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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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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BY 액슬로즈 2003-04-01


[유 경인씨...]

비난하는건지 원망하는건지, 강 재민의 음성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어 일말의 두려움마져 느끼게 했다.
그가 경인 앞으로 다가 왔고 얼떨결에 경인은 뒷걸음질쳤다.
재민에게서 바람의 향기가 느껴졌다. 찬 빗줄기의 향도...
경인은 재민의 눈을 애써 피했다.

[죄송합니다...돌아 가세요]

되도록이면 냉정한 어투로 경인이 말했다. 하지만 재민은 예상이나 한 듯 오히려 안쓰럽다는 표정을 했다.

[아프다고 하더니...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야위었소. 난 당신이 날 피하려 지어낸 얘기일거라 생각했었소]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차갑게 쏘아 붙이면서도 경인은 매일 전화한 남자가 재민이었다는 걸 알았다. 야릇한 전율이 몸속을 뚫고 갔다.

[왜라...? 글쎄, 당신과 난 할 얘기가 있지 않소?]

[전 없어요! 돌아 가세요]

[난 있소!]

다소 화난 음성으로 재민이 강하게 말하자 경인은 눈을 들었다. 실수였다. 그만 깊은 재민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경인은 그날 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서슴없이 그의 앞에서 옷을 벗고 그에게 메달려 그가 주는 환희에 목말라하며 몸부림치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따스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다정한 손길로 등줄기며 엉덩이를 어루만져 주던 그...
경인은 그날 밤 경험했던 짜릿한 쾌감이 복부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걸 느꼈다. 그러자 얼굴이 화끈 거리고 몸이 떨려왔다.
다시 나타난 강 재민이 야속한 순간이었다.

[전 퇴근해야 됩니다. 죄송해요]

경인이 재민을 피해 비켜 가려는데 재민이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나와 얘기하기 전엔 어디에도 갈 수 없소!]

[무, 무슨 할 얘기가 있...!]

재민이 경인의 말을 무시하고 문으로 가더니 안에서 잠궈 버리는 게 아니가! 놀란 경인이 문으로 향하자 재민은 그런 그녀의 팔을 잡고 창가 테이블로 가 그녀를 앉히고 맞은 편에 떡 하니 앉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전 할 얘기가 없다잖아요!]

[그 날...]

경인은 재민이 다시 그날 일을 꺼내자 숨이 목에 탁 차는 기분이었다.

[그 날,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요? 아니,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오? 난 처음엔 꿈을 꾼 게 아닌가 하고 착각했었소. 당신이란 여자, 유 경인이란 여자는 단지 내가 만들어 낸 상상이라고...그런데 난 침대 시트에 묻은...혈흔을 봤소. 처음엔 그게 무언지도 몰랐지...]

경인은 눈을 창밖에 고정시켰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지도 않고 조용히 외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겨울비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요? 처음 본 여자의 순결 앞에서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영광이면서도 내겐 짐이었소]

[책임 같은 거 묻지 않을테니 걱정마세요. 그것 때문에 그래요?]

[내 말은 그게 아니잖소. 난 당신이 경험있는 여자일 거란 생각을 하고 전혀 배려를 해 주지 못했소. 그게 미안했소. 그런데 당신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난 최소한 당신 차 번호를 기억해 두지 못한 걸 후회했지. 화가 나기도 했소]

[왜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요?]

비꼬듯 하는 경인의 말에 재민이 가만히 경인을 건너다 보았다.

[왜 그렇게 꼬여 있소? 그날의 당신은 이렇지 않았소]

[그 날 일은 잊으세요. 지금 이 모습이 저의 본 모습이에요. 돌아 가세요. 더 이상 얘기를 했다간 당신을 만난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니깐요]

[그 말은 종종 나를 기억은 했었단 얘기요? 그러지 마요. 이것도 인연이오]

[인연이 아니라 악연이라 해야겠군요. 전 당신과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 믿었어요. 다시 만나리란 상상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요. 세상이 이렇게 좁다니...]

[난 그날 이후 당신을 잊어 본 적이 없소. 솔직히 주소도, 휴대폰 번호도 알고 있었소]

[무슨 소리죠? 전 가르쳐 준적이 없는데...뒷조사를 했나요?]

