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동안...
끝없이 넓은 사막을 무작정 헤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책없이 쓰러져 누워 본 기억이 없었던 경인은 속수무책, 몸살 앞에서 맥없이 백기를 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눈을 떴을 때 경인은 자신이 자신의 방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알았다. 옆 작은 탁자위엔 약봉지와 물주전자가 그녀의 상태를 알려 줄 뿐 방안에는, 아니 집안에는 경인 혼자 인 것 같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서 경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때 현관벨 소리가 들렸다.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려 놓는 순간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선애의 음성이었다. 다른 이의 음성도 들렸으나 선애의 목소리에 흡수된 듯 잘 들리지 않았다.
조금 후 선애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일어난 경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깼냐?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들어? 야, 사람 좀 작작 놀래켜라. 십년은 감수한 기분이다]
[도통 기억이 없어. 집에 와 눕는 순간 머리가 핑 하는 건 알았는데... 병원에 간 기억도 희미하고...]
[말마라. 가게 문이 닫혀 있다는 연락을 받고 너한테 아무리 전화해도 받아야 말이지. 내가 열어 주고 정아더러 가게 청소 좀 하라고 하곤 여기로 왔지. 예비키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야, 아찔하다]
선애가 정색을 했다.
[옷이고 이불이고 땀범벅이더라. 가게 정아를 불러 내 차에 겨우 태워 병원으로 간거야. 몸살이라더라. 입원시킬려고 했는데 니가 죽어라고 싫다길래, 그나마 정아가 밤에 있어 주겠다고 해서 집으로 다시 온거야. 집에 연락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적당히 핑계는 댔는데...]
[잘했어. 별거 아닌 것 같고 괜히 걱정하는 거 별로야]
[너 그렇게 아픈 거 처음 봤어. 얼마나 놀랬는지...낮에는 나랑 진희가 번갈아 가며 니 수발 들었고 밤에는 정아가 고생 좀 했을거야. 너 정아한테 인사 톡톡히 해라. 아무리 정아가 자진해서 한 일이지만]
[알았어...]
[이제는 좀 살만해?]
[으음...괜찮아. 넌 가게로 가. 나 혼자 있어도 돼]
[그래도 아직은 환자야. 3일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 죽 좀 먹고 병원에 한 번 더 가자]
선애는 경인은 다시 침대 안으로 집어넣고 주방으로 들어 갔다. 어디 전화를 하는지 수다 떠는 소리가 들리고 물 소리가 들리고...
경인은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려던게 아닌데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선애가 흔들어 깨웠다.
[먹고 자. 야채 죽이야]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 놓으며 선애가 수저를 쥐어 주었다.
[야, 빨리 나아라. 너 없으니깐 가게 손님이 떨어지더라. 그리고 너 찾는 남자 손님도 있었어. 여러번 전화 왔고...]
선애의 말이 귓가에서 윙윙 하는 것 처럼 울려 퍼졌다.
입안이 껄끄럼했으나 군말없이 먹었다.
그리고 병원에 들러 며칠분의 약을 더 조제 받았다. 그리고 선애를 보내고 경인은 아무런 생각 같은 거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잠이란게 자면 잘수록 그 깊이를 알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가뿐해진 기분으로 경인은 까페에 들어섰다.
진희가 선애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정아가 먼저 아는척을 하며 몸 상태를 물어 왔다. 경인은 정아의 볼을 쓰다듬어 주면서 무언의 감사를 표시했다.
[괜찮니? 얼굴이 많이 홀쭉해졌어]
[야, 눈이 옴폭하게 들어간 게 더 섹시해지지 않았냐?]
조심스런 진희의 말과 반대로 선애는 호들갑을 떨며 낄낄거렸다.
[경인이 너 아파서 누워 있을 때 진희 얘 야단법석 한 거 생각하면 더 우습다. 지 엄마 병원으로 데려오지 않았다고 소리지르지 않나, 병원에 입원시킨다고 난리를 치지않나... ]
진희가 곱게 선애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게 했다. 경인이 진희에게 어떤 존재인지...아니, 여전히 아직도 그런 존재라는 걸 진희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런 동성의 감정은 아니더라도 경인은 진희에게 부모보다 우선시되는 친우인 것이다. 그것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민성씨에 대해 물어도 너 없인 얘기 않겠대]
민성의 얘기가 나오자 저절로 강 재민이 떠올랐다. 그러나 경인은 태연했다. 몸살을 앓고 난 후 얻은 게 있다면 재민의 기억이었다. 그를 재회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희미한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만난다해도 경인은 더이상 흠칫해 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고나 할까...
[그 두사람 진짜 쌍둥이래]
무언가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선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성씨가 형이고 그 남자가 동생이래. 이름은 강 재민이고...]
[근데 왜 성이 틀리냐?]
[민성씨 아버지와 재민씨 엄마가 남매야. 그러니까 여동생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 오빠는 그렇지 못했대. 오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오빠 부인에게 문제가 있어서 인공 수정도 안된다고 들었어. 그런 와중에 여동생이 쌍둥이를 낳았어. 오빠 부인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쌍둥이중 약한 애를 오빠 집으로 보냈대. 여동생보다 형편이 월등한 오빠네가 일부러 약한 애를 원했대. 잘 키우겠다고...그리고 그렇게 했고...]
[그래서 성이 틀리는구나. 그런데 친부모를 찾지 않았는가봐?]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떨어져 살았어. 오빠네는 서울, 여동생은 대구에서...그 둘이 대학에 들어 간 후에야 사실을 얘기 했대.오빠네로 간 아이가 민성씨인데 민성씨는 그냥 현실 그대로 받아 들였어. 사장 아들로 남기로]
[그럼 재민이란 남자의 집은 형편이 좀 ...그래?]
[아니, 그렇진 않아. 시내에서 식당을 한대. 하지만 사장의 외아들이 났겠니? 누나와 남동생이 있는 식당 집 쌍둥이가 났겠니?]
[야, 그래도 피는 물보다 진해]
[민성씨는 예외야. 그는 실리를 따지는 사람이야. 봐서 알잖아]
냉정하게 내뱉는 진희의 말속에는 민성에 대한 애정은 없었다.
[알긴 아네? 알면서 결혼하겠다는 거야? 다시 생각해. 그 사람, 너하곤 어울리지 않아. 사람이 너무 차갑고 예리해 보이더라. 차라리 그 쌍둥이 동생이 낫지...야, 쌍둥이의 분위기가 틀려도 어째 그리 틀릴 수가 있냐. 민성이란 남자, 난 반대야. 그건 경인도 마찬가지고...]
진희는 피식 웃었다. 경인은 아직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진희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정아가 가져다 준 대추차만 홀짝였다.
[그래도 의사로는 최고로 인정받는 사람이야. 엄마에겐 없어선 안될 사람이고...]
[결혼은 니가 하지 니 엄마가 하냐? 살다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하는거야 바보야!]
더이상 진희도 입을 떼지 않았다. 커피를 마셨다. 경인이 뭐라고 해주길 기대한 자신을 비웃으면서...
...언제쯤...언제쯤 나를 용서하고 마음을 열어 주겠니?...
[조심해서 들어 가세요...너도 운전 조심하고. 내일 봐!]
까페 식구들을 모두 보내고 경인은 피곤한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대충 정리를 하고 빨리 들어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몸을 돌렸다. 손님이겠거니 했다.
확인을 한 순간 경인은 잠시 멈칫했다.
[죄송합니다...영업이 끝났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걸 알거요]
강 재민이었다. 낮고 강한 음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