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존재가 내 회사생활 뿐만 아니라 개인사까지도 억압하던 것 같은 감정은 그녀의 퇴사와 함께 사라졌다. 오히려, 회사 외에서의 사교는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물론 사회적 계층을 뛰어 넘어, 야릇한 호기심에 기인한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별로 내키지 않는 점심을 그것도 팀원들 모두 자리를 만들어 해야 한다는 것은 남의 이목을 끄는 모든 행동에 익숙하지 않던 나로서는 탐탁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예의 어영부영 오전 업무를 처리한 후에 K와 팀원들과 함께 점심시간 5분전에 예약이 된 식당을 향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른 팀원들도 역시 별로 내키지는 않았던지 그녀의 근황과 오늘 오전의 사장과 그녀와의 예정된 미팅 등에 대해 K의 발 빠른 정보에 귀를 기울이며 로비로 내려서는 순간 회전문에 끼어 있는 그녀와 사장의 등을 보고 말았다.
“저거 사장 아냐?”
K에게 물었다.
“어…J 언니네…”
우리는 서로 좀 황당한 듯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사장의 차가 현관 앞에서 그 둘을 태우고어디론가 출발하는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뭐야 사장도 그럼 우리랑 식사를 같이 하나?”
L의 비아냥 거리는 듯한 말같지도 않은 질문에 짜증이 났다.
“뭐야 지들끼리 식사하러 가는 거 아냐?”
다른 팀원들 역시 아마도 우리가 바람맞았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부드럽지 않은 톤의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뭐야?…K씨 전화 온 거 혹시 있어?”
“아뇨…”
“그래…어찌했거나 점심은 먹어야 하니까…가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신경이 남보다 약간은 예민한 탓인지 편히 식사할 수 있는 기분과 사람이 아니면, 먹는 족족 체하곤 했다. 특히,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노처녀 선임 팀장의 폭거에 시달리면서 신경성 위염을 앓은 경험이 있어, 식사만은 마음 편히, 좋은 사람들…과 하고 싶었다. 아마도, 흥미 있는 새로운 뉴스를 접하면서 식사를 하게 되지 않을 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했던 대로 약속 장소에는 사장은 커녕 그녀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국수전골을 주문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로 보그보글 끓는 전골을 보면서 방울방울 터질 듯이 끓고 있는 국물이 마치 그녀에 관한 하나하나의 궁금증인양 얘기 주머니가 터졌다.
“아무래도…사장 딸은 아닌 것 같지 않아요?”
회사생활 7년차에 접어든 L은 눈치를 단으로 메기라면 10단은 족히 넘을 사람이다. L이 그녀와 사장의 사이를 부녀간이 아니라고 추론하는 것은 납득이 갔다.
사장은 공식적인 정보에 의하면 현재 43살이다. 우리가 아는 그녀의 나이는 어림잡아 27살이다. 그녀와 사장이 부녀 사이려면 사장이 청소년기의 한 때의 실수로 그녀를 낳았어야 하는데, 변덕스럽고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사장이 청소년기에 애 아빠가 될 실수를 하고 뒤처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럴까요? 근데…총무부 김이사가 딸이라고 했다니까요?”
K가 말했다. 우리 팀의 정보원으로서 잘못된 정보를 흘린다는 것은 그녀의 명예에 먹칠을 할 수도 있는 일이므로 그녀로서는 L의 반론이 껄끄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데 팀장님은 사장 친구 딸로 알고 있다고 했잖아요…누가 그랬어요?”
S 역시 K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웠었던 것 같다.
“부장이…처음에 입사할 때 사장친구 딸이니까 잘 대해주라고 그러더라고…”
그녀로부터 사장과의 관계를 직접 들었었지만, 굳이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신상에 관해 누군가 나보다 더 알고 있다면, 그것을 통해 그녀에 대한 나의 유치한 호기심을 만족하고자 했었을 뿐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부녀 사이를 가장한 부적절한 관계 같아”
L이 뭔가 심상치 않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부적절한 관계요?”
K의 질문에 L과 S는 뭔가 심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 부적절한 관계?”
속으론 웃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짐짓 모른 채하고 심각하게 물었다.
“아니…나이를 봐요…J씨가 미국에서 들어와서 우리 회사에 입사한게 3년 전인가 대학졸업하고 바로 왔다고 했잖아요…근데 그때 사장이 미국지사장 그만 두고 왕회장님이 돌아가셔서 기획이사로 들어왔잖아요…”
L이 무슨 추리 소설이라도 쓰듯이 매우 진지하게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장이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만나서 한국에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오면서 회사에 입사 시키고…낙하산이니 뭐니 하면 시끄러우니까 자기 FAMILY 중 하나라고 해서 입을 막으려고 했을 수도 있지…”
S와 K는 L의 말에 몰입된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자기 정부를 회사에 입사시켜서 굳은 일 시키면서 소문이 두려워서 자기 FAMILY라고 거짓 정보까지 유출시킨다고…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신이 난 L을 거들 듯 그녀의 새로운 추리를 기대하듯 내가 물었다.
