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는 잘 지냈어? 날씨가 변덕스러워서…우리는 고생 좀 했는데…”
“아뇨…뭐…전 좋더라구요…”
“그래…”
정작 묻고 싶은 말은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류의 얘기는 그녀가 먼저 하지 않는 한은 차마 내 입장에서 물어볼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그녀가 화제를 돌려 내게 물었었다.
“언니는 오빠 어떻게 만났어요?”
내 사생활에 대해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나와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그녀의 그런 질문들이 약간은 불쾌했었다.
“응…과 친구 소개로 만났어…”
“그래요.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음…뭐 이 사람 정도면 나한테는 딱이다…뭐 그런 생각이 들었었던 것 같은데…”
“저도 우리 그이 처음 만났을 때…이 남자라면 나를 다 이해해주고 그리고 행복하게 해 줄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머금고 행복한 듯 재잘 되는 그녀의 표정이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었다. 어떻게 저렇게 변화무쌍 할 수 있을 까…?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에는 집안에서 남편과 결혼하는 거 반대 했었는데…제가 막 밀어붙여서 만나고 한 세달만에 바로 결혼했잖아요…”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가 어쩐지 낯설었다. 그런 개인사가 내게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었고, 현재의 그녀와 그녀 남편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의 재잘거림은 궁색한 변명을 위한 사전 초석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래…선 봐서 만났어?”
“아니요…제가 남편 환자였어요…”
이건 또 뭔 소린가? 의사는 환자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관례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의사와 환자로서 만남에서 결혼까지 골인 했다는 사실이 약간은 의외였다. 특히, 그녀와 같은 back ground를 가진 사람이라면 주로 맞선이나 집안과 집안을 통해 혼사를 치루는 것이 다반사인 만큼, 물론 그녀의 남편은 흠 잡을 데 없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됐었지만…, 연애결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그럴 수 있겠다…”
“사실은 연애할 때 걱정 많이 했었어요…남편이 아무래도 좀 꺼리는 것 같기도 하고 집안에서도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근데…이 사람이다 싶으니까 제어가 안 되더라구요…”
남자가 여자와의 만남을 주저하게 될 때 주된 이유는 아무래도 상대방의 배경이 자신 보다 너무 뛰어나거나 아니면 자신의 능력이 여자를 부양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이 될 때 인 것같다. 남편과 나의 결혼에 있어서도 그 점이 가장 큰 장애였었던 것 같다. 일단 남자의 그런 마음을 고친 후에는 집안과 부모의 반대는 결코 넘을 수 없는 장애가 아니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녀의 결혼 이야기를 들으며 뭔지 모를 공감대를 형성한 듯 했었다.
“그래? 와…그래도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미국에서 들어와서 잘 적응도 안되고 회사 생활도 처음이라서 이것 저것 신경쓰이는 게 많았을 땐데…남편이 옆에 있어서 너무 많이 도움이 됐었거든요…낮의 생활이 암흑이라면 짬짬이 남편을 만나는 저녁시간은 완전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돌파구 같은 거여서, 남편이 없이는 못 살겠다고 생각 했는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이 일리 있는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했을 때, 모든 것이 너무 낯설고 혹시 실수라도 할 까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 역시 잠깐씩 남편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하루 하루를 견뎌나갔던 것이 생각났었다.
“저는 엄마가 그때 돌아가신 지도 얼마 안되고 그래서 더 남편과 같이 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결혼식 때 얼마나 울었는지…엄마가 결혼식도 못 보신 것이 너무 슬프더라구요…”
그녀의 넋두리가 도를 넘은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녀의 너무 깊은 개인사를 듣는 것은 그녀와 거리를 느껴오던 나로서는 좀더 친근해 지는 면도 없지 않았으나 어딘지 모를 그녀에 대한 저항의식이 오히려 그런 그녀의 태도를 의심케 하는 면도 없지 않았었던 것 같다.
“저 사실 서울에 그다지 친한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해서…사실은 회사동료들과 많이 어울리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앞으로 언니한테 전화 종종 해서 이 얘기 저 얘기하고 싶은데…괜찮죠?”
