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도 없는데 나가지 그랬어?"
바쁘지도 않은 일을 핑계로 승규를 만나지 않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뭐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말을 소리내어 뇌까려버린 나경은 딱히 뭘 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창 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 뭐?"
"방금 그랬잖아. 어처구니 없다고 말야."
"내가? 아니, 뭐..."
"결혼이 점점 다가 오니까 너도 뒤숭생숭해지는 모양이구나?"
"너도 그랬니?"
"너나 나뿐이 아니라...세상 여자들이 다 그러지 않을까? 결혼이란 게 그러잖아...말로는 남자와 여자가 일대일 관계라고 하지만...살아봐라, 그게 되나..게다가 집안과 집안이 맺어지는 건데...이 사람과 한평생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남자 가족의 일환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뭐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지는 거지."
"그렇겠지..."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지만, 나경은 지영의 말에 짧게 응수했다.
"그럼...살이 쭉쭉 빠지는 것 같드라니까."
"나도 그래...승규씨랑 결혼해서 평생 후회하지 않을까..."
또 다른 누군가를 가슴 속에 품게 된다면 어떡하지?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누가 보든지, 누가 듣든지 이것은 미친 짓임에 틀림이 없으니까..
누구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비칠 수 없는 느낌 하나에 나경의 가슴은 무거운 쇳덩이로 짓눌린 것 같았다.
"엄마..나 집에 없는 거야. 알았지? 승규씨한테 나 찾는 전화가 오면 그렇게 말해줘."
"박서방이랑 싸운 거니?"
박서방?!
결혼식을 앞두었다는 것만으로 승규는 이미 어머니에게는 사위가 된 상태였고, 가족의 일원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주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싸우긴...그럴 시간이나 있는 사람인가 뭐...그냥 조용히 생각 좀 하려구요..."
"싸웠으면 대화로 풀어야지 생각은 무슨..."
아니라면서 연신 고개를 내젓는 딸아이의 모습이 어딘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여 무슨 말이고 한마디 하려던 어머니는 그럴 수 있다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결혼이란 것이 지금까지와의 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인생의 전환점이니 말이다.
방으로 들어온 나경의 생각은 애써 컴퓨터를 외면했지만, 어느새 의자를 끌어당기고 컴 앞에 앉아 있었다.
기혁이라는 남자, 만나고 헤어지고는 전적으로 그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컴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되니까. 들어가서도 수신거부 해버리면 그만이니까...
또 전화가 온다고 해도 이제 그만이라는 짧은 말과 함께 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이미 중독 되어버린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기혁과의 대화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고, 키워드를 터치하는 손끝이 빨라지면서 뚜뚜하는 연결 신호음에 심장이 따라 두근거렸다.
접속이 되기 까지 걸리는 10초의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비디오 노출 거부를 해놓은 기혁을 그녀의 컴 수준으로는 접속 여부조차 알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컴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마치 쳐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바로 메시지를 보내주곤 하던 그의 모습은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다.
나경은 여전히 손에 익은 새롬 프로그램으로 말없이 짧은 말줄임표를 메모로 보내었고, 이내 저장한다는 메시지가 화면상으로 뜨고 있었다.
지금..그녀가 할 일이란 무작정 그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다시 이기적이고, 메마른 세상 속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면서 모든 것으로부터 달관한 듯이 웃으면서 그가 말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그의 말에 나경의 마음은 두갈래였다.
착하고 선한 그가 이제 완전히 평범한 일상 속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 무척이나 다행스러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이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내 자신의 존재를 가슴에서 비껴 내버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경의 가슴은 벌써부터 에워왔다.
아! 이 얼마나 헛된 욕심이란 말인가!
몇 시간째 그와는 접속이 되지 않았다.
승규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걸려왔고, 결혼을 앞둔 딸아이의 심정을 헤아린 어머니의 거짓말은 계속되었다.
자정이 넘어서고 있었다.
기다림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가...
그만 컴의 전원을 내려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슬픔에 젖어든 나경의 시야로 <안녕.>이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기혁의 아이디가 화면상으로 떠올랐다.
그를 따라 서둘러 메시지를 띄웠다.
<안녕...>
<이제 들어왔어. 아무래도 나는 일복은 타고 났나봐.>
<요즘 같을 때 일복이 많다니 얼마나 좋은 일이예요.>
나경은 속마음을 숨기고, 그가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을 축하해주었다.
<하하하하. 것두 그렇군.>
<피곤하겠어요...식사는 요?>
<뭐 대충 짜장면으로 떼웠어. 넌?>
<나도 뭐, 대충...>
몇 시간째 화면을 들여다보던 나경은 시야가 흐려지고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그와의 대화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잠시후, 1;1 TALK를 원한다는 메시지가 떴고, 어눌한 손동작으로 TALK를 시도했지만, 그와는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해 화면상으로 뜨면서 나경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었다.
