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고요함을 깨고 깨진 듯 들려 왔다.
경인은 구름 위를 거닐다 갑자기 뚝. 떨어지는 기분에 화들짝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재민을 힘있게 밀쳐 냈다.
숨이 가빴다. 두 사람 모두...
곧바로 경인은 자신의 행동에 회의를 느끼며 거친 손길로 머리를 매만졌다.
...철부지 소녀도 아니고, 무슨 섹스에 환장한 여자도 아닌데...대체 이게 무슨...!
재민의 키스에 정신없이 뺘져든 게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빗속에 미끄러지는 자동차의 마찰음이 들리지 않았다면 그의 키스에 빠져 또다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있을지도...!
경인은 머리를 저었다.
...미쳤어, 미쳤어.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거야, 유 경인!...
[돌아가 주세요...제발]
목소리가 떨리고 경인은 재민을 바로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다시는 오지 마세요. 우린...모르는 사람이에요]
[있었던 일을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내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잊는다고 해도 내 몸이 당신을 기억하고 있소]
재민의 음성 또한 끝맺지 못한 열정 탓인지 작은 떨림이 있었다. 그러나 단호했다.
[그날 밤 일 때문에 그러는 거요? 혹시라도 내가 당신 친구들한테...!]
[그것과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럼 무엇때문에 벽을 쌓으려는 거요? 내가 그렇게 싫소?]
[싫고 좋고를 판단할만큼 당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해요. 우리 인연은 그 때가 처음이고 끝이었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었소. 난 처음부터 당신이 마음에 들었었소. 기회를 줘요. 최소한 나란 놈이 어떤지 알고 싶지 않소?]
[알고 싶지 않아요]
[나를 밀어내려고만 하지 말아요]
[왜 그래요, 도대체! 절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전 당신이 생각하는만큼 좋은 여자가 못 돼요]
[그 기준은 내가 정해요]
[하여튼 전 얽히고 싶지 않아요. 돌아 가세요]
경인은 단호하게 뜻을 밝혔다. 재민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오늘은 이만 하겠소]
[오늘이 끝이에요!]
[...갑시다. 바래다 줄테니...]
[저도 차 있어요. 그리고 집이 근처라서 걸어가면 돼요. 먼저 가세요]
[일단...나갑시다]
경인은 재민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뒷정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엘리베이트를 탔으나 둘은 말이 없었다. 간혹 재민이 경인을 가만히 응시하곤 했다.
그리고 목례만 하고 다급하게 몸을 돌려 사라지는 경인을 재민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녀가 한참을 걸어서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것과 곧이어 시장 골목 안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 보고서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의 그녀는 모든 걸 내 보일만큼 그를 믿고 의지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그녀는 단단히 마음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충격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민은 피식 웃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머리는 그를 거부하지만 몸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거...!
재민의 몸속에 회오리가 일었다.
그녀의 입술을 느끼는 순간 그는 그녀가 주던 달콤한 환희를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는 걸 재민은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이 숨기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다는 것...그래서 조심스레 다가가야 한다는 것...그 날 일은 그날로 끝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유 경인! 당신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소]
강한 어조로 자신있게 재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경인아! 너, 진희랑 얘기 해 봐]
[으응?...무슨 얘기?]
[...? 얘가, 요즘 이상해졌어. 가끔 멍한 구석이 있어, 너!]
[...미안해]
사실이었다. 재민이 다녀간 후로 경인은 무의식중에 전화를 쳐다볼 때가 있는가 하면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뜨끔해 하며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멍하게 있다 종업원이나 선애에게 지적을 받을 때도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 말이야...!]
[그 남자라니, 누구...?]
[얘가! 왜 그렇게 놀래?]
오히려 경인의 토끼같은 모습에 선애가 놀라 했다. 경인은 예민한 자신의 신경에 스스로 무안해 했다.
[진희 남자 말이야, 김 민성!]
[으응...]
[그 결혼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상이 아니야. 그 남자는 어떨지 몰라도 진희는 전혀 마음이 없잖아. 명색이 우리가 제일 친한 친군데 친구의 잘못된 결혼을 막아줘야 할 거 아니냐구! 남자가 왠만큼 괜찮으면 참아보려 했는데, 너도 봤잖아? 아니올시다야. 게다가 남자가 너무 딱딱하고 어두워. 그 남자가 날 쳐다봤을 때는 섬뜩하기까지 하더라]
경인은 선애가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스한 느낌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결혼 날까지 받아 놨는데...]
[그게 문제야? 살다 이혼하는 경우도 있는데...진희는 지금 너때문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하려는 거야.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강요한 적 없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마. 넌 아직도 진희를 친구로서 아끼잖아. 교생 일 있기전까지 넌, 나보다 진희를 더 좋아했었어. 질투날만큼...넌 진희가 널 사랑하게끔 만들었는지도 몰라...진희는 널 빼았기는 기분이었을테고...경인아! 이제 둘 중에 하나를 택해. 진희를 철저히 외면하든지, 완전히 용서 하든지...너, 그 교생 아직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
맞는 말이었다. 태준에 대한 사랑은 이미 오래전에 접었고 잊었다. 추억속의 태준은 그냥 태준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태준을 정말로 사랑했는지도 이제는 의문이었다.
[너도 진희도 고통 받을만큼 받았어. 그리고 이 정도면 그 교생도 너와 진희를 용서했을거야. 진희 어깨 짐, 너 말고 들어 줄 사람 없어]
늘 그것이 문제였다. 언제부턴가 태준의 일은 뒷전이었고 진희가 관심거리로 자리햇다.
진희와 터놓고 얘기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오랜 세월 무관심했는지...아프면 아픈대로 상처가 터지면 터지는대로...오해가 쌓이게 내버려 두었는지...
모두가 돌아간 까페 안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경인은 내내 자문해 보았다.
진희가 청해오는 무언의 용서도 대화도 경인은 애써 외면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원망하고 때론 미워했을지...경인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그것은 어쩌면...경인 자신의 상처가 터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따지고 보면 진희 잘못은 아닌데...
...돌이켜보면 모두 내 잘못인데...
경인은 독한 술을 그대로 원샷했다. 목구멍이 타는 듯 했으나 정신은 멀쩡했다.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은 진희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이 갈수록 더했다. 그건 또하나의 죄책감이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함을...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것이다.
오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잔잔한 노래 중에 경인의 마음을 건드리는 노래가 있었다.
너무 진하지 않는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듯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뻗혀 소리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찻잔>
고등학교 1학년 소풍 때 수줍어하는 진희를 억지로 무대에 세웠을 때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진희가 부르던 노래였다.
애잔하게 잘도 불렀던 노래였다.
경인의 얼굴위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노래를 따라 불러 보았다.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노래는 경인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있었다.
경인은 휴대폰 뚜껑을 열었다. 시간이 새벽 1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