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와의 오랜 친분관계 덕분인지 사장의 수완 덕택인지, 처음에는 몹시도 껄끄러운 자세로 일관하던 파트너들이 조금 조정된 계약관계 등을 수락하고 다시 잘 해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맺었었다.
출장 내내 긴장을 하고 있었던 탓이었을 까? 일이 예상보다 잘 풀리고 사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일관되게 매우 신사적이었기 때문에 출장 마지막 날에는 그 동안 회사에 대해 섭섭했던 마음도 사그라지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도 많이 줄어서 출장을 떠날 때보다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마지막 미팅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 오는 택시 안에서 사장이 내게 말했다.
“Y씨 요번 출장 많이 힘들었지요? 고생 많았어요…”
“아니요. 별 말씀을 요…오히려 회사에 누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회사에 누를 끼친 것은 Y씨가 아니지요…외국어 실력도 상당하고 파트너들이 Y씨 칭찬하는 것 들었지요? 일이 잘 된 것이 다 Y씨 덕분입니다.”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마치 초등학교 1학년생이 담임선생에게 칭찬을 듣고 뿌듯해 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사장이 나에 대해 그런 칭찬을 하는 것이 몹시 기쁘면서도 상대적으로 부장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 불편한 마음 역시 들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장은 원활한 대화로 상대방을 설득하기에는 외국어 실력이 모자랐고, 자료 준비 역시 대부분 나 혼자서 한 것이었으므로, 사장이 어떤 질문을 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답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어서 부장으로서는 오히려 자신의 입지가 약해진 면이 없지 않았다. 그녀의 퇴사 후에 개선된 듯한 부장과 나의 관계가 악화될 수도 있을 거란 불안한 기분이 들었었다.
“자 모두 힘든 출장에 수고 많았는데...오늘 저녁은 내가 근사한 곳에서 한 번 쏘지요…이따 저녁 6:00 에 로비에서 봅시다.”
호텔로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사장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거의 1주일이 다 되가는 출장 기간 내에 사장은 파트너와의 업무상의 미팅 외의 시간을 혼자서 보냈고, 사실 부장과 나만 서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어색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식사를 같이 했었기 때문에, 사장의 저녁 제안은 약간은 의외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사장이 우리에게 저녁을 대접할 곳의 수준이 어느 정도가 될 까 무척 궁금했었다.
부장으로부터 식사를 할 곳이 호텔에서 약 1시간을 더 가야 는 곳이고 정장을 요하는 곳이므로 드레스 코드로 복장을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고 난감했었다. 사실, 출장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었던 관계로 저녁 식사에 어울릴 만한 드레스라고 할 만한 원피스 조차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었다.
저녁식사 시간까지는 시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호텔 근처의 쇼핑몰이나 백화점에서 싼 원피스 드레스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호텔 꽁시에르지에 물어 백화점의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를 예약을 했다. 택시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막 나가려던 차에 인터폰이 울렸다.
“HELLO?”
“Y씨?”
사장이었다.
“네, 사장님?”
“아 저녁식사 복장 말인데요…”
“예?”
“아…정장을 입어야 입장이 되는 곳이니까…잊지 마세요…”
“아…예. 아까 K부장께 얘기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뭔가 말하려다 말고 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사장이 내 방에 전화를 한 것은 몹시 의외의 일이었다. 물론 드레스 코드를 알려 주려고 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굳이 그것을 재 확인할 필요가 있었을 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호텔 근처의 백화점에는 파티 문화가 만연된 곳답게, 파티용이나 디너용 드레스를 파는 코너가 따로 있었고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웃옷을 걸치면 정장으로도 입을 수 있는 심플한 A라인의 검정색 민소매 원피스를 구입했다.
이것 저것 예쁜 옷이 많았고 가격도 저렴해서 욕심이 났었지만,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입어 본 여러 벌 중에 하나 만을 선택해서 계산을 했다. 옆에 종업원이 따라 붙어 일일이 신경이 쓰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마음에 드는 여러 벌 선택해서 FITTING ROOM에서 이것저것 입어보고 고르면 되기 때문에 종업원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옷을 고를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에 거의 화장을 하지 않았었지만, 드레스에 맞춰 어는 정도의 화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옅게 화장하고 립스틱은 핑크 립그로스로 대체했다. 머리는 내릴 까 하다 말아서 올려봤었다.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올려서 일까 나쁘지 않은 스타일이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6:00 정각에 로비로 내려왔다. 부장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비아냥 거리 듯 말했다.
“아이구…화장까지 했네…Y씨 기분이 좋은 가 보지? 그건 그렇고 좀 일찍 내려와서 기다리지 말이야…내가 먼저 내려와서 기다려야 하나?”
“아…예…죄송합니다.”
