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규의 집엔 전화가 없다. 시골에 사는 빈농의 아들 것도 삼대독자.. 사실 지영은 이런 동규의 어려운 가정환경들이 싫었다. 아마 어쩌면 그런 조건들이 지영은 동규를 친구 이상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려는 생각을 스스로 하곤 하였다. 지영은 동규에게 전화가 걸려 와야만 만날 수 있는 그런 현실이었기에 동규의 책을 건네 받았어도 고마움의 뜻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동규의 전화를 받고 지영은 약속장소로 향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등지고 다방문을 힘껏 밀고 들어선 지영은 코끝에 진한 커피향과 감미로운 음악들이 얼었던 몸을 금새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야!! 동규야~ " "지영아~ 반갑다..이게 얼마만이냐?" "그러게..정말 오래간만이지?" "ㅎㅎ 졸업.. 축하한다.." "웅.. 너도..참!! 책..고마워~" "얌마~ 나 그날 너희집 앞에서 얼마나 기다린줄 아냠마?" "구랬어? 몰랐지~" "너...더 이뻐졌다~" "핏~ 야 나 원래 이쁜거 ..몰랐어?" "으이그..여전하구나..하하하" 지영이와 동규는 드디어 새내기 대학생이 되어 그렇게 모처럼만에 만남을 즐기며 찻집에 앉아 있었다. 가끔 동규는 지영이가 왠지 원망스럽다. 지영에게 이성인 감정으로 다가가고 싶지만.. 언제나 지영은 그런 동규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느낌을 받곤 하였다. 동규는 지영을 만나면 괜히 호탕한척.. 잘난척..호기도 부려보지만.. 지영이와 헤어지고 혼자 집으로 돌아 오는길은 왠지 늘 허전하다. '이게 아닌데...' 동규는 자기 자신조차도 헷갈리는 지영이와의 우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나이가 어리다는걸 안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대학생활에 익숙해져 지내던 봄.. 연인인듯 친구인듯 동규와 지영은 그렇게 가끔 일방적인 동규의 전화로 둘은.. 마치 고향친구를 만나듯 서로 반갑게 만나 차도 마시고, 주막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렇게 둘은 한달만에도 만나고.. 때로는 몇달만에도 만나기도 하였다.. 그러다 문득 동규는 지영이가 보고 싶으면 지영의 집앞에서 서성거리기도 하였지만 지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규는 지영의 집앞에서 뜻밖의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지영이가 다른 남학생과 함께 집 앞에서 헤어지는 모습을 우연히 골목길에서 본 동규는 지영에게서 참을수 없는 배신감으로, 말없이 몰래 바라보곤 혼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괜한 질투심으로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말을 해야지..' 동규는 이제.. 지영에게.. 무슨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