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좋지 않았다.
쇼핑백 안에 든 초콜릿이 나경의 기분을 갉아 먹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대한 이유를 그 누구에게도...단 한 번이라도 말한 적 없으므로....
나경은 발렌타이 데이가 싫었다.
그냥 싫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질색팔색을 할 정도로 싫었다.
이제는 감정이 아주 무뎌져 한사람이 원인이 되어 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눈뜨자 울게 하고, 과하게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엄습해 오는 기분 나쁜 증
상의 일한으로 두통증세까지 일게 하는 발렌타인 데이가 끔찍하게 싫었다.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시선 둘 곳이 없었던 나경은 맞은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쭈욱 훑듯 쳐다보았다.
그러다 나경의 시야로 브이넥에 양복 상의와는 그 모양새가 비슷하지만, 좀 더 활동적인 쟈켓을 덧 입은 한 남자가 포착되었다.
정확한 의사의 진단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나경의 시력은 50미터 후방부터는 그저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 나경의 시력으로는 확실하게 남자의 이미지를 시야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반대편에 선 남자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었다.
"아까부터 얼굴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응....."
"근데, 아까부터 왜 그래? 떫은 감이라도 씹은 사람처럼..."
"뭐, 그냥...기분이 좀 그래..."
"더러운 거야? 기분이?"
말투가 걸걸한 만큼 다소 직설적이기도 해 가끔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 정민은 아주 단적으로 표현하면서, 우울한 기분의 원천을 캐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그냥 센치해진다는 거지."
"날씨탓으로 돌릴 만한 날씨도 아닌데?"
정민의 말대로 날씨는 너무나 쾌창해 내리쬐는 햇살로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빛은 너무나 눈이 부셔 정면에서 각도를 조금만 달리해도 저도 모르게 눈가를 찌푸리게 했다.
나경과는 동갑내기인 정민은 아침에 눈뜨자, 발렌타인데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리고 영업사원의 사기를 복돋우고자 하는 사장의 의도로 초콜렛을 사들은 순간을 절정으로 떨떠름해지기 시작한 기분을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저 남자 말야...엉덩이가 이쁠 것 같지 않니?"
정민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유도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정민의 성격상 떨떠름해 있는 이유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다.
아직은 간단명료하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일년이 지난 여태껏 가슴에 매번 다른 상채기를 내면서 가슴을 휘감고 있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한 사연을 풀어헤친다는 것이 아직은...아직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사연이 중반을 치닫기도 전에 그녀 자신은 틀림없이 소나기같은 눈물을 쏟아내면서 그리움에 사무쳐 까무라쳐 버릴 것이므로...아직은 침묵해야 할 때였다.
"뭐? 얘는...."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정민의 관심은 나경의 저조해진 기분에서 잠시 벗어난 듯했다.
"얼마나 이쁜지 두고봐야 할 것 같지만, 기본점은 넘는 것 같은데...음...평균 85점 정도는 되겠는걸."
나경으로부터 평균 85점의 점수를 획득한 남자는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면서 손을 들었다, 내려놓았다하면서 꽤나 흥분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대형트럭이나 버스의 클락숀 소리에 묻혀 남자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남자는 화가 났음이 분명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빨간불에서 초록불로 바뀌자, 애초에 가기로 결정지어진 목적지로 가기 위해 사람들은 저마다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조금 있다가 센치해지기로 하고, 일단은 건너기로 하자."
정민의 뒤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던 나경은 평균 85점의 남자와 중간 지점에서 짧은...아주 짧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약간 격앙된 음성으로 통화를 하는 남자가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나경은 누군가로부터 명치를 세게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충격이라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아스팔트에 그대로 꽂혀버리기라도 한 듯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속절 없을 수가!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이럴 순 없어!
나경은 무심히 지나쳐 저만치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다.
이럴 수가 없어. 어쩜....이럴수가.
아무리 시력이 안 좋다고 하지만, 아무리 외형상 그의 모습이 변했다지만, 자신의 인생자체를 360도 홱하니, 치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장본인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어떻게든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끝끝내 변명을 늘어놓자면, 185센티에 95키로의 통통한 체격에 약간은 긴 헤어스타일이었던 그가 일년이 지나 75키로쯤의 체격으로 키는 좀 더 커보였고, 짧은 스포츠 헤어스타일로 변해 있었다는 것이다.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클락숀 소리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민망한 욕찌꺼기에도 나경은 엉덩이가 이쁠 것 같다고 했던 남자를 쳐다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거래처의 부당한 트집을 계속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판단으로 남자는 일단 전화를 끊고, 모든 일정을 처음으로 되돌려 거래처로 들이닥치기로 했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속으로 집어 넣은 남자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경적소리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웬 여자하나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별 미친....
처음엔 늦장을 부리다 양쪽에서 오는 차들에 의해서 멈추어 서버린 조금은 둔한 여자려니하고 돌아서던 기혁도 쇠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충격으로 홱 돌아섰다.
