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이라고 자랑을 하는 건지 뭔지…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하니까 꽃다발 부서이름으로 해서 하나 보내고…”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낙하산?, 병원?, 입원?, 꽃다발?...
그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히 두발로 오후 6:00시에 누구보다 먼저 회사를 걸어나갔다. 아르바이트를 충원할 정도면 꽤 오래 입원을 해야 하는 건가? 그녀에 대한 걱정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부장의 얘기들이 궁금해서 견딜 수 가 없었던 것 같다.
그녀의 업무를 대신하면서 알 수 없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름 모를 흥분과 들뜸에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를 몰랐다. 퇴근시간에 맞춰 팀원 두서넛과 그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향해 잰 걸음을 쳤다.
그녀의 집 근처에 위치한 종합 병원 특실에 그녀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누워있었다.
“어디가 많이 안 좋아?”
궁금함을 견딜 수 없었지만 짐짓 메마르게 물었다.
"안 좋기는…뭐…그냥…요사이 너무 무리했나봐요…”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무리라니? 그녀는 그 흔한 야근 한 번 한 적이 없다. 집안 살림은 일하는 사람을 따로 두고 있다고 했다.
"그래 좀 쉬기는 했어?”
"네…”
황당한 나를 쳐다보다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입인 K가 물었다.
“언니, 근데 오래 입원 해야 해요? 팀장님이 그러는데 아르바이트 충원한다고 하던데…”
K를 보며 ‘아차…’했다. 마치 그녀의 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는 듯이 들렸을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 같다. 그걸 왜 물어보지? 하는 눈으로 K를 보았다.
그녀는 아무런 관심없다는 듯 무심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듯 했다. 간병인인듯한 여자가 들어왔다.
“손님들 음료수 좀 드리세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유치한 호기심을 충족하려던 나의, 아니 우리의 궁금증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에서 우리가 반갑지 않았음을 느껴서일까? 누구랄 것도 없이 허겁지겁 음료수를 마신 후 잘 쉬란 말과 함께 총총히 병실을 나섰다.
“ROYAL FAMILY라고 하더니 그말이 맞나보내…”
K가 말했다.
“ROYAL FAMILY?”
내가 되물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나와 3년째 일하고 있다. 나의 ASSISTANT로서…우리 팀에 배정될 때, 그녀의 FAMILY에 대해 얘기들은 적이 있다. 사장 친구의 딸이라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직원들에게 얘기했다…그러자 K가 말했다.
“사장의 SECOND 딸이라고 하던데요…”
총무부서의 김이사로부터 흘러나온 말이라고 했다. 틀릴 수가 없다고…
‘첩의 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승리감이 점점 치고 올라 오는 듯이 느껴졌다. ‘첩의 딸’…
회사라는 곳은 이상한 조직이다. 비밀이 아닌 것이 없고 비밀인 것도 없다. 조금만 노력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조금만 무신경하면 소외된다.
그녀는 우리 팀의 화두다. K는 동기인 비서실의 B를 통해 우리가 쉽사리 접할 수 없었던 소식을 물어다 주곤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살을 했다는 것, 그녀의 남편과 그녀는 서로 별거 중이라는 것, 그녀의 입원은 자살 기도의 실패에 의한 것이라는 것 등 등…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이야기를 그녀의 이야기로 만들어 내어 소문을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아해했다. 그녀의 남편과 별거 중이라니? 믿을 수 없는 얘기다. 하지만, 그 소식이 나를 자극했었다. 어느 정도… 그런 완벽한 여자도 별거를 한다? 왠지 모를 승리감 같은 것이 나를 휘감았었던 것 같다.
그녀의 입원과 아르바이트 충원,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들의 틈바구니에서 오랜만에 편안함을 느끼며 일에 몰두 할 수 있었다. 나와는 친하지 않았던 부장이 자주 우리 팀에 와서 농담을 하다 가곤했다. 그녀의 존재가 부장에게도 편치는 않았을 까?
임금협상과 부서이동 등으로 술렁이던 즈음에 돌연 그녀의 사직서를 e-mail로 받았다. ‘이상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녀와 관련된 일이 나에게 보고되어 윗선에 알려진 적은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에게서 부장으로, 부장에게서 나에게 알려지던 그녀의 처우가 나에게 먼저 보고되다니…
부장에게 그녀가 일신상의 이유로 즉시 사직을 희망한다는 것을 알리고 총무부로 사직서를보냈다. 통상, 직원이 사직을 하려고 하면 우선 사직의 이유를 가지고 1차, 2차, 3차 상담을 한 후 한 동안의 유예기간을 두었던 것에 비하면, 보고가 되자 마자 사직서가 수리되는 것이 의아하다 못해 황당했다.