부장의 말이 맞는다…당연히 아랫사람이 5분에서 10분 먼저 내려와서 택시도 알아보고 상사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위기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여성을 배려하는 사장과 있어서 였을까? 부하직원의 본분을 잊고 나는 항상 부장보다 늦게 준비를 끝내고 부장을 기다리게 했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사장이 내려왔다. 그 동안 인식을 하지 못했었지만, 사장은 자기 나이보다 젊어 보였었다. 게다가 키가 훤칠하고 서구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관계로 서양사람들과 견주어도 눈에 띄는 스타일이었다.
간단하게 목례를 했다. 사장은 부장과 나를 향해 한 번씩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가자고 했다. 이미 예약을 해 두었었던지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택시 안에서는 이렇다 할 얘기가 없었는데, 택시가 도착한 곳이 레스토랑이 아닌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던 항구여서 좀 황당했었다.
“어…저희가 가는 곳이 레스토랑 아닌가요?”
좀 황당하다는 듯한 내 질문에 사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섬에 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페리를 타고 들어가야 합니다.”
부장은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했는데…나 한테 왜 얘기를 하지 않은 거지?
“아…예…”
섬으로 들어간다는 얘기가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그럴 만한 가 보다 생각해서 잠자코 따르기로 했었다. 물론 가기 싫다고 가지 않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큰 요트에 가까운 페리 안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손님을 위해 칵테일과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었으므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보다는 칵테일을 들고 갑판위로 나와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시원한 태평양의 공기를 마시며 저녁 식사를 위해 배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저녁시간에는 보기 힘든 물개가 나왔다면서 오른 쪽 전방에 물개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고 싶으면 찍으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었다. 페리 안의 사람들이 즐겁게 물개를 구경하는 동안 나 역시 보기 힘든 광경을 노치지 않기 위해 뚫어 져라 물개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원하지요?”
“아…예…”
부장과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부장은 보이지 않고 갑자기 사장이 내 옆으로 왔다.
“아침에 크루즈하면 고래도 볼 수 있어요. 아무래도 캐나다랑 가깝고 추운 곳이어서 그런지 물개, 고래를 자주 볼 수 있죠…”
“아…예…”
“좀 쌀쌀하지 않나요? 외투는 안 가지고 왔나요?”
“아..아닙니다. 외투는 자리에 벗어 두고 왔습니다.”
“그래요? 밤에는 갑자기 기온이 많이 내려 갑니다…감기 걸리기 십상이죠…”
라고 말하고는 사장은 가버렸다. 부장은 꼬박꼬박 내게 반말이었지만, 사장이 반말하는 것은 들은 적이 없는 듯 했다. 게다가 나를 걱정하는 듯이 말해주는 사장이 도저히 A가 말하는 것처럼 나쁜 사람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배를 타고 약 40분을 왔을 까? 작은 섬에 도착했다. 항구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조그만 선착장에 요트에 가까운 페리가 정박했다. 선착장 근처에서 차가 있는 곳까지의 길이 통나무로 되어있어서 걷기에 편했다. 차로 가는 통나무 보도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삼림이 ‘와’ 하고 스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었던 것 같다. 줄 지어 있던 검정색 리무진을 타고 우리의 목적지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검정색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밖에 나와서 인사를 했다.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를 해주고 내 외투를 받아 간 후 다시 나와서 자리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창가였는데, 밖으로 넓은 잔디밭과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귀에 익은 실내악 4중주가 실연되고 있었고, 통나무로 지은 듯한 레스토랑의 내부에서는 진한 나무 향이 퍼지는 듯 했다. 메인 메뉴는 연어 스테이크로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 연어는 잘 굽지 않으면 먹기 힘든데, 연어에 벤 깊은 나무 향과 생각보다 부드럽고 단백한 육질이 수준급의 요리사가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인 메뉴 후의 디저트와 차 모두 수준급이었고, 특히, 깊고 그윽한 향과 부드러우면서도 쌉싸름한 맛 어울린 커피는 일품이었다.
“어때요? 괜찮습니까?”
“네…맛 있습니다.”
나는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는데, 부장의 입에서는 연신 너무 맛있다느니, 사장님은 역시 다르다는 둥 듣기에도 민망한 찬사가 끊이지를 않았었다.
사장은 뭐가 유쾌한 지 계속 웃는 낯이었고, 자기가 요리를 좋아한다는 얘기며, 이 레스토랑이 이 일대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수준 있는 곳이라는 둥, 미국 지사에 있었던 시절의 에피소드 등을 쉼없이 얘기해서 이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사장이 맞나 하고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게 했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줄 알았던 나로서는, 옆 건물의 볼로 옮기라는 안내 방송과 웨이터와 웨이트리스의 에스코트에 놀랐다. 알고 보니 식사 후 간단한 댄스파티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통나무로 만든 구름 다리 비슷한 것을 건너 옆 건물로 옮겨가게 되는 데, 칠 흙 같은 어둠 속의 찬 숲의 공기가 정신을 확 깨워 주는 것 같았다. 옆의 댄스 홀은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의 반짝임이 너무 아름답다고나 할까…소규모 오케스트라의 경쾌한 왈츠가 흥을 돋워줬었다.
