쾅!!
소리도 요란하게 현관문은 닫히고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것이다.
몇시간인지 모르는 내가 처음 겪은 모습의 지옥이었다.
빽빽 울어대는 아기는 더이상 딸도 무엇도 아닌
나를 괴롭히려고 어디선가 뚝 떨어진 작은 악마였다.
겨우 한숨을 내쉬고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종이기저귀는 쓴건지 안쓴건지 모두 있는대로 끄집어내진채로 거실바닥을 나뒹굴고
어제밤 내가 마신 소주병은 빈병이 굴러굴러 구석에 가있고
채 다 마시지도 못한 소주가 흘러나와 바닥에서 아직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이불이 둘둘 말려져서 던져져 있고 베개와 재떨이에 수북한 담배꽁초들...
깔끔떨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눈뜨고 봐줄 만한 광경이 아니다 싶다.
저걸 치울까 말까..
대충 이불을 방으로 넣고 소주병을 다용도실로 치워버리고
종이기저귀는 쓴건지 안쓴건지 일일히 다 확인해보기 싫으니
그냥 한데 모아서 큰 비닐 봉투에 넣어버리기로 한다.
그나마도 하려니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몇번씩해야 하고
콧구멍만 해서 주방이라 해야 옳을지 그래도 명색이 거실이라 불러야 옳은건지 모를 공간을
마치 뭐 마려운 개 모양으로 왔다갔다 수십번을 한 끝에 겨우 나 앉을 만한 빈자리가 생겼다.
아이구...
정오가 넘어가도록 빈속인데다가 어제 과음한 탓으로 속이 갈퀴로 할퀴는 것같다.
이럴땐 쟁이가 해주는 해장라면을 좀 먹으면 낫겠구만...
쟁이?
쟁이란 내가 아내를 애칭으로 부르는 마누라쟁이의 준말이다.
마누라쟁이는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어여쁘고 귀여운 우리말인가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쟁이 그 여자를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더이상 더 뭘 어쩌란건지,
내가 돈을 안벌어다 주나, 다른 남자 다 피우는 바람을 피우나,
그렇다구 집안을 홀라당 말아먹을 노름을 하기를 하나,
한대라도 때리길 했나,..
나로 말할것 같으면 대한민국의 가장 표본적인 가정적 남편아닌가 말이다.
직장 열심히 다녀서 월급은 몽땅 통장으로 들어가지,
가끔 회식이나 친구들 술자리 외에는 늘 칼 퇴근해서 집으로 가지.
일요일엔 잠도 못자게 조르는 통에 괴롭지만 마트에도 따라가지 않느냐 말이지.
그만큼 하면 된거지, 또 뭘 하라구.
이 여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거지..
그렇지 않구서야 말도 없이 애도 내버려 두고 나가서 소식도 없어?
허허 참.. 세상 말세야.
여자들이 세다 세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기어오르면 안되는거아냐?
생각해보니 열받아서 다시 담배를 문다.
한모금 깊게 빨아들이지만 이내 불을 꺼버린다.
속이 더 쓰린것 같다.
뭐든 먹어야 겠다.
속이 비고 게다가 쓰리기까지 하니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해장라면을 나두 한번 끓여보지뭐.. 까짓거 뭐가 어려워.
쟁이가 해주던거 생각해보고 고거만 다 넣음 되는거 아니겠어?
일단 냄비에 물을 올리고..아..그런데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거지?
라면 뒷봉지에 끓이는 법이 나와있던
옛날 생각이 나서 ..하하 정말 옛날이구나..벌써 5년도 더 된 일이니까..
봉지 뒷면을 살펴본다.
물..큰컵으로 3컵이라....
큰컵은 뭐가 큰컵이란 말인가..어쭈리 550CC?
그러니까 맥주 500 보다 조금 더 넣으면 된다는거지..
물을 붓고 끓으면 면넣구 스프넣구 그리고 다른 야채를 한꺼번에 넣으면 되겠지.
쉽구만..
냉장고를 열어보니 콩나물과 양파,파 따위의 야채들과 반찬통에는 김치가 반쯤 남아있다.
뭐 이래..
이 여자가 살림을 어떻게 하길래 반찬이 김치뿐이야.
저번 달에 엄마가 밑반찬 해준건 다 어쩐거야. 진짜..짜증나네..
냄비 뚜껑이 들썩들썩하며 물이 끓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단 뚜껑을 열고 면을 넣고 콩나물, 파도 조금 썰어 넣고 김치도 넣고
그리고 좀 호사를 부려 계란도 하나 퐁당 깨뜨려 넣는다.
음...
냄새는 죽이는데..