그녀의 업무를 인수 인계할 사람을 구할 때까지 임시직 직원을 한 명 더 고용하기로 하고 우리 팀의 인력보강과 재정비에 필요한 구상을 보고하라는 엉뚱한 지시를 받고 멍해 있던 나는 갑자기 그녀가 궁금해졌었다. 왜?...
K와 다른 팀원들과 약간의 비용을 갹출하여 그녀의 퇴사 선물을 마련해서는, 그것을 핑계로 우리의 궁금함을 풀기 위해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녀가 입원하고 있던 병원에서는 그녀는 퇴원을 한지 한참이나 지났다고 했다. 집으로 전화를 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하고 그녀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했었다.
“여전히 안 받는데요…”
K가 의아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열등한 시기와 질투와는 관계없이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정이 든 걸까?...
마음의 한 구석에서 죄책감 같은 것이 밀려왔다. 처음부터 너무 차갑게 대한 게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이 괜히 그녀를 소원하게 하고 관계의 벽만 쌓았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이제는 다시 만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여러 생각을 한번에 들게 한 것 같았다.
여느 해보다 이른 장마에 몸도 마음도 꾸물꾸물해 지던 오후에 견딜 수 없이 치미는 답답함이 조퇴를 하고 회사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냥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 회사 앞의 백화점으로 무심히 발을 돌렸다.
백화점 1층에 자리한 명품숍을 눈으로 살피며 돌고 있었다. 하나같이 블랙 엔 실버로 인테리어를 하여 깔끔하고 정결한 젠스타일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은은히 비추는 할로겐 램프의 약간은 노란듯한 불빛이 격을 올려주는 배려를 하고 있는 듯 했다. 내가 들어서서는 안될 것 같은 알 수 없는 바리케이트가 쳐진 듯 느껴졌다. 점원과 눈이 마주치면 흠칫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훔지고 싶어하는 아이를 발견한 듯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 듯 느꼈다.
기분전환 겸 오랜만의 집안 인테리어를 바꿀 겸 스스로를 위로하며 5층의 가정용품 매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오르면서 내다보는 1층 매장들은 다 내 발 아래 있었다. 약간의 우월감을 느껴도 되겠지…하면서 다시 한번 눈 밑의 명품 숍을 쳐다보고는 위를 봤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시장 볼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몹시 한적한 매장을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이 아무 생각 없이 돌고 있었다.
“오랜만이예요?”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다 헉하고 소리를 칠 뻔 했다. 그녀다. 몹시 말랐다. 2-3개월 만에 이렇게 마를 수 있나? 여전히 도도하고 한 눈에도 있어보이는 그녀는 하지만 무척 마르고 얼굴에 빛을 잃고 있었다. 예전에 비하면…
“오랜만이네…”
“오늘 휴무에요?”
“아니…몸이, 아니 기분이 좀 그래서 조퇴했어”
“조퇴를 해요? 언니가? 오…”
놀리는 듯 나를 보고 그녀가 씩 웃었다. 나도 웃으며 “응”하고 대답했다.
“쇼핑 중이야?”
“아뇨…그냥 심심해서 나왔는데, 마땅히 갈데가 없어서 와 봤어요…”
“뭐 살거 있어요?”
“아니…뭐…그냥 둘러보고 있지”
“차나 한잔 하실래요?”
그녀가 내게 차를 마시자고 먼저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친한 사이도 서먹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회사 외의 장소에서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녀는 공식적인 회사의 행사 외에는 같은 부서나 팀의 직원과 어울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럴까?”
우리는 총총히 8층에 위치한 커피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괜히 좋다고 했나?’하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실상은 그녀와 딱히 할 얘기도 없을 것 같았었다. 서로가 개인적인 친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매장과는 대조적으로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아줌마들의 경쾌한 수다소리가 커피숍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아줌마들은 팔자 좋네…”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는 건조하게 나를 한 번 응시하고는 그대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 자리로 가서 앉으면서 생각했다. ‘괜히 왔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를 시킨 후 딱히 말할 소재도 없고 해서 날씨에 대해 얘기했다.
“비오는 날은 집에 있어야해…밖에 나오면 번잡스럽고…따끈한 방바닥에 배 깔고 누워서 라디오 키고 음악들으면서 만화책 보는 게 딱인데….”