[뒷조사가 아니라 조회라고 해야겠지요. 사실...직업이 형사요]

뜨끔했다. 그가 뭘 하는 사람인지, 많은 직업을 놓고 생각은 해봤지만 설마 형사일거라곤...!
그러나 듣고 보니 그의 이미지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직업이란 생각은 들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픈 유혹을 느꼈지만 그러면 당신이 겁을 먹지 않을까 싶어서 계속 망설였소. 토요일 동창 모임이 있던 날 당신을 다시 만난 건 내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오. 어쩌면 이렇게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난...위험을 무릅 쓰더라도 당신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요]

[만나주지 않았을 거예요]

매몰찬 그녀의 말에 재민은 그냥 피식. 웃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았더라면 함께 술 마시잔 청을 하지도 않았을테고...세상이 아무리 좁아도 그렇지 어떻게 당신이...]

[민성과 형제일 수 있느냐? 어떻게 쌍둥이일 수 있느냐? 당신은 내가 민성에게 당신이 그날 밤 내게 한 얘기를 다 고해 바칠거란 걱정을 한거요?]

[아닌가요?]

[당신은 그 날 날 믿고 사적인 얘길 했소. 난 그것을 지켜줄 의무가 있는 것이고...그렇지 않소?]

그의 말에 경인은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으나 여전히 그에게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는 기분이라 편치 않았다.

[당신 친구가 나와 민성에 대해 대충은 얘기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사실 민성과 난 친한 편은 아니오. 다들 쌍둥이라 하면 마음이 통한다고들 하지만 우린 태어나자 마자 떨어져 살아온 탓인지 별 애틋함이 없소. 시시콜콜 서로에 관한 얘기를 할 만큼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고...그 날 당신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다 잊었소. 내 기억속에 있는 건 오로지 유 경인이란 여자 그 자체 뿐이오]

[......!]

[사실 동창 녀석이 이 곳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내키지 않았지. 이런 곳은 와 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말이오. 모임에 빠질까도 생각했었소. 그런데 오게 되더군. 그리고 당신을 만났소. 충격이었지... 그 다음은 기뻤고...그리고 화가 나더군. 냉정하기 그지없는 당신의 모습에...저 남자가 왜 여기 나타났나...당신 표정이 딱 그랬지]

우습다는 듯 재민이 나즈막히 웃었다.

[김 민성씨가 당신인줄 알았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당신은 상상도 가지 않을 거예요]

[하룻밤을 같이 잔 남자가 친구의 약혼자다? 과연 그랬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소?]

[지금 저와 농담하자는 건가요?]

경인이 화를 냈다. 극도로 긴장하고 다소 불안했던 그녀였는지라 재민이 가볍게 말을 하자 화가 난 것이다.

[돌아 가세요, 제발!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요]

경인은 일어나 출입문을 손으로 가리키며 재민이 나가주길 원했다. 천천히 재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소. 당신은 내 속에 들어 와 있소. 난 당신이 좋소]

솔직한 그의 말에 경인은 할말을 잃었다. 그가 그녀 곁으로 오더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다듬었다. 흠칫 하며 경인이 뒤로 물러나며 재민의 손길을 피하자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매일밤 당신을 꿈꾸었소. 오렌지를 보면 당신이 떠올랐지. 당신에게선 오렌지향이 났었으니깐...지금처럼 말이오]

재민이 다시 다가와 경인의 얼굴선을 살며시 만졌다. 사라질까봐 두려워 하는 것처럼...깨질가봐 겁이 나는 듯 조심스레...
경인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를 밀쳐 낼 수도 있지만 마음이 그것을 막고 있었다.

[당신이 그리웠소. 미치도록...]

재민의 입술이 다가왔다.
안돼...!
경인은 외쳤으나 그 소리는 목구멍에 걸려 사라져 버렷다.
그의 입술이 단숨에 그녀의 입술위로 포개어졌다.
깊은 키스다.
목말라 하는 사람처럼 재민의 입술은 뜨거우면서도 다급했다.
경인의 눈이 커다랗게 뜨지는가 싶더니 가만히 감겼다.

...이게 아닌데...이러면 안되는데...

이성의 외침이 들렸으나 경인의 입술이, 경인의 몸이 재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재민의 혀가 가만히 밀려 오자 경인은 입을 열고 그의 침입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겨오고 그의 입술은 한치의 빈틈없이 그녀의 입술이 주는 달콤함에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