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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BY 액슬로즈 2003-04-10


[우리 사이에 할 얘기란 게 있기는 하니? 더군다나 경인이 니가 나에게?]

가시돋힌 말이었으나 진희의 말속에는 떨림과 희망같은 게 있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맥주잔을 드는 경인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인은 진희가 오랜 세월 얼마나 마음을 다치고 고통스러워 했을지 짐작하고 남았다. 왜 모르겠는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하고 선뜻 입을 떼기가 두렵기도 했다. 너무 오랫동안 쌓아 놓은 벽이라 허물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또! 비꼬고 있다]

선애가 얼른 중재를 나섰다.

[오늘은 허심탄회하게 솔직히들 얘기해라. 글치 않으면 나 다시는 니들 안 볼테니깐! 빈 말 아니니까 알아서들 해!]

엄포를 단단히 놓으면서도 선애는 내심 초조하고 불안했다. 마치 강가에 아기를 내려 놓은 것 처럼...
주위가 시끌벅쩍한데도 조용한 절간에서 불경 외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 탓이리라..

[그래...있어]

어렵게 경인이 입을 뗐다.

[있어...오랫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야기...]

경인은 똑바로 진희를 보며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듣고 싶어 하는 얘기도 해 줄거야?]

순한 양같은 진희의 말에 경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다 이상하게 목이 메어 왔다.

[그래...하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교생 선생님...부터?]

진희가 자연스레 태준 얘기를 꺼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면 경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만 물을께...그 선생님 정말 사랑했니? 아직도 사랑의 감정이 남았어? 애틋한?]

[......!]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경인은 다시 맥주로 목을 축였다.

[그렇다고...얘기해야 겠지만...그렇지가 못해. 선생님을 특별하게 생각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진짜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누구나 한번쯤 겪는 사랑의 열병인지...그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었어. 문제는 선생님이 나 대신...돌아 가셨다는 거야. 선생님은 나를 진짜...사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거...나를 꼼짝 못하게 하는게 바로 그거야. 그래서 선생님을 잊을수가 없어. 아니, 잊으면 안될것 같은...사랑은 그 다음 문제지...죄책감. 그것만큼 무서운 건 없더라. 선생님의 얼굴도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아. 다만 나로 인해 그렇게 되셨다는 게... ]

[왜 니탓이니? 다 운명이지]

선애가 거들었다. 경인은 고개를 저었다.

[진희 니가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너를 위로하지 못했어. 처음엔...너를 원망도 했지만 그건 잠시였어. 모든 건 내 잘못이었어. 그래서 더더욱 너한테 얘기하는 게 힘들더라. 기회를 놓치니깐 점점 더 벽이 쌓이고...]

[죄책감? 글쎄...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도 그런 기분이 들까? 선생님한테는 죄송한 얘기지만...]

진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난 선생님한테 마음이 없었어. 알지? 하지만 선생님을 찾아가서 너와 헤어지라고 했어. 니가 정말 선생님을 사랑하는 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될것이고 그 때가 되면 서로 상처 받을 것이다...그랬더니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내가 아니라 경인이 널 택해서 질투하냐고...
그리고 미래의 일은 미리부터 걱정하지 않는다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고 그러더라.
순진한 분은 아니었어.
예전의 여자 친구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들었니?]

[어떻게 헤어졌는데?]

[그 여자 친구의 집이 부도로 알거지가 되었다는 걸 알고 나서야]

[세상에! 그렇게 안 봤는데...]

[난 선생님이 경인이 널 좋아하는 건 알았어. 하지만 과연 그 자체로 좋아하는지는 의심스러웠어. 그래서 시험해 보기로 한 거야. 선생님이 정말 널 좋아하고 아낀다면...난 깨끗이 포기할 생각이었어. 진심이야. 널...진짜 사랑했으니까]

경인은 진희의 당돌한 말에 이제는 놀라지 않았다. 자연스레,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지금의 진희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인가?

[얼마를 주면 널 포기하겠냐고 물었어. 비웃으시데? 그리곤 원하는만큼 줄 정도로 돈이 많냐고...또 비웃으시겠지? 헤어지기만 한다면 뭐든 주겠다고...선생님은 나를 원한다고 하셨어]

말을 하고선 진희는 경인을 살폈다. 그러나 경인의 표정에 충격같은 건 없었다. 다만 쓸쓸한 기운만 있을 뿐...그래서 진희는 안심했다.

[경인이 너 모르지? 선생님은 이미 나의 배경에 대해 알고 계셨어. 경인이 너의 집안이 군인 집안인 것을 사전에 알고 게셨던 것처럼 말이야. 선생님은 여자들의 집안을 우선으로 봤어. 그래서 너의 접근을 받아준거고...하지만 너와 사귀면서 내가 경인이 너 주변에 얼쩡거리자 나에 대해서도 조사한거지. 내 배경이야 그럴싸하잖아?]

진희는 피식 웃었다.

[종합 병원 원장의 하나뿐인 외동딸...선생님은 내가 먼저 접근해오길 기다리고 계셨어. 왠 떡인가 하셨겠지...그리고...너와 헤어져 주는 조건으로 나를 원하신거야. 난 기꺼이 나를 주었어]

[넌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생각없는 행동인지 알기나 했어?]

경인은 진희를 나무랬다. 마음이 쓰라렸다.

[니가 그런 사람과 얽히는 것 보단 나아...게다가 그 당시 남자는 나에게 있어 그냥 나무토막이나 같은 존재였어. 난 선생님과 너가 그냥 헤어지기만을 바랐지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되실 줄은...]

한 순간 세 사람은 말을 끊었다.



[나도 편하지 않았어. 몇년동안 악몽에 시달릴 정도로...그 죄를 내가 다 안고 싶었어. 그리고 죽어 저승에 간다면 선생님을 만나 용서를 빌 생각이었어. 경인이 너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깐...]

[아니야. 원인은 나에게 있었어. 그래...난 선생님이 그런 분이시란 건 몰랐어. 알았다해도 어쩌면 난...믿지 않았을지도...]

경인은 다시 맥주잔을 들었다. 선애와 진희도 잔을 들어 세 사람은 모처럼 건배를 했다. 그들은 그대로 잔을 비웠고 선애가 다시 주문을 했다.

[난 선생님을 원망할 생각은 없어. 가여운 분이시란 생각이 드네...]

[그래. 따지고보면 그래. 선생님은 사랑이 조건으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고 계셨던 것 같아...다 부질없는 것인데...그러니깐 경인이 너 이제 죄책감 같은 거 갖지마]

[그러나 나 대신 그렇게 되신 분인데...편하지는 않지]

[나도 그래. 하지만 그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삶의 몫이지 죄책감은 아니야]

세 사람은 다시 말을 중단한 채 술을 마셨다. 태준에 대한 추억을 나름대로 떠올리며 애도하는 것이다. 경인은 마지막으로 태준에게 마음속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고마움도...진심으로.
그것은 진희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따지자면 진희가 더할지도...
태준이 경인에게는 첫사랑이라면 진희에겐 첫남자가 아니었던가!

여자는 첫사랑보다 첫남자를 더 못 잊는 법이라고 했던가!



[진희야]

경인이 불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 보는 이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진희의 눈이 조금은 젖어 보였다. 여고시절을 떠오른 것이다.

진희야.. 진희야.. 선애야..
하면서 어깨 동무를 하고 손을 맞잡고...

[진희야. 나...너에게 용서를 구할 일이 있어]

[내게...용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