상에 김치와 라면이 끓는 냄비, 달랑 두개를 놓고서 티비앞으로 가져온다.
일요일이라 일찍부터 오락프로그램을 하는구나..
라면 먹으면서 낄낄 웃으니 세상에 부러울게 없구나..
후~~~후~~
잘 불어서 입으로 면발을 가져간다.
욱!
뭐가 이렇지?
왠 비린내야? 비린거라곤 계란하나 넣었을 뿐인데..
맨날 넣어서 먹는 계란이 왜 오늘따라 비린거지?
쩝~ 국물맛은 뭐가 또 이래?
비위상하게 왜 이리 비린거야.
에이씨...
못먹겠네.
짜증이 순간 머리꼭대기까지 치솟는다.
음식 냄새를 맡은 위는 벌써 요동을 치기 시작했는데,
참고 먹을만하지가 않은게 문제다.
어떻게라도 끼니를 때워야지.
굶고서 뭘 할수도 없으니..
대충 점퍼를 걸쳐입고 슬리퍼를 꽤신고서 현관을 나선다.
일요일 한낮의 해가 온통 내 눈을 향해 빛을 쏘아대고 있는것 같아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아파트 문을 나서면 김밥전문점이 있으니 거기가서 라면이든 김밥이든 먹자.
그리고나서 생각을 해보는거야.
" 어서오세요~. "
" 아줌마 여기 라면하구 김밥하나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리세요. 금방 드릴께요."
김밥집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문득 쟁이 생각을 하게 만든다.
쟁이가 김밥을 싸는 날이면 이렇게 온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었다.
그래두 쟁이가 싸는 김밥이 먹을 만은 했지..
김밥을 하나 집어 입속에 넣고 씹는다.
무슨 맛인지 도통 맛을 못느끼겠다.
아마 술 때문 이리라...
허기가 가시고나니 다시 생각 할 만한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버틴다 쳐도
내일은 어떡하지.
이놈의 쟁이가 안돌아오면 애는 엄마더러 계속 봐달라 해야하나.
엄마도 출근하는데 안봐준다하면 어떡하지.
내가 찾으러 갈 줄 알고 이놈의 여자가 지금 배짱이지.
지가 갈 데가 어딨어. 친정간거지..
내가 데리러 가나 봐라..
애초에 버릇을 잘 들여야지, 집 나가고 하는 못된 짓을 어디서 배워가지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 난나고 지가 시집에 잘 하기를 해,
남편을 하늘같이 떠받들기를 해.
다른 여자들 처럼 돈을 척척 벌어오기를 해.
이번에는 내가 가만히 안둘 참이니까 어디 들어오기만 하라구..
김밥을 두 줄 더 포장해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전의를 불태웠다.
엘리베이터는 제일 꼭대기 층에 가 있어서 기다려야한다.
난 이런게 제일 싫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숫자가 15였다가 14로 바뀌는걸
속으로 따라 헤이는 일이 너무나 지루하고 멍청이짓 같다.
" 어머, 민이 아빠시네? 안녕하세요? "
" 아...네..안녕하세요"
" 아유..저 기억안나시나부다 , 호호 저는 민이엄마하구 저번때 양재 같이 배운 호야엄마에요
전에 한번 길에서 인사드렸었는데..그럴 수도 있죠 뭐. 그 때도 밤이었구 하니까.호호호"
여자 참... 호들갑스럽긴...
이런 여자하구 친구란 말이야?
친구는 좀 가려서 사귀라니까 내말은 이렇게 안듣는다니까.
" 그나저나 민이 엄마가 애아빠 자랑을 하두 해서 다시 한번 만나면 꼭 자세히 봐야지
햇는데 오늘 뵙네요.호호호"
" 허허..제 자랑을요? 뭐 자랑할게 있다구요.."
공연히 기분이 으쓱하다.
" 아이 왜요, 남자들 반찬투정하는데 민이아빠는 그런거 전혀 없다면서요.? 게다가
일요일에는 빨래도 돌리시구 청소도 해주신다면서요, 장에도 같이 간다구 먼저 나서신다면서요..호호호 부럽기두 해라"
도대체 쟁이란 여자는 뒤에서 날 씹은거야, 아니면 진짜로 이렇게 말을 하구 다닌거야?
갈피를 잡을수가 없어서 대답도 못하겠군.
" 아..그건 그렇구, 저번에 민이 엄마가 아르바이트로 한복만든거 좋은값에 넘긴다 하든데
돈좀 되죠? 계속하면 꽤 들어온다구 하는데 민이 엄마는 손재주가 있어서 아마..
못해두 아이구..벌써 왔네?"