그 날 손님 중에 몇은 사장과는 이미 안면이 있었던 지 사장은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얘기하고 웃고 아주 즐거운 듯 보였었다. 하지만, 이런 문화와는 처음 접해본 나로서는 모든 것이 당황스럽고, 그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몸을 흔들고 다니 것을 구경하는 수준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하기는 부장도 마찬가지 인지 계속 나를 갈구던 부장이 오히려 내게 친절을 베풀며 자신이 젊었을 때 유학할 때의 얘기라든 지, 우리와는 다른 서양애들의 사고라든 지를 주절댔었다. 갑자기 사장이 이렇게 낯선 환경에 우리를 방치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꼽다는 생각이 밀려왔었다. 이런 자리가 전혀 즐거울 수 없던 나로서는 가능하면 빨리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이 ??구쳤었다.
“아. Y씨 이런 곳은 처음인가요?”
갑자기 왠 양키를 데리고 나타나더니 내게 물었다.
“예?...예…”
“아무래도 좀 어색하지요?”
“네.”
갑자기 들켜서는 안될 것을 들킨 어린 아이 마냥 귓 볼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사장은 자신이 데리고 온 양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오늘 파트너가 되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부장을 데리고는 사라져 버렸다.
나한테 일언반구 말도 없이 처음 보는 양키에게 날 맡기는 사장이 너무 괘씸하고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기분을 몹시 언짢게 만들었다.
“저 녀석 재미있지 않니?
씩 웃으며 뭔가 횡재한 듯한 눈길로 나를 보던 그 양키는 자신은 이름이 로버트고 변호사이며 사장과는 업무상 일년에 한 두 번은 만나지만 친한 친구나 진배없다며 인사를 했다.
내 소개를 간단히 하고는 사실 이런 곳에 이런 파티에는 처음 와 봐서 몹시 어색하고 빨리 숙소로 갔으면 좋겠다는 얘기에 로버트는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보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나는 유부녀고 한국에서는 남편이 있는 여자는 다른 남자와 같이 춤추지 않는다고 하자, 로버트는 배꼽이 빠질 듯 웃더니, 춤만 추는 것은 괜찮지 않냐며 반문을 했다.
사장의 친구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춤을 추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의 말에 동의했었다. 갑자기 음악이 빠른 팝으로 바뀌고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흔들어 대기 시작했었다. 로버트 역시 무척이나 즐거운 듯 흔드는 틈에 나는 마지 못해 몸치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따라 춤을 췄다.
춤을 추는 동안 머리가 텅 비는 듯하더니 이내 분위기에 묻혀 가는 것 같았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사람들, 샹들리에의 불빛, 칵테일의 달콤함, 이런 것들이 다 즐거워졌었다.
얼마를 즐겼을 까? 사장이 돌아왔고 음악도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왔다. 즐겁게 놀았냐는 사장의 말에 네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부장을 봤다. 몹시나 신나있었다. 로버트가 나를 배까지 데려다 주었고, 사장, 부장, 나, 로버트, 그리고 로버트의 친구라는 여자 이렇게 다섯이 페리 위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마셨다.
부두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타기 전 로버트와 사장이 서로 뭐라고 숙덕이더니 로버트와 그 일행이 우리의 숙소까지 왔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씩 더 하자는 로버트의 제의에 사장이 동의했고 부장과 나를 초대했지만, 쉬고 싶어서 거절했다. 부장은 남기로 하고 나는 방으로 올라왔다.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닌 곳을 맛 본다는 것은 달콤하지만 위험한 유혹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분위기에 익숙한 사장과 자유롭게 즐기며 자신을 불태우며 살아가는 서양사람들이 부럽단 생각이 다시 들었다.
갑자기 내가 즐기던 시간에 혼자서 외로이 기약 없는 미래을 위해 책과 씨름하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자 가슴 한 켠이 아리는 듯 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었다. 집으로 전화를 했었다. 신호음이 계속 가는데도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남편이 집에 있을 시간이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자 갑자기 서운함과 서러움이 복받쳤다.
화장을 지우고 욕조에 몸을 눕히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예?”
로버트가 룸서비스로 와인과 과일을 올려 보냈었다.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기분 나빠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고맙다고 받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문을 걸어 잠그고, 전화코드를 뺏다. 혹시 나를 쉽게 생각하는 게 아닌 가 해서 기분이 몹시 상했고, 이런 상황을 만든 사장이 몹시 불쾌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