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에 오분이야."
"어?"
"푹푹 내쉬는 한 숨이 열 번이고, 그렇게 맹하게 깍두기 들고 있는지 오분째라구...너 지금 정
신이 나간 사람 같애...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니..일은 무슨..."
정민의 말처럼 나경은 허우적댄다는 표현이 들어 맞을 만큼, 무기력증에 빠져들어 고장난 자판기처럼 반쯤은 넋을 잃은 상태였다.
우연이란 것은 소설에서의 스토리 연결을 위해서 존재하는 짜맞춰진 현상이라고 생각해왔었다.
한때 소설이랍시고 글을 껄적일 때....''이런 우연이면, 헤어지는 사람 하나 없겠어'' 라며 옹알거리기도 했었지...그렇게 허상투성이라고 생각 해왔던 우연으로 그를 다시금 만나게 될 줄이야...
얼굴을 모르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였지만, 만남을 전제로 하지 않아도 컴 안의 세상은 그녀로 하여금 방어벽 세우는 것을 게을리 하게 했다.
그러니 방어벽을 세울 이유도 없었거니와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은 낯선 타인에게 응어리진 속을 더욱 쉽게 털어내버리는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크나큰 판단착오였던가!
관계라는 말의 성립조차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크나큰 실수인가를 깨달았을 때...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편하게 단순하게 받아 들였던 우매함을 탓하면서 뒤돌아 섰을 때는 이미 제 위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후였던 것이다.
짜여진 연출이 아닌 우연으로도 지금껏 생각해 왔던 인생의 행로가 바뀌고,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는 미처 몰랐었던 것이다.
"그만 먹는 거야?"
"응...그래야겠어..."
수저를 놓고 구내식당을 나온 나경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들었다,
그리고, 또 멍하니 초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나 좀 오지...
쪽빛을 내면서 맑게 개인 하늘을 목이 저리도록 올려다 보고 있는 나경 옆으로 정민이 다가섰다.
"무슨 일이야?"
"일은 무슨..."
"아무 일 없다며서 며칠 째 그렇게 넋을 놓고 있단 말야?"
"그만 좀 물어봐!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잖아!"
"넌 니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르지? 너 이럴때마다 내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알어? 알기나 한거냐구. 또, 그때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굴까봐서.."
"미안해...미안해."
"됐어, 이젠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니가 어떻게 되든지 내가 알게 뭐야!"
팩하니 토라져 돌아서는 정민의 팔을 잡았다.
"그 때 그 사람...아는 사람이야."
"그 때 그 사람이라니...누구 말야?"
"횡단보도에서 봤던....그 남자 말야."
"횡단보도에서? 누구?...아! 그 엉덩이?"
"응...그 남자..아는 사람이야."
"어떻게 아는 사람이란 말야?"
"그 사람...그 남자가 바로 장 기혁이야."
"장 기혁? 니가 결혼할 뻔 했다던 남자는 승규씨 아니었니?"
"기혁씰 만나기 전에는 그랬지....."
[추억 속으로..] 컴 안의 세상으로....
나경은 조카로부터 겨우겨우 알게 된 방법인 텍스트 등록으로 글을 올리기 위해 중고로 구입한 컴퓨터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저 글쓰기가 좋아 순간순간 떠오르는 상황과 행동 표현에 따른 부연 설명 따위를 갈겨놓은 노트만 해도 라면 박스로 한 상자는 족히 될 성 싶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 성년식을 치룬 조카로부터 통신상으로 글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통신상으로 글을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읽어주는 사람이 많아졌고, 흥에 겨워진 나경은 아침에 눈뜨면 출근하기 두어시간 앞서 컴 앞에 앉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되버렸다.
룰룰랄라...응?
불특정다수에게 자신의 글이 읽혀진다는 것 하나만으로 색다른 묘미를 느끼고 있는 그녀 앞으로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아마도 승규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취미 중의 하나로 이해 하려고는 하지만, 동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포커스라는 아이디로 올려진 메일이었다.
자신에게 처음 전해진 메일 속으로 빠져들었다.
<너무나 제 가슴에 와닿는 글을 읽고, 처음으로 팬이 되기로 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면서 모든 것을 가슴 한귀퉁이에 접어두고, 현실을 떠나 사람들과 단절된 생활을 하고 있었드랬죠...부모님의 눈물로 더럽지만, 세상으로 돌아오기로 했답니다...님의 글을 접하게 된 것이 행운일까요? 좀 더 일찍 알았드라면 하는 후회가 드는 군요...늘 행복하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나경은 문단에 글을 올리고, 처음으로 올려진 감상평에 신이 나서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메일로 전해진 감상평은 그녀에게 상당한 설레임과 즐거움을 주기도 했지만, 왠지 모를 서글픔이 베어나고 있었다.
