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근이나 조퇴를 한 다음 날은 언제나 출근할 때 가슴이 두근거렸다. 회사에 일하러 가는 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없을 때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다. 내 부서와 팀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가 알고 있어야 하고 내 부재 중에 누군가 내 일을 대신해서 나의 필요가치가 절하되는 것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을 거다. 나의 이런 증세는 거의 강박증에 가까워 여간 하지 않으면 결코 결근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었다.
“별일 없었어?”
출근하자 마자 K에게 물었다.
“아니요, 별일 없었는데요”
K와 나머지 팀원의 눈치를 하나 둘 살핀 후 e-mail을 체크하고는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별일이 없었구나…
한 동안 업무에 몰두하다 커피 break를 갖기 위해 휴게실로 갔다. 비서실의 A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A는 비서실의 여직원 중에 제일 고참이다. 까다롭고 변덕스런 사장의 성격에 여자직원이 1년을 못 버티기로 유명한 비서실에서 5년을 넘게 견딘 전설적인 인물이다. 다른 직원들에 의하면 A는 병적으로 세상에 관심이 없다. 건망증도 심하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상당히 무관심한 편이라고 한다. 모두들 그런 A의 성격이 그녀를 여지껏 버티게 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곤 했다.
“요즘에 일 많으시죠?”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예상치 않던 친근한 태도나 질문은 당황스런 것이었다.
“예? 뭐 그렇죠”
무의미하게 슬쩍 대답하고는 A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커피 자동판매기 앞에 섰다. A는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하다 입을 다물고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사라졌다.
10년이 넘는 회사생활에서 나에게 철칙이 있다면, 직원들과 필요 이상의 수다를 떨지 않는 것이다. 이것저것 온갖 소문들을 듣고 수다를 떨다 보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걱정하게 되고 편견에 쌓인 잘못된 정보로 사람을 예단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회사가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나보다 신입인 K나 고졸 여직원들이 더 많은 것을 아는 듯 했다.
휴게실 의자에서 창 밖으로 내다보는 강남의 거리는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회색 빛 도시라는 말이 이보다 더 적절하게 맞는 거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마 끝에 잔뜩 흐린 날 덕에 그렇지 않아도 희뿌옇던 바깥 풍경이 거무스름하게 보였다. 300원짜리 자동판매기용 블랙커피는 너무 쓰기 때문에 반을 버리고 반 이상을 맹물로 채워 마시곤 했는데 보리차 색 비슷한 그 커피의 맛이 마치 이 도시의 맛처럼 느껴졌다.
“팀장님 커피드세요?”
K였다. 좀 덜렁거리지만 명랑하고 사교적인 K는 우리 팀의 소식통이었다. 속칭 다방커피를 뽑아 자리에 앉으면서 K가 중얼거렸다.
“날씨 한 번 죽이네…이젠 그만 해가 나올 때가 됐는데…”
“흐린 날 싫어?”
“네…재미없잖아요. 우산 들고 다니는 것도 귀찮고…그리고 뭣보다도 습기 때문에 싫어요…”
비오는 날의 가라앉은 공기를 나름대로 즐기는 나는 K의 성격과 흐린 날은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었다.
“어제 우연히 J씨 만났다.”
딱히 말할 꺼리도 없고 우리 팀의 정보통인 K에게는 이 정도의 소식 정도는 알려 줘야 앞으로 내가 필요한 정보도 얻지 않을 까 하는 기분으로 J와의 예상치 못했던 조우를 알려줬다.
“네? 진짜요? 뭐 한데요? 왜 그만 뒀데요?”
쳐진 눈을 위로 치켜 올리려고 노력하며 놀란 듯 궁금한 듯 한번에 모든 걸 캐물으려고 하는 K가 귀여워 보였다.
“그냥 집에서 잘 지내나 봐… 뭐 운동하고 쇼핑하고… 완전히 팔자 좋은 유한마담이더만…”
“하기사 뭐가 아쉬워서 눈치 보며 회사 다니겠어요…증말 부럽다…내 꿈도 아침에 헬쓰 가서 운동하고 점심에 쇼핑하고 그렇게 이것저것 배우며 사는 건데…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게 되려나?”
아직 한참이나 어린 K에게서 나오는 얘기는 마치 결혼한 지 오륙년이 다된 주부와 같았다.
“근데 왜 그만 뒀는지 물어보셨어요?”
왠지 대답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쨋거나 J의 사생활과 관련된 얘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몰라…뭐 그런 말할 시간까지는 없었고…나중에 한 번 놀러 오라고 했어…우리 그전에 사둔 그 선물도 줄 겸…”
“그래요…궁금한데…”
고개를 한 번 갸우뚱 하더니 K가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듯 의자를 앞으로 끌어 당기더니 소리를 죽여 나직이 말했다.
“B가 그러는데…얼마 전에 사장한테 전화가 왔었는데…전화통 붙잡고 엄청 큰소리로 싸웠데요…내용은 잘 못 들었느데 뭘 주느니 마느니 죽자느니 해 줄만큼 했다느니 하면서 사장이 길길이 악을 쓰더래요…”
“뭐?”
