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남편의 샤워 소리가 부엌까지 들려온다. 시원스레 쏟아지는 샤워 물소리에 그녀의 머리는 시원하기보다 웬지 무겁고 짜증스럽다.
언제부터일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름휴가를 갔다온 뒤부터인 것 같다. 아니 자세히 말하자면 그 훨씬 전인 것 같다.
어느날 부터 그녀의 남편이 저녁샤워가 아닌 아침 출근 샤워로 바뀐 뒤 불신은 시작되었고 회식장소에서의 남편의 넋나간 시선은 불신을 확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랬다, 그년 믿음이라는 신뢰감마저 잃어버린 중년의 아낙네로 전락해버린 것이다.처음엔 설마였고 두번째는 그럴 수 있겠지였다가 이제는 마음도 몸도 다 포기한 그녀로서는 중년의 무력감에 덜미를 잡하고야 만 것일까.
찔레가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 와도 그년 뱃살의 무게처럼 휘적거렸다. 커텐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햇살에 휘부옇게 퇴색되어도 그녀의 시야엔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디 그 뿐이랴, 요모양 조모양 내던 요리도 심드렁 달랑 신김치만 오른 날이 잦고 그런 뒷날엔 그녀의 남편은 회식이라는 변명으로 늦곤 하였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중년의 무력감에서 벗어나려고 애써보지만 허탈감과 배신감에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리곤 축 아래로 쳐져 아집만 늘어버린 독선적인 그녀의 남편을 떠 올려 보고 피식 조소로 정신을 곧추 세우곤 하였다.
그랬다. 그년 그렇게 중년으로 치닫는 고갯길을 그렇게 어렵사리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엣취에에취-"
끈질기게 그녀를 물고 늘어진 또 하나의 골칫거리는 여름휴가후에 얻은 비염이그녀의 콧망울 끝에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도 없는 코막힘,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울줄 흘러내리는 콧물은 그녀를 더한층 고개를 떨구게 하였다.
"에취 에에에취-"
" 당신, 감기가 왜그렇게 오래가? 오늘 병원에라도 들려봐. 하루 종일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감기는,모두 운동부족이야."
남편의 힐책도 힐책이었지만 그녀를 옭아맨 비염에서,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중년에 찾아든 체질 변화로 온 경우니 만큼 시일이 걸릴겁니다."
말쑥한 차림의 젊은 한방의사는 6주간의 치료를 예상하였다. 먼저 코 주변에 따금한 침을 몇개 꽂고 향 치료법이라며 티슈에 향을 뭍혀 인중에 올려 놓았다.
허브 냄새 같은 것이 코 안으로 스며들며 막힌 코가 좀 뚫리는 것 같아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는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허브의 향을 쫓고 있었다. 팔랑팔랑-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손님, 다 되었습니다."
낭랑한 간호사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었나 보다. 그녀는 습관처럼 오른 손 엄지로 입가를 훔치며 멎적게 웃었지만 웬지 풋풋한 간호사의 생기 있는 모습에 주눅이 들엇다. 간호사는 기십만원이 넘는 한약과 향치료법을 병행하라며 엄지 손가락만한 향료 병을 약봉지에 담아주며 한약은 내일 치료 받으러 올 때 찾아가면 된다는 설명을 하곤 새로 들어서는 환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녀는 마치 비염이 다 나은듯 시원해진 코를 만지며 한방병원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이 놈의 비염. 이젠 너와의 전쟁도 얼마 안 남았다."
그녀는 중년의 무력감 같은 비염 퇴치를 위해 한의사의 지시에 따라 한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을 뿐 아니라 향료도 코에 갖다대고 흥흥거렸다. 또 매일 침 맞는 것을 거르지 않았다. 하루 , 이틀....
약속한 6주간이 다 되어가는데도 코가 뚫리기는 커녕 여전히 집에오면 숨이 막히고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리고 흐르는 콧물을 자꾸 닦다보니 코 밑이 헐어 쓰리고 아팠다.
"제기럴. 이 놈의 한의사 돌팔이 아냐. 통 차도가 없어?"
결국 그녀는 며칠 남은 치료를 포기한채 킁킁 코만 풀어대었다.그녀는 휴지통 가득 채워져 가는 콧물 묻은 휴지들이 마치 자신의 모습 같아 진저리를 치면서도 하얀 두르마리 화장지를 끌어다 풀어헤쳐 코에 갖다대는 무력감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마흔의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