그 왠지 모를 서글픔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 내부 깊숙히 파고들 듯이 스며들 거라는 것을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나경은 어눌한 손동작으로 답장을 클릭하고, 포커스라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에게 메일을 띄웠다.
포커스로부터 메일을 받은 것이 처음이었고, 또 메일을 보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라는 것만 아니었어도....처음이라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에게 메일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난 오늘에서의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보내주신 글은 이제 시작인 제게 용기를 복돋아주었습니다. 그대 또한 행복하시기를 ...건강하세요......PS. 외람된 말인지 모르지만, 님의 글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집니다...괜찮으신거죠?>
포커스의 메일 한 장에 나경의 손가락끝에는 흥겨움이 베어 있었다.
포커스는 아마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보내준 글 몇 줄이 이런 기쁨을 선사했다는 것을....
따르릉.
"여보세요."
"좋은 목소리야.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것 같다?"
"처음으로 내 글을 읽고, 처음으로 내 팬이 되겠다는 사람이 생겼지 뭐야...처음인데,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
솔직히 승규는 당장에 소설가라도 되어 책이라도 출판한 것 처럼, 호들갑을 떨어대는 나경의 행동이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처음이라는 같은 말을 연발하면서 신이 나 있는 나경의 목소리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승규는 안으로 웃음을 삭이면서 그녀를 따라 기뻐해 주었다.
포커스의 뒤를 이어 심심찮게 감상평을 보내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조회수도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느낌이 좋았고,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다녀왔습니다."
나경은 집으로 돌아오자, 식사하는 것을 잊은 채, 컴퓨터를 켜고, 옆에 둔 안경을 집어들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소설에 약간의 수정작업을 거쳐 문단에 글을 올리는 것은 그녀의 작은 기쁨으로 일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람이다!
포커스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님의 글이 추억을 불러 일으켜, 제가 너무 감상적인 글을 올려 님을 혼란스럽게 함을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난 이게 탈이야, 스쳐가듯 한마디 내뱉은 것에도 지나친 반응을 보인다는 것..고쳐야 해.
아무 일 없다니 다행스러웠지만, 왠지 무안하고, 창피했다.
연작으로 글을 올리고, 다음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서 접속을 끝내려던 나경은 갑자기 모니터 화면에 작은 화면이 생기는 것에 놀라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야?! 컴이 열이라도 받은 거야? 어쩌면 좋아...
갑작스런 모니터 변화에 나경은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엥?
그것은 컴의 이상이 아니라, 메모창이 뜬 것이었다.
에구 놀래라. 없는 애도 떨어지겠네.
나야 언제나 안녕하지. 근데, 이건 그냥 보라고 있는 건 아닐테구...메모를 보내는 방법이 따로 있을 텐데.
나경의 마음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했다.
포커스라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라는 메모를 띄우고 싶었지만, 제대로 하는 것이라곤 이제 겨우 텍스트 등록으로 글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것두 보름동안을 낑낑 시름해 겨우 익숙해진 것이다.
화면상으로 갑자기 떠올려진 메모에 놀란 나경은 글 한 줄 보낼 줄 모른다는 것이 답답하고, 포커스에게 제대로 된 응답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한번 ''안녕하세요'' 라는 글이 화면에 올랐고, 행복하라는 글이 떠올랐다.
나경은 서둘러 그에게 메일을 띄웠다.
<죄송합니다...바로 응답하지 못한 것을 사과드리면서...저, 혹시 메모 띄우는 방법을 설명해주시겠어요?>
한참만에 인터넷 상에 있다는 말고 더불어 그 자신도 이런 저런 상세한 설명을 하기에는 미숙하다는 메일을 받았다.
여러 가지로 사람 무안하게 하네. 증말, 알고 있으니까 메모을 보냈을 거 아냐. 좀 가르쳐주면 어디가 덧나나? 에구 드러워서...내가 알아내고 만다.
접속을 종료하려던 나경은 최소한 메모에 응답하는 방법만이라도 알기 위해서 컴안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포커스로 부터 메모가 떴다!
여기저기서 줏어들은 도움의 말을 실행해 볼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다.
영문자로 메모라는 단어를 쓰고, 포커스의 한글 아이디를 입력하고 또 엔터키를 누르고, 한영전환키를 누른 다음에야 처음으로 메모를 글을 보낼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재차 그가 말하고 있었다.
나경은 한참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그에게 메모를 보내었다.
<지금 제 글이 바로 전해진 거예요? 제 글이 보이세요?>
인사 대신 나경은 그에게 물었다.
뭐야. 이 여자 정말 메모 보내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던 거야?
<그래요..아주 잘하고 있어요.>
그가 응답해주었다.
기뻤다.