아!!
제품 클레어로 핸드폰 통화를 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책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날 동안, 그녀를 날이면 날마다 떠올리면서 에이게 그리워 했던 것은...솔직히 아니였다.
그러나, 사춘기 때를 빼고, 인영을 빼고...자신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허리가 뻑적지근하도록 컴의 화면을 들여다보게 했던 여자를 아주 잊고 산 것은 아니었다.
비가 올 때면...뙤얕볕에 땀을 주룩 쏟아내고, 덩달아 불쾌지수가지 일게 하는 여름이었지만, 양껏 비를 즐길 수 있다는 이유로 여름을 좋아하는 그녀가 떠오르곤 했었다.
그녀 때문에 덩달아 좋아하게 되버린 가수의 노래를 길가에서 들을 때면...저도 모르게 멈칫 걸음을 멈추곤 했었다.
어디선가 커피 향이 전해질 때면...커피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지만, 광적으로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커피를 마셔보기도 했었다.
"나경아! 야, 김 나경! 뭐하는 거야?"
정민이 소리쳤다.
정민이 소리내어 말해준 그녀의 이름은 남자의 가슴에 자리한 여자가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기혁과 눈이 마주치자 헉하고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던 나경은 정민에 의해 도로밖으로 끌리다시피 나올 수 있었다.
돌아보고 싶었다.
다가서 아직은 사랑으로 남아있는 남자에게로 다가서고 싶었다.
아직은 사랑이라는 틀안에 남아 있는 그의 가슴에 와락 안겨 들고 싶었다.
그러나, 나경은 손가락질에 욕찌꺼기를 한몸에 받으면서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잰 걸음으로..그리고, 기혁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곧잘 발목을 접히게 하던 통굽 구두였지만, 나경은 단거리 선수라도 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야? 아는 사람이었던 거야?"
"아, 아니. 엉덩이가 너무 이뻤어..."
엉덩이가 이쁜 남자...어떻게 그를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가슴저밈으로 눈두덩이가 시뻘개지도록 울게 한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시간의 강이 흘러 그의 모습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바로 지척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정말 사람의 마음이란 믿을 수가 없어. 사람이 하는 사랑도 그렇고...
그녀를 만나야겠다!
"주문하시겠어요?"
"여기 녹차가 안되는 데...어쩌냐?"
"커피 마시자....아, 그리고..담배 한 갑 주세요."
"담배값은 선불인데요.."
무릎을 기준으로 10센티쯤은 더 올라간 미니 스커트의 유니폼을 입은 여종업원이 아주 무심한 듯이 말했다.
"얼마죠?"
"천 사백원인데요..."
영훈은 생전하지 않던 짓을 하려는 기혁을 낯선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짤렸어?"
"뭐?"
"해고됐냐구?"
"아무리 경제가 바닥을 기고 있지만, 사장이 짤리는 회사는 없어."
"근데, 왜 생전하지 않던 짓을 해? 나 담배 끊은지 일주일째라는 것을 알면서 약 올리는 거야?"
친구가 말하는 ''''''''생전하지 않던 짓''''''''을 하면서 기혁은 문득 그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그래, 그랬어,...그 여잔 내 오랜 습관조차도 무력하게 만들곤 했었어.
"난 또 무슨 말이라구..."
커피가 왔다.
갈색의 커피를 보는 순간, 진하고 달게...정말 설탕 맛으로 커피를 마시곤 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마주 앉아 커피를 주문할 때면..그녀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었지.
저기요...여기 설탕 하나 더 주세요.
그리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커피외에는 그다지 달게 먹는 편이 아니예요'''''''' 라는 말을 꼭 덧붙이곤 했었지..
테이블위에 커피가 놓여지면..난 반쯤 남은 설탕을 그녀가 마실 커피안에 넣어주곤 했었지.
그러면...그녀는 아주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듯, 기분좋은 얼굴로 웃곤 했었어.
그러나, 우리들 사이로 무심하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날들이 지나갔어.
그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부푸는 지 아리는지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지곤 했어.
"이 번호 주인이 지금은 무슨 번호를 쓰고 있는지...알아봐 줘."
"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해커 출신인 니가 알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
"얌마..그 때는 한창 철 없을 때구...지금 이 나이에 그 짓 하다 걸리면..우리 엄마 또 넘어가. 임마."
"으흠...흠!"
담배 한 모금 빨던 기혁이 요란스럽게 기침소리를 하고는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내리 뱉어내는 모습에 영훈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알아봐줄테니까 안하던 짓 하지마."
친구는 안하던 짓 좀 그만하라고 성화를 부렸지만, 그 안하던 짓의 묘미를 기혁은 느끼고 있는 터였다.
몸이 붕 뜨는 것 같기도 하고, 몽롱한 것이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영훈은 알아봐 준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침소리와 담배연기를 함께 내뿜고 있는 기혁과 그가 건네준 쪽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김 나경. 016-549-XX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