“아니 뭐…그럴 수도 있지 않냐는 거지요…”
“근데, J씨는 입사하고 얼마 안 돼서 남편하고 결혼했잖아…그 잘생긴 의사랑…”
그녀의 결혼식장에서 그녀의 남편을 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던 S는 L이 잊고 있던 그녀가 유부녀란 사실을 상기 시켜줬다.
“뭐야…그럼…남자관계가 복잡했나…”
굳이 그녀를 부정한 여자로 몰려고 하는 L을 보며 아마도 암암리에 그녀의 존재가 L에게도 역시 탐탁지 않았었나 보다 생각했다.
“근데…왜 그럼 김이사는 딸이라고 했을 까요?”
한 참을 고민에 빠져있던 K가 뭔가 석연치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K씨가 직접 김이사한테 딸이라고 들었어?”
S가 이상하단 듯이 물었다.
“아니요, B한테 들었는데요…”
K가 갑자기 멋 적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내밀었다.
“그럼 B씨가 뭔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
S가 확인하듯 K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마 K로서는 선배의 확인 사살에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수도 있겠네요…”
씩 웃으며 뻘쭘한 미소를 짓는 K를 보다 이제는 그만 얘기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한 마디 내 뱉었다.
“혹시, 배다른 동생 아닐까?...왜? 왕회장님이 원체 여자가 많았잖아…귀찮은 곁가지 중의 하나일 수도 있지…예전에도 작은 사장이 기획실에서 일하다 엄청 싸움하다 끝내 견디지 못하고 나갔잖아…”
L, S, K가 한 번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한번 선배는 영원한 선배라는 말을 각인시켜 주고 싶었던 차에 한방을 먹인 것 같아 은근히 통쾌함을 느꼈다.
“자 늦기 전에 식사하고 들어가자”
모처럼 만에 먹은 국수전골이 입에 착 달라붙었다. 국수전골은 맛이 깊은 것 보다는 끝 맛이 깔끔하고 시원한 것이 좋은데, 대체로 상쾌한 음식을 좋아하는 내 식성에 그 집 전골 맛은 입에 맞는 듯 했다.
한 번 전화를 해서 우리를 바람 맞힌 이유를 묻고 싶다는 K에게 그만 두라고 타이른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나른한 초여름 오후의 몰려오는 잠을 몰아내려고 커피를 마시려던 차에 부장으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금방 낮잠에서 깬 듯한 부시시한 모습의 부장은 형식적인 내 목례를 보는 듯 마는 듯하더니 다짜고짜 우리 팀의 인력 보충에 관해 물었다.
“이제 아르바이트 그만 둘 때가 됐나?”
“예…그리고, 임시직 직원도 2개월 밖에 계약기간이 남지 않아서 지난 번 보고 드린 데로 2명 정도 인원이 보충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대뜸,
“1명은 신입사원이 배정될 거고, 1명은 다른 부서에서 차출하려고 하는데 어때?”
부장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역겨웠다. 능력도 없고 소신도 없는 전형적인 YES MAN.
“예…뭐 다 좋습니다.”
“그래…내가 다 당신 생각해서 상부에 미리 보고해서 우리 부서 T.O.를 먼저 확보 해놨잖아? 어때…고맙지…”
기가 막혔다. 우리 팀의 인원부족은 이미 인사부서에 보고된 사항이었고, 그녀의 갑작스런 사직 후에 보고서를 올린 것이 바로 나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그것마저 자신의 공으로 돌리려는 모습이 한심했다.
“근데…비서실 A 어떻게 생각해?”
“예?”
느닷없는 질문에 황당했다. 부장의 말에 의하면, A가 부서이동을 인사부에 요청했고, 전공도 영문과니까 어학실력도 상당하고 해서 별 무리가 없으면 우리 팀에 넣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물론 A가 먼저 우리 팀에 가고 싶다고 지원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관례상 명백했다. 문제는 A는 대리급의 직원이었는데, 우리 팀에서 필요한 인력은 신입직원과 대리발령 전의 주임급 직원이었기 때문에, A의 교육 등 다른 팀원과의 위계문제가 걱정스러웠었다.
굳이 가타부타 팀장으로서의 의견을 얘기할 필요도 없이 이미 결정이 났을 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부서이동을 지원한 다른 직원 중에 우리 팀을 지원한 다른 지원자에 대한 정보 없이 부장이 한 명을 지목해서 얘기하는 것은 이미 결정됐다는 간접적인 통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