뭐라 말할 것인가?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러라고 하고 싶지도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없이 시간이 허락할 때 서로 생각이 난다면 만나자고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가 지난 삼 년간 단 한 번도 내게 하지 않았던 자신의 일들을 이것 저것 얘기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그녀에 대한 거리를 좁힌 점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었지만, 그녀와 나의 런던에서의 우연한 조우 후에 뭔가를 감추기 위해 작위적으로 내게 다가서는 듯한 느낌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명품의 이미지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여름의 나른 하고 찌는 듯한 더위를 오히려 극기를 위한 좋은 방안으로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 해 여름의 더위는 참기 힘들었었다. 특히나, 여름 한 밤의 후덥지근한 열대야는 심신이 지친 상태였던 나를 더욱 힘들게 했었던 것 같다. 남편 역시 시험 후 얼마간 겪게 되는 긴장과 휴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때였던 것 같다.
“너무 덥다. 우리 밖에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할 까?”
워낙 외부 활동을 즐기지 않는 남편에게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물었었다. 13평 조그만 빌라에 둘이 앉아 선풍기를 돌려대며 TV만 시청하는 것도 업무나 공부에서 쌓이는 스트레스와 맞먹을 만한 위력을 갖는 스트레스 였을 까 의외로 남편은 내 말에 찬성했었다.
자정이 가까워 깊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한강 둔치에는 삼삼오오 더위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히려 주말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인 듯 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남편과 걷는 한강의 산책로가 잠깐 잠깐 참기 힘들 정도로 몰려오는 삶에 대한 무력감을 말소시켜 주는 것 같았다.
“오랜 만에 시원한 맥주나 마실래?”
“그럴까? 근데 운전은…”
“넌 맥주마셔…나는 뭐 음료수나 마시지 뭐…”
좀처럼 받기 힘들었던 제안에 선뜻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 후 남편과 둘이서 분위기 있는 카페나 칵테일 바에 가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이 남자의 제안이 몹시도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었었다.
한강 둔치 근처에 선상 바에 갈까 생각했었지만, 낯설은 곳보다는 아는 곳이 좋겠다 싶어, 팀원들과 종종 들렸었던 반포의 한 호텔 바에 가기로 했다. 지배인과는 친분이 있어서 회원은 아니었지만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언젠가 꼭 남편과 오고 싶던 장소이기도 했었다. 호텔에 익숙하지 않던 남편은 어쩐지 좀 어색해 했었지만 야외 테라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를 보며 서울의 야경까지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었다.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러 온 지배인에게 남편을 소개하고 시원한 맥주와 남편이 즐길 수 있는 칵테일을 물었다.
“피냐콜라다를 버진으로 드시면 좋겠는데요…”
칵테일에 대해 무지한 우리로서는 지배인의 어드바이스를 듣기로 하고 코로나 맥주와 피냐콜라다를 시켰다. 친절한 지배인은 서비스로 마른 안주 약간을 덤으로 주기까지 했으므로 그날은 횡재를 한 듯한 기분이었었다.
“오랜만에 건배나 해볼까?”
남편과 서투른 건배 후 러브 샷까지 하고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나중에도 이런 곳에서 이런 기분으로 이런 여유를 즐기며 살 수 있을 까? 하며 설레였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분수 잔치와 밤하늘, 새련된 모던 스타일의 바를 흠뻑 즐기고 다음 날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오면서 오늘 같은 날이 영원하길 하고 속으로 빌었었던 것 같다.
휴가를 떠났던 팀원들도 하나 둘씩 돌아오고 신입사원도 충원이 되고 해서 업무에 활력이 붙기 시작했던 즈음에 A에게서 놀라운 얘길 듣게 됐다.
“사장님 혼자 사신 지 오래 됐어요…부인이랑 애들이랑 다 미국에 있잖아요…”
K의 회사 ROYAL FAMILY에 대한 끊이지 않는 관심은 종종 A로 하여금 이와 같이 비서로서는 해서는 안되었을 만한 재미난 가쉽 거리를 폭로하게 하곤 했었다.
“뭐야…그럼 귀국한 후에 계속 혼자 지내신 거야?”
L의 탐정 기질 역시 한 번 A가 꺼낸 얘기에 대해서는 그 원류까지 찾아 올라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사장 일가에 대한 과거, 현재, 앞으로 펼쳐질 나름대로의 해석이 동반된 미래까지 우리 팀은 가히 정보부를 능가할 정도의 데이터를 갖게 되었었다.
“그냥 혼자 지내는 게 부인과 애들을 위해서도 나요…얼마나 성질이 변덕스럽고 자기 멋대로 인데요…밑에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하잖아요. 오죽하면 예전 비서실장님도 얼마 견디지 못하고 그만 두셨겠어요. 요즘은 그래도 맨 처음에 왔을 때 비하면 완전히 사람된 거지…”
A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L과 K가 동시 다발적으로 물었었다.
