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잠을 뒤척여서인지 아침이 개운하지 않았다. 혼자 먼저 식사하고 산책이라도 할 요량으로 7시가 되자 마자 레스토랑으로 내려갔었다. 한산한 레스토랑에서 어메리칸 브랙퍼스트로 요기를 하고는 호텔을 빠져 나와 다운타운을 지나 바닷가로 나가는 길을 따라 걸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침 7시에는 다운타운에서 사람을 보기 힘든데 그곳 사람들은 오히려 이른 아침에 움직임이 많은 것 같았다. 쇼울더 백을 둘러 맨 은발의 백인 여자가 바쁜 듯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갔었다. 그 여자의 야릇한 향수냄새와 손에 쥐었던 샌드위치의 버터 향이 묘하게 섞여서 코를 자극했던 것 같다. 다운타운을 빠져 나와 바닷가에 이르렀었다. 왜 서양인들이 바닷가에 사는 것을 동경하는 가 궁금했었는데, 아침의 상쾌하고 청명한 공기에 뒤 섞여있는 바다 향과 조용하게 밀려와서 살짝 소리 내는 포말이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을 잊기 위한 명상의 장소로서 이만한 곳이 없음을 깨닫고는 스스로 이해가 됐었다. 백사장을 그냥 걸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마치 놀림을 당한 아이가 그 후에 그것이 놀림이었던 것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창피함처럼 어제의 일들이 새록새록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걷는 사이에 내가 촌스럽도록 너무 예민한게 아닌 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장, 부장, 그리고 나 셋이서 다시 모여 공항을 향하여 출발한 것은 오후 2시를 넘어서 인 듯 했다.
한국에는 다음날 오전 시간에 도착했었기 때문에 집에 들릴 시간도 없이 바로 회사로 출근했었다. 회사의 빌딩을 보고 내려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 사무실로 들어 오면서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안온함을 느꼈다.
“어…팀장님 오셨어요? 일 잘 됐어요?”
맨 먼저 K가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서 물었다. 언제 봐도 인사성이 밝고 명랑한 K는 미워할 수 없는 타입의 사람이다. A를 비롯한 나머지 팀원들도 모두 매우 반가운 듯 맞아 주었고, 오랜만에 앉는 내 자리가 너무 편해서 오히려 집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온 것이 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 동안 CHECK하지 못 했던 업무를 정리하고 사장과 이사들과 부장에게 출장 결과를 다시 간단히 브리핑 한 후에 우리 팀원에게 출장결과를 알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일 하자고 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누구랄 것도 없이 같이 식사를 하자고 제의해서 본의 아니게 마치 회식을 하는 것 같은 점심이 됐었다.
“어떠셨어요?”
A가 몹시도 궁금한 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A는 사장의 비서실에서 오랜 근무를 했었지만 출장을 따라 다니지는 못 했고, 요번 출장이 A의 실수로부터 기인된 것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는 관심이 더 한 듯 했었다.
“응. 뭐…다 의외로 잘 풀려서 정말 다행이었어…사장이 아주 능수능란하게 사람들을 다루더라고 영어도 진짜로 수준급이고 거의 네이티브 수준이어서 많이 놀랐지…”
“그래도 사장 학교는 기부금 내고 들어 갔다는 얘기가 있기는 한데…”
사장을 오래 모셔서 단점을 많이 보아서 일까, A는 한사코 사장에게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는 눈치였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선물될 만한 것은 사지 못했고, 그냥 간단하게 쵸코릿 몇 상자 사 왔거든…K씨가 갖고 있다가 오후에 한 상자 씩 먹자”
“와…제가 좋아하는 쵸코릿 사오셨네요….역시 팀장님은 절 예뻐하셔…”
“그럼…다 좋아…요번에 혼자 오래 밖에 있으니까 되게 보고 싶더라고…”
“아휴…오빠 만큼 보고 싶었겠어요…”
역시 L은 SENIOR 답다고 생각했었다. K와 나 사이의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한 방에 보내버리고 내가 남편이 있는 가정주부였다는 사실을 바로 상기시켜 줬었다.