그녀가 물끄러미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만화요?....언니 만화책 같은 것도 봐요?”
그녀가 황당하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응…내 어릴적 꿈이 만화가게 주인이었어.”
사실 그랬다. 내가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도록 만화에 나오는 순정만화의 주인공이 바로 나라고 스스로를 세뇌 시키던 기억이 있다.
“저는 만화 같은 것은 안 봐요…전혀 현실감이 없잖아요...”
고소한 커피의 향이 번졌다. 이제 갓 스무살이나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커피를 내 앞에 그리고 그녀 앞에 얌전히 내려 놓았다.
“커피 향이 좋다. 비오는 날에는 커피향이 더 그윽하게 풍기는 것 같지 않아?”
“네”
몹시도 짧게 그리고 건조하게 그녀가 말했다. ‘괜히 왔다. 할 말도 없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와 모처럼만의 나의 자유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싫었다. 그녀에 대해 궁금했던 부분은 물어볼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으므로 그녀와 내가 자리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조화롭지 못한 것이었다.
“참, 회사는 왜 갑자기 그만 뒀어?”
그녀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더니 귀찮다는 표정으로 빨리 한 마디 내 뱉었다.
“그만두라고 해서요…”
‘그만두라니 누가?’라고 묻고 싶었는데 선뜻 누구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는 내가 물어주기를 바랬는지,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스스로 입을 열었다.
“대부분 알던데…혹시 모르셨어요? 사장이 제 이복오빠예요”
K는 사장이 그녀의 아버지라고 했었다.
“사장이 그만 두라고 해서 그냥 그만 뒀어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까? 애써 놀라지 않은 듯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요즘은 뭐해? 일을 다시 할 생각은 없어?”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마치 일에 관한 나의 질문이 자신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질문이라는 듯이…
“그냥 집에 있어요. 운동하고, 쇼핑하고, 그리고…음…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까 생각하고 있어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봤다. 미국이란 곳이 그녀에게는 가고 싶으면 언제나 갈 수 있는 그런 나라인가?
“그래"
짧게 대답했다.
“오빠는 요즘 어때요? 시험은 봤어요? 결과는 요?”
마치 복수라도 하듯 그녀는 내 아킬레스 건을 건드렸다.
“어, 지금 2차 시험 보는 중이야”
남편과 관련된 어떤 질문도 나에게는 거북스럽다. 내가 회사에서 승진할수록 능력을 인정받을수록 남편의 상태는 내게는 버거운 짐이었다. 여자의 팔자는 뒤웅박팔자라고 했던가?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자와 남자는 나의 이력서와 명함보다는 내 남편이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 가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자신의 사회적 성취와 관계없이 남편의 사회적 지위가 그녀들의 지위라는 것을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남편의 직업이나 상태를 얘기할 때 항상 주눅이 드는 듯한 느낌, 그리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는 나를 장한 여자 혹은 힘들게 살고 있는 여자로 보는 듯한 시선이 나를 너무 피곤하게 했었다. 그녀는 그것을 아는 듯 했다.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은 잘 지내?”라고 내가 물었다.
“네.”
짧게 그녀가 대답했다.
“의사들은 의외로 시간이 없다고 하데…나는 병원이 보통 6시면 문을 닫으니까 의사들이 대부분 가정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나를 물끄러미 봤다. 아마도 그녀 역시 내가 느꼈던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바쁘긴요…다 핑계죠.”
K는 그녀가 남편과 별거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표정 변화도 없이 메마르게 대답했다.
“아참, 전화했었는데, 집에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 핸드폰도 안되고, 우리 팀에서 선물 준비한 것 있는데…”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살짝 밝아졌다.
“아 그래요? 뭐요?”
이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응. 뭐 별거 아닌데…갑자기 그만둬서 우리가 뭐 필요한 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해서…”
“뭔데요?”
“궁금해?”
“네”
“그럼 언제 한 번 회사 근처로 놀러와…아니면 밖에서 우리 팀끼리 한 번 뭉치자…지금 내가 뭔지 얘기해 주면 재미없잖아.”
눈을 반짝이며 그녀가 말했다.
“그럴까요 그럼?”
그렇게 재미없는 대화를 30여분 하다가 그녀가 운동을 하러 가야겠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홀쭉해진 모습이 그녀의 당당하던 모습을 지치고 힘들어 보이게 했지만 그때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