“사장 사모는 어떤 사람인데…”
“손 버릇도 안 좋다는데…”
L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잊은 채, 손버릇도 안 좋다는 K의 얘기에 대해 A가 놀랍다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한테 들었어?”
“B지 누구야?”
S와 L이 짓궂은 표정으로 K를 보며 말했다.
“음…그건 밖으로 얘기하면 안 되는 건데…”
갑자기 호기심이 동했다. 외부에 얘기해도 되는 얘기와 안 해야 하는 얘기의 기준을 알 수 없었던 나로서는 A가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선이 어디까지 인지가 몹시도 궁금했었다.
“무슨 얘기야? 갑자기 되게 궁금해 지네?”
여자들만 있는 곳의 특성이라고 할까…? 아니면, A의 오랜 직장 생활의 KNOW HOW라고 할 까? 잠깐 머뭇거리던 A도 우리 모두와 운명 공동체라도 된 듯한 표정으로 대외비를 약속 받은 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얘기를 해주었다.
"아니…사실 사장이 여자 관계가 좀 복잡하잖아요…"
"정말?"
"어쩐지...원래 다 인물값 하잖아..."
서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실망이라는 듯 한 마디씩 거들었다. 그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A는 계속 얘기했다.
"보통은 회사로 걸려오는 여자 전화는 많지는 않았는데...한 번은 어떤 이상한 여자가 계속 전화하고 안 계시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약속도 안 하고 와서 죽치고 기다리고 그런 적이 있었어요. 근데…언젠가 지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마침 사장이 외부에 나갔다 들어오는 데, 그 여자가 비서실에서 버티고 실갱이하고 있는 것을 본 거예요…그러니까 사장 얼굴이 돌변해서는 그 여자한테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래서…”
K, L, S 모두 그 뒤 얘기가 몹시나 궁금했는지 A를 재촉했었다.
“아니, 그래서 그 여자가 방으로 들어가고 한 동안 조용하더니 갑자기 큰 소리 나고 뭐 집어 던지는 소리 나고 하길래…혹시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우리가 비서실장한테 연락하고 비서실장이 경비실에 연락하고 해서 사람들이 올라 왔었는데…들어가기도 뭐하고 해서 웅성웅성하고 있는데…글쎄…막 사람 살리라는 여자 비명소리가 들리 잖아요…”
“뭐? 그럼 사장이 그 여자를 팼다는 말이야?”
“미쳤어, 미쳤어…그래서, 그래서?”
A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를 때렸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궁금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A를 다그쳤었다.
“아니 그래서 비서실장이 노크하고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들어 갔는데…그 여자는 맞았는지 어째는 지 소파에 앉아서 엉엉 울고 있고…사장은 자기 자리에 서서 씩씩 거리고 있고…방안은 난장판이고 뭐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그리고 바로 대외비가 된 거죠…참 그때 그 여자 들여보냈다고 우리가 얼마나 당했는지…그리고 건물 관리실하고 경비들도 있는 욕 없는 욕 다 들어 먹고…아무튼 제가 그런 되도 않는 일에 욕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니까요…”
A의 말이 사실 이라면…참…존경하지 못할 상사를 모시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냥 편해 보이기만 하던 비서실이 사실은 많은 고충을 감내해야 하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A 뿐만이 아니라 B까지도 그리고 비서실 모든 직원이 좀 안 됐다 싶었었다.
“그럼 사모하고도 문제가 많겠구나…”
L의 질문에 A는 시큰둥하게 말했었다.
“사모는 되게 고상해요…우리도 딱 한 번, 회장님 돌아 가섰을 때 봤는데…굉장히 미인이고 지적으로 생겼어요. 집안도 되게 좋고…미국에서 뭔 대학에서 강의한다고 하던데…아마, 마음 고생 꽤나 했을 거예요…근데…뭐가 좋다고 그런 남편 따라서 직장 다 버리고 한국에 오겠어요…그리고 사실상은 별거나 마찬가질 걸요…”
“그럼…J도 별거 중이고, 사장도 별거 중이야…완전히 콩가루…콩가루…”
A의 얘기를 듣던 L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그녀를 들먹이며 말했다. L의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K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저 J 언니 봤어요…”
“뭐…”
“미국 안 가고?”
갑자기 사장에서 화제가 그녀로 넘어갔다. 잊을 때도 되었다 하면서도 그녀의 영향력이랄까 뉴스로서의 흥미거리가 되서일 까? 우리 모두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는 듯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