“아무리 사장이래도 자기 집안 문젠가 본데…조용히 통화할 일이지 말예요… 어쨋거나 부끄러운 것을 모른다니까…. 돈 만 있으면 뭘해 완전히 콩가루 집안인데…”
황당했다. J와 그 오빠인지 아버진지 하는 사장과의 전화싸움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나의 맞장구를 기대했었던지 K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아무 말 없는 나를 참지 못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날 사장이 열 받아서 괜히 A언니하고 비서실 사람들 한테 왕짜증 부리고 A언니는 뒤에서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나 보드라구요…요즘 비서실은 완전히 초긴장이래요”
“그래”
별 관심없는 듯 대답을 하고는 너무 오랜 시간 쉰 듯 해서 K를 뒤로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관심 없던 그녀의 개인사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업무의 특성 상 우리 팀은 휴가를 한 번에 몰아 쓸 수 없었다. 통상 7월 첫째 주에 내가 휴가를 다녀오는 것을 필두로 해서 겹치지 않게 팀원이 한 명씩 돌아서 휴가를 다녀오곤 했었다. 여름 휴가를 조정하기 위해 아침부터 자리에 자리를 건너 서로 좋은 일정을 불러주고 계획을 세우면서 시끌시끌하던 차에 걸려온 그녀의 전화는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여보세요?”
갑자기 울리는 인터폰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었었다.
인터폰 너머 J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꽤 명랑한 목소리였다.
“어…안녕…잘 지내?…”
당황스럼을 속일 수 없는 어색한 내 목소리가 실례가 됐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일이나 모레 시간이 괜찮은데…놀러갈려구요…팀원들하고 점심식사나 하시죠?”
“응…그래…나는 내일 시간 좋으니까,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고 장소 정해서 알려줄까?”
“예…근데…제가 모르는 사람은 약간 거북하니까…아는 분만 나오면 안돼요?...연락처는 예전에 쓰던 번호로 하시면 되고요…”
“응. 그래…그럼 다른 애들이랑 얘기하고 장소 알려 줄께…그래. 안녕”
전화를 끊고 잠깐 멍하게 앉아있었다.
“누구예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 지 만사에 관심이 많은 K가 갑자기 궁금한 듯 물었다.
“J씬데… 왠일이야? 진짜 전화했네?”
K와 다른 팀원들을 쳐다 보며 내가 말했었다.
“미국간데요…뜨기 전에 한 번 식사나 하자고 전화했나보네”
K가 말했다. 아마도 K는 그녀의 근황에 대해 비서실을 통해 알고 있는 듯 했다.
“미국? 그래…?”
언뜻 백화점에서 만났을 때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했었다.
K가 아르바이트와 임시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에게 시간과 장소에 대해 여론을 수렴 후에 J에게 연락을 하기로 했다. 어쩐 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먼저 꺼낸 말이라 약속을 지킨다는 의미로 만나기로 했다.
초여름의 더운 공기는 실내의 공기와 섞여서 그렇지 않아도 탁하고 건조한 실내공기를 더 숨막히게 한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켜고 모니터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나로서는 숨막히는 실내 공기에 더해 컴퓨터 모니터의 열기 조차 힘겨울 때가 있다.
“팀장님…”
때 마침 K가 찬 콜라를 뽑아서 내 책상 위에 놓았다.
“고마워…그렇지 않아도 공기가 탁해서 숨막혔었는데…”
“내일 J 언니랑 식사하는 거 좀 내키지 않아요…”
내 옆의 보조의자에 앉더니 K가 나직이 얘기했다.
“왜?...”
“아니, 지금 B랑 얘기하고 왔는데…J 언니가 내일 오전에 회사에 온다고 메모해 달라고 했나봐요…사장한테 꼭 전달하라고…아무래도 한바탕 할 태세인 것 같다고 하던걸요…괜히 우리 찍히면 어떻게 해요.”
“뭐?...”
할말을 잃었다. 연봉제로 바뀐 후로는 모든 것이 타이트하다. 사실 오히려 상사나 회사의 입장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일거수 일투족에 고용인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이게 된다. 연봉제라는 것은 회사의 마음에 맞는 사원을 쓰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인사고과나 근무평가나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인간중심의 경영학, 심리학의 뒷받침을 받아 이뤄지고 있다고 선전한다고 해도 실상은 평가를 받는 직원의 입장보다는 회사의 입장에서 하는 평가이다 보니 괜히 회사와 불편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나 자신이 언제 버려질 지 모르는 부품이라는 것을 더 절감하게 하는 것이 연봉제다. 열심히 했어도 실적이 좋지 않거나 어떤 평가에서 전년보다 못한 점수를 받게 되면 임금인상에 적신호다. 임금이 인상되지 않는다는 것은 회사를 떠나달라는 의사표시다. 특히, 요즘처럼 미국식 인사시스템이 만연하고 있고, 노동의 유연성에 회사의 사활을 거는 회사가 많을수록, 연봉제의 굴레는 보다 기계에 가까운 workholic으로 조직에 순종하는 노예로 모두를 몰아가는 것 같다. K같이 활달한 직원도 벌써 회사의 눈치를 본다는 것이 씁쓸했었다.
“뭔 상관이야…? 뭐 우리가 못 만날 사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어쨌거나 먼저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는데…옛 정을 생각해서라도…어떻게…만나야지…이제 와서 못 만난다고 하는 게 더 우습지 않겠어?”
누군가를 만나서 식사를 하는 것이 갑자기 이렇게 꺼려졌던 경험은 없었던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