“그렇지…사실 남편이 제...일 보고 싶었지…”
오랜만에 가볍게 팀원들과 얘기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출장의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이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여의치 않았을 것이었으므로…
“참 저희 J씨 만났어요…”
L이 말했다.
“J씨…”
“네, 팀장님 출장 가고 바로 다음날 연락이 와서 자기가 뭐 점심 산다고 해서 우리 모두 만나서 밥 먹고 그때 그 선물 가지고 있던 것 줬어요…”
“그래? 잘 했네…, 잘 지낸데?”
“뭐…살은 그전 보다 빠진 것 같은데…얼굴은 그다지 나쁘지 않더라구요…”
L과 나 사이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S와 K가 이구동성으로 한 마디 했었다.
“근데 태도가 예전과 달라요…옛날에는 되게 도도한 자세였고 우리랑 좀 거리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아주 많이 친근한 척 해서 좀 당황했어요…”
“맞아요…그리고 S 선배는 잘 모르겠지만, 나랑 화장실 같이 갔잖아요…글쎄 그때 자기가 나를 평소에 동생처럼 생각했었다면서 자주 연락하자고 내 핸드폰 번호 알려 달라고 해서 알려 줬잖아요…많이 변한 것 같아요…”
“그래?”
A 역시 J와 그렇게 가까이서 얘기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사장을 만나러 왔을 때는 너무 차가와서 마치 눈의 여왕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었다고 말했었다.
“사실 근데…나 그전에 휴가 갔다 와서 한 번 본적이 있는데…”
“예?...왜요?”
괜히 L의 궁금증을 발동 시켰나 싶을 정도로 L이 의아한 듯 나를 봤다.
“아니, 갑자기 전화 와서 꼭 봐야겠다고 해서…”
“왜요?”
모두 궁금한 듯 시선을 모았었다.
“음…사실은 런던에서 한 번 봤거든…”
“혹시, 사장이랑 같이 있지 않았어요?”
A의 질문에 한 방을 먹은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비로서 들었었다.
“무슨 말이야? 왜 사장이랑 같이 있어?”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L과 S는 사실이라도 되는 양 A를 향해 다그쳐 묻기 시작했었다.
“아…아니…저……..사실 사장이랑 J씨 관계가 좀 이상한 것 모르셨어요?”
한 발 더 나아가서 A의 발언은 우리 모두의 관심과 궁금증을 증폭시킬 수 밖에 없었다.
“무슨 관계?”
그녀와 약속을 깬 것에 대한 미안함을 잊은 채, 사장과 그녀의 관계에 대한 궁금함으로 참을 수가 없어 A를 깨듯 물었었다.
“아니, 말은 오누이라고 하는데, 두 사람이 오누이 치고는 약간 뭐랄까 연인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때가 종종 있어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나와 L, S, 모두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A를 다그치는 사이에 K가 입을 열었다.
“언니, 그럼 사내에 그 소문 사실이예요?”
“뭔 소문…?”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K와 A만이 알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둘 모두를 한꺼번에 재촉하고 있었다.
“아니…그…사장하고 J언니하고 사실은 오누이 관계 아니라는 거…”
K의 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L이 일침을 놓았다.
“무슨 얘기야…그건 예전에 우리끼리 얘기했었잖아? 뭐 부적절한 관계 아니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어…?”
L이 말한 누군가가 바로 나였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주변도 없었고, 그녀가 내게 한 얘기를 그래도 믿고 전달하는 수준에 그칠 수 밖에 없었으므로, 나로서는 내가 알고 있던 사실에 의기양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런던 이후로 나는 사장과 그녀에 대한 관계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뭔가가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 B 한테 들으니까 뭐 그런 얘기가 진짜로 있기는 있었나봐요…그렇죠 A언니…”
K는 우리의 궁금함을 한 번에 일소시키기에 자신의 역량이 부족함을 느꼈었던지, A에게 공을 던졌었다.