나경은 계속해서 그와의 접속을 시도하면서,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저런 절차를 밟아야 하는 새롬의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나경은 천리안 2000으로 다시금 접속을 시도했다.
40분이 지나도록 그와의 접속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끝나버릴 사이라지만, 이렇게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낼 수 없다는 절절함에 처절해지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침대에 엎드린 채로 통신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떠올리면서 혹여나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경은 귓가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를 세고 있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제 그만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기혁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장 기혁입니다."
"접속이 안되고 있어요. 미안해요...제가 뭘 잘못하고 있나봐요."
나경은 한 손으로는 폰을 든채로, 몇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또 다른 손으로는 TALK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돼요...기혁씨가 한번 해볼래요? 역시 초보는 어디서 티가 나도 난다니까요. 그죠?"
"그럴 수가 없어."
"왜요? 피곤하세요? 그럼 오늘은 그만 안녕할까요?"
"아까 내가 다른 사람과 일대일 TALK를 한다고 메모를 보냈는데 못 받은 거야?"
다른 사람과?! 무슨 말이야? 이 사람, 그러니까 대화를 하고 있던 나를 제껴두고, 다른 사람이랑...일대일 대화를 하고 있다는 거야?!!
"여보세요? 나경아?? 여보세요?"
"듣고 있어요."
"아까부터 이 아줌마가 일대일을 신청해놓았지 뭐야. 미안해."
"아뇨! 기혁씨가 미안해 할 것은 없죠. 그래요. 기혁씨가 미안해 할 일은 없어요."
"금방이면 돼..."
"그럴 거 없어요."
"화 난 거야?"
"나도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야, 설마..당신 배신감같은 거 느끼는 건 아니겠지?"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아내지 못하던 나경은 그가 소리내어 말한 배신감이란 단어만큼 지금 심정을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다는 것에 충격 받았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 터무니없게 치솟기 시작하는 배신감으로 감정을 조절할 수 없다니...이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사람이 내게 뭐고, 내가 이 사람에게 뭐가 된다고....
"이 아줌마 신세 타령 들어주는 게 그렇지 않아도 지루했던 참이었어. 지금 나올게."
"아니, 그러지 말아요...그렇게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래선 안되죠."
느낌 하나에 코 앞으로 다가온 결혼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과 혼돈으로 가슴 에여했던 자신과는 다르게 대화를 하던 중...다른 사람과 노닥거리고 있는 남자 때문에 나경은 가슴을 압박하는 질투라는 감정으로 숨쉬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왜 나가는 거야?"
떳다 아이디란에 등록된 그녀의 아이디 앞에 새겨져 있던 초록색의 체크표시가 엑스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지 마...다시 들어와. 알았지?"
바보같다고, 미친 짓이라며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내었지만, 그러지 말라는 그의 말이 싫지 않았다.
물론, 그에게 가졌었던 처음 느낌처럼 아주 좋지는 않았지만...
다시 만나자고 했던 기혁은 나경은 10분을 더 기다리게 했고, 그것이 또 그녀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뭐, 해?>
뭐하기는 뭘 하겠어? 열받고 있는 중이지!
<아직도 화난 거야? 미안해. 어떻게 해야 나경이 화가 풀릴까? 꽃? 장미로 줄까?>
<싫어요>
<아,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로 줄게. 진하고 달게 마시는 거 좋아한다고 했지.>
<싫어요.>
<내 사랑을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농담할 기분 아니예요. 아무래도 그만 두는 게 좋겠어요.>
<사랑해.>
만난지 오늘로 13일..아니 자정이 넘었으니 14일째이다.
그렇게 밖에 되지 않았고, 얼굴도 모르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도 모르는 남자의 사랑한다는 말에 가슴은 뛰고, 손가락이 움직임이 어눌해졌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참이나 숨죽여 들여다보던 나경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말을 그렇게 남발하는 게 아니예요. 차라리 계속 미안하다고 하는 쪽이 낫지 않아요?>
<너, 소유욕이 대단하구나.>
소유욕? 내가? 누구한테? 장 기혁이라는 이 사람에게?
나경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너, 정말 화 많이 났구나...미안해. 앞으로는 너만을 사랑할게.>
<혹시 잠들어버린 것은 아닌지...차라리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편이 나았을 텐데..오늘은 정말 아무말도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아요....기혁씨는 어떤지 몰라도 난 좀 냉정해져야할 필요가 있어요.>
<나경아....나경아!>
그의 부름을 뒤로 하고 홧김에 접속을 종료하고 컴 밖으로 나와버렸지만, 나경은 그를 기다렸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남자들의 근성상 으레히 그럴 수 있는 말이라해도 믿고 싶었다.
3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고 있었다. 10분...30분....
끝내 그로부터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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