짱을 끼며 은숙이 코맹맹 소리를 했다.

보건소는 남양동 자갈해수욕장이 훤히 보이는 곳에 있었다. 옆에는 전경 초소가 있고...

그 작은 보건소는 환자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는 하루에 한두번 정도?...그 밖의 환자들은 은숙이 혼자서도 충분했다.

 

*

이 재란과 김 은숙은 배꼽친구다.

고교때가지 같이 붙어 지내다 재란은 사범대를, 은숙은 보건대를 갔다.

그리고 재란이 갑작스런 일로 울릉도에 오자 바로 뒤따라 와준 사람이 은숙이었다.

두 사람은 쉽게 말해 눈빛만봐도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아파하는지 아는 그런 사이인 것이다.

 

[어? 채가 코란도다!]

 

창가에 고개를 디밀고 있던 은숙이 외쳤을 때 재란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했다.

은숙은 어느새 밖으로 나가 코란도를 세웠다.

 

[일찍 갔다오네?...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겠어요? 진수 친구 은숙인데...오신다는 소리 들었어요]

 

넉살좋은 은숙이 조수석에 앉은 남자에게 인사를 건넬 때 재란이 창가에 서서 바라보았다.

워크맨... 채 영. 올해 서른.

잘나가는 방송국 피디...아니지, 전 방송국 피디라고 해야겠네?

한쪽팔을 차창에 걸친 채 피곤하다는 얼굴로 은숙의 인사를 받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재란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썹이  잠시 꿈틀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주시했다.

먼저 시선을 거둔 사람은 재란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을 어찌 이기겠는가!

떨리는 가슴으로 재란은 창에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니 봤나? 봤제? 그 눈빛하며 표정하며!...저런 킹카를 여자들이 여지껏 그냥 두다니!]

 

흥분한 표정으로 은숙은 호들갑이었다. 찬물을 끼얹어줄 필요가 있었다.

재란은 일어났다.

 

[그럼 니가 가지면 되겠네. 잘해봐라!]

[뭐?...어? 갈라고? 야!]

 

그러나 재란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은숙은 피식 웃으며 그런 친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시나, 심통은...기다리봐라 워크맨은 니꺼다. 안되면 되게 하라! 내가 누고!!!!]

 

집으로 들어서는 모퉁이에서 잠시 멈춘 재란은

한 집 건너고 조그만 화단 건너 세워진 코란도를 힐끔거렸다.

이층 양옥의 커다란 집...워크맨의 집이다.

맛있는 냄새가 풍겨져 오는 걸 느끼면서 재란은 발걸음을 뗐다.

 

낮은 벽돌담 너머로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는 화단 앞의 마루에 걸터 앉아 있다 재란을 보자 미소를 띄며 몸을 일으켰다.

팔십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아직 건강했다.

 

[아구, 내 새끼. 어데갔다 인제 오노?]

 

할머니는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셨는데 그 밑으로 전부 손자를 보셨다. 여자라곤 유일하게 재란뿐이기에 그녀가 받는 사랑은 절대적이었다.

 

[일루 와봐라]

[할매가 눈빠지게 니 기디리셨다]

 

화단을 손질하던 엄마가 한 마디 했고 할머니는 재란의 손을 이끌고 식탁으로 갔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고 재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할매, 이게 뭐고?]

[채영감 집에서 가져 온기다. 니 줄라고 냉겨 놨으이 얼른 묵어라]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웃음을 가득 안고 앞에 앉아 계신 할머니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할매. 은숙이도 오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