“음…사실…워낙 J씨가 미모도 출중하고…그리고 사실 J씨랑 사장이 오누이 관계라고 보기에는 J씨의 출연이 갑작스런 점도 있고 해서…”
“무슨 소리야 좀 알아듣기 쉽게 좀 설명해 주면 안되나?”
S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A를 몰아세웠다.
“사실, J씨의 존재는 왕회장이 돌아가시기까지 아무도 몰랐고, 회장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도 못했던 사람이예요…갑자기 사장이 돌아오면서 같이 와서 동생이라고 회사에 자리 만들라고 하는데…사실 뭐 진짜 ROYAL FAMILY이면 좀 높은 POSITION에 앉히는 게 보통이잖아요? 근데, 평사원부터 시작시키는 것도 그렇고…그리고 가끔 사장실에 놀러 와도 그냥 오누이 사이 같이 보이지는 않았는데…오히려 남녀 관계에서 하는 식으로 좀 터치도 심한 것을 목격한 사람도 있고 뭐 그러고 해서…얘기가 비서실 사람 사이에서 좀 많았었죠…”
갑자기 런던에서 그녀와 사장의 모습이 떠 올랐다…그리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가 내가 목격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었던 것을 기억해 냈었다.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다 못해 거의 신기에 가까운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도 갑자기 뭔가 내가 그녀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사실, 나, 사장이랑 J씨랑 런던에서 같이 봤어…근데…둘이 부둥켜 않고 걷더라…”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모르겠다. 모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날 쳐다봤었다.
“그래서, 오시자 마자 제게 물어보신 거였어요?”
“응…”
“뭘…뭘?”
L, S, K, 우리 모두는 마치 운명 공동체라도 되는 양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하나의 사실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달려들었었다. 하는 수 없이 런던에서 본 것, 그녀와 만났던 것, 그리고 A에게 사장의 스케쥴을 묻게 된 것 까지 말하고 말았었다.
“아니 근데…오누이 관계인 것은 맞아?”
“글쎄…돌아가신 왕회장의 SECOND 정도의 딸이라고 알고 있어요…근데…그 SECOND인가 하는 분이 왕회장님 돌아가시고 바로 자살했었다고 하더라고요…”
“자살?”
그녀의 모친이 자살을 했다는 말은 K를 통해서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A를 통해서 다시 듣게 되니 갑자기 머리가 쭈뼛하고 서는 느낌이 들었었다.
“왜?”
내가 묻자 A는 청산유수와 같이 자기가 들은 얘기를 전해 줬다. 아마도 A는 그 사건이 있은 후에 나와 팀 동료에 대한 신뢰가 많이 쌓였고, 그런 차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무방하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A에 의하면 현재의 회장, 즉, 사장의 작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사장이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왕회장의 여자들과 그 자식들을 모아 놓고는 회사 지분에 대한 포기각서를 받았고 특히 모두 왕회장의 장례식은 물론 앞으로의 모든 집안 및 회사의 대소사에 참석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렸으며, 그에 대한 대가로 상당액의 유산을 나눠주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사장은 자신의 이복 형제남매들와 그 모친들에게 무례하고 매정하기로 유명하며, 집안에서도 우려하는 소리가 높았었기 때문에 회사지분과 경영권 인수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장이 유독 그녀만 자신의 근처에 두었던 것은 아무래도 집안과 비서실, 그리고 회사의 중역들 사이에서 이상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정황상 사장과 그녀가 실제로 오누이 관계라는 것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있는 듯도 보였었다.
A의 얘기를 더 듣고 싶었었지만 점심시간도 끝나갈 무렵이었고, 무엇보다도 갑자기 그녀가 친하게 지내고 싶다 얘기한 것이 떠올라 내가 해서는 안 될 얘기들을 늘어놓았다는 사실이 몹시 미안하고 스스로 부끄럽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