무응답으로 갑갑했던 가슴이 뚫린 느낌이었다.
나경은 글을 올린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한참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메모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그와의 시간속으로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감상평을, 메일을, 쪽지를 보내준 사람이 포커스라는 이유로 나경은 포커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사는지...몇 살인지 정도는 알고 싶었다.
좀 더 알 수 있다면..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도 알고 싶었다.
나경은 공개 프로필에서 장 기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서른 한 살 먹은 남자란 것을 알아내었다.
아하! 그래서 넘입니다 라고 한 거구나.
대화방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그저 ''님입니다''라는 말이겠거니 대충 짐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르릉...
승규의 전화로 접속이 끊기고 말았다.
나경은 그 순간, 핸드폰의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핸드폰은 뭐하게?"
"글 올리고 있는데...자기한테 전화가 오면...중도에 다 지워져버려...그러지 않을 방법도 있겠지만, 내가 아직은 어눌해서 말야...."
"아주 재미가 났구나.."
"응!"
입이 귀에 걸린 듯 함박웃음을 짓는 나경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카락을 길러보면 좋을텐데...넌 머리결이 아주 좋아..."
또 머리카락 타령이다.
여자라면 스커트를 입어야 하고, 길이는 무릎을 덮어야 하고, 진홍색류의 원색은 안되고..
음...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주면 안되는 거야?
소설 한편이 완결 되었다.
컴을 키고 글을 올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화면상으로 짜잔하고 나타나는 포커스의 등장이 아주 반가웠다.
장 기혁이라는 이름과 포커스라는 아이디에 연관성을 어거지로 맺으면서 그와의 짧은 대화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러나, 남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조금은 조심스러워진다.
결혼은 했을까? 서른 하나라니 했을테지...그럼 부인은 뭘하고, 이렇게 이 사람은 컴 앞에 앉아있는 거지? 권태긴가?
자신의 메모에 응답을 해오는 나경은 여전히 한참을 우회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기혁으로서는 뜻밖이었다.
처음 메모를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는 그녀의 메일을 받고, 상세한 설명을 어물쩡 넘어간 것은 자신을 거부하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문단에 글을 올리는 솜씨로 보아서는 아주 컴퓨터에는 능수능란한 기술의 소유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힌번은 있음직한 현실의 사랑을 깃점으로 둔 그녀의 소설은 막힘이 없다.
그리고, 그녀의 글이 좋은 또 다른 한 가지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글의 소비로 장수를 늘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은 여자는 메모를 보내는 방법을 몰라 한참을 고민하고, 당황해하면서 갑갑해했다는 그녀의 말에 피시식 웃게 되면서 그녀와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좀 더 오래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새롬이군요? 천리안에 가입했으니 이내 CD가 우편으로 올 겁니다..천리안 2000으로는 훨씬 메모 보내기가 수월하죠...>
<네...>
<내가 메모를 보내면 맨 아랫부분에 쪽지그림이 뜨지 않아요? 그것을 클릭해봐요. 그럼 쉬워질 겁니다.>
그의 말대로 아랫부분에 작은 쪽지그림을 클릭한 나경은 포커스라는 아이디를 소유하고 있는 장 기혁이라는 남자와 아주 쉽고도 간단한 방법으로 글을 주거니 받거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알아간다는 것은 나경에게는 작은 기쁨이었다.
<서른 하나의 양산 넘임다.>
<여긴 부산이구요. 전 스물 일곱이예요>
<결혼은?>
<이제 할 거예요...그 쪽은 요?>
말이 없다.
그래서 나경은 혼자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지었다.
이 남자 자신이 결혼했다는 것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아주 권태기에 빠져있는 거야...
그치만, 이 남자 여늬 기혼남에게선 느낄 수 없는 순수함이 있어..그리고 상식이 풍부하고, 감수성도 예민한 것 같어. 그리고, 은근히 센스도 있는 것 같구...
그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결혼하게 될 승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온다.
나경은 승규에 대해서 처음엔 그냥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이것저것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기혁이라는 남자는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이었지만, 왠지 스스럼이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뒤늦게 방어벽을 세워 올렸지만, 그는 의외로 쉽게..깊숙히 그녀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결혼은 언제 해요?>
<부인은 요?>
두 사람의 글이 동시에 손가락끝에서 글로 옮겨져 화면상으로 떴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던져진 질문을 쳐다보았다.
기혁은 자신이 결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아니, 처음이라는 것은 거짓말일테고 사실을 밝히고 싶어졌다.
<결혼을 하지 않은 내게 부인이라니?....사랑하다 헤어진 사람은 있지만, 결혼은 안했어요.>
<네?! 아, 미안해요., 결혼하신 줄 알았어요...>
순간, 나경은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일명, 총각이라는 사실에 기뻐하면서 설레여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