다행이 엘리베이터가 때맞춰 띵~ 하는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내앞에서 열려줬고
나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서 7이라고 써있는 숫자를 다급히 누른다.
무슨소리야..이게..
아르바이트로 한복을 만들어?
뭐 배운다 어쩌구 하길래 돈 많은 여편네들 흉내내고 싶으냐고 내가 한마디 한게 그럼..그거란 말인가?
그럼 돈은 벌어서 어디다 썼단말인가..
도무지 알수 없는 노릇이다.
친정에 줬나? 아... 그럴수도 있겠다.
나몰래 벌어서 할짓이라곤 고따위 짓이겠지..
아니면 이 여자가 어디 카드빚이라도 있는건 아니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상상이 나래를 편다.
고개를 가로 저어서 생각을 끊어버린다.
음...
일단 쟁이가 들어오면 족쳐봐야지.
들어오기전에는 찾지 않을것이다. 어림도 없다.
거실에 다시 드러누워 야구 중계를 보면서 담배를 문다.
나는 야구를 광적으로 좋아한다.
쟁이도 연애적에는 좋아했는데 결혼하더니 관심이 시들해져서 이제는 혐오조차 하는 야구다.
따르릉~~~
" 여보세요? 엄마?"
" 그래 밥은 먹었냐?"
" 그럼요,나가서 사먹고 막 들어왔어요. 애는 이제 안울어요?"
" 잔다 지금..울다 지쳐서 .. 민이 어멈은 연락없냐?"
" 걱정마요. 가면 지가 어딜가 뻔하지...지 발로 들어올 때까지 그냥 두세요"
" 그럼 애는 어쩌구? 난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누가 민이 보구? 니가 볼테냐"
"제가 어떻게 봐요, 회사가야지... 저녁때는 아마 들어오겠지. 지가 잘한게 뭐있다구
오래 있겠어요. "
".... 이건..말 안할라구 했는데, 사실 나도 자존심도 있고해서 너한테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들 이러는거 보니까 해야겠다"
" 뭔데요?"
" 저번에 니 동생 학비 말이다. 그거 민이 에미가 해줬다. ..나두 말은 해놓구서 설마 그 큰돈이 어딨을라구 했지. 그냥 답답해서 해본 소리기두 하구...
근데 민이에미가 돈을 부쳤드라. 등록금하라구...그러면서 너한테는 말하지 말라구 하드라. ...... 너 알면 자존심 상해한다구..
그돈 어디서 난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나는... 다 니가 번거 저축하고 쪼개쓰고 그래서
보내준건줄 아니깐.. 민이 에미한테 괜히 미안해지는거 난 싫다. 이번에 집 나간것도 그래서 내가 지금은 참고 있다만 들어오면 눈물 쏙 빠지게 혼을 내줄참이다.
집에서 먹고 놀면서 남편 벌어오는거 아껴서 저축해서 그거 못만들면 그것도 못난이지,
다 니가 고생해서 번돈 아니냐? "
"............!"
" 이번에 들어오면 너도 다시는 못그러게 따끔하게 말을 해라. 어디 애 엄마가 집을 나가? 알았지"
" ...알지도 못하면서,... 엄만 좀 가만히 있어요! "
" 이 자식이 어따대고 성질이야? 마누라 나간게 내탓이냐? 만만한게 에미라구
그래도 지새끼 우는것도 못보고 쩔쩔매길래 데려왔더니 ...당장 민이 데려가 이놈아!"
몇달전 친구놈이 급하다기에 카드로 돈을 기백만원 꿔주고 받지를 못해서
지금 그것 메꾸느라고 사실 여유가 없는 형편인데..
쟁이한테서 잔소리를 한달을 더 듣고나서야 겨우 놓여났는데..
어디선가 자동차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소방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린다.
옆집 초인종 눌리는 소리도 들린다.
시계초침이 돌아가는 소리조차 들린다.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소리가 한꺼번에 나를 덮쳐온다.
거실을 뒹구는 라면봉지...
뒷면이 눈에 들어온다.
1.끓는 물 550CC(큰컵으로 3컵)에 면과 분말스프,후레이크를 넣고 4분간 더 끓입니다.
2.기호에따라 면과함께....
이런걸로 충분한 설명이 되는걸까.
나는 이걸 읽고도 라면을 끓이지 못했다.
아니 끓이긴 했으나 먹지 못할 라면을 끓였다.
좀더 자세히..
끓이는 법을 써줘야 옳은게 아닌가.
누가...
라면 맛있게 끓이기라고..뒷면에 좀 써 놓아 주시오.
누가...
쟁이가 살아가는 매일에 대해 알려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