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희가 당당하고 여유있는 걸음으로 다가 왔으나 경인의 눈은 그 뒤쪽에 쏠려 있었다.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숨이 멎음과 동시에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 소리를 들었다.
...맙소사!...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속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이...이건 꿈이야. 그래 꿈이야! 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진희와 함께 나타난 남자!
진희가 소개한다는 남자!
그 순간, 경인은 자신이 10년이나 훨씬 지난 그때로 되돌아 가는 환상속에 사로 잡히고 말았다.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잊었던 아픔이, 잊었다고 믿었던 아픔이 거짓말처럼 눈덩이가 되어 다시 쑤셔 오는 순간이었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저 깊은 심연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느낌이었다.
[야...왜그래?]
얼어붙은 듯 서 있는 경인을 선애가 팔꿈치로 가볍게 툭 쳤다. 화들짝 놀라며 순간 경인은 현실 앞에서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충격은 여전히 경인을 싸안고 있었다.
진희 뒤에 당당히 서 있는 남자는 분명 태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름아닌 강 재민! 바로 그 남자가 아닌가!
설핏 설핏...경인의 머리속을 파고 들어던,
절대! 다시는 만날 일이 없다고 믿으며 마음 속 저 깊은 바닥에 쑤셔 넣은 남자, 그 강 재민이 진희의 약혼자가 되어 경인 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럴수도 있단 말인가?...이런 말도 안되는!!!...
[보고 싶다고 했지?]
조용하고 깔끔한 진희의 음성에 그제야 경인은 진희를 보았다. 예전에도 이런 상황이 있었지...그것도 진희의 고의적인 계획하에...그럼 이번에도...?!
하지만 경인은 머리를 저었다. 이번엔 앞뒤 상황이 맞지 않았다. 경인이 재민을 알기 이전에 진희는 이미 재민과의 결혼을 결정해 놓고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끼어든 꼴이 되는 셈?...그때완 반대로...어찌...! 어찌 이런 우연이...어찌 이런 악연이 되풀이 될수가...
휘청대는 몸,
숨가파 하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경인은 혼란한 머리속을 정돈했다.
[처음 뵙습니다]
그가 인사를 건넸다. 아주 세련되고 사무적인 음성으로...
잠시 망설이던 경인은 평소의 냉정한 분위기를 되찾아 그를 올려다 보았다. 단호하게 마음먹고 말이다. 헌데...
[유 경인씨죠? 진희씨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다르다!
분명 강 재민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그녀의 기억속에 있는 강 재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경인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다지도 완벽하게 표정을 감출 수 있단 말인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비록 사랑의 감정은 없었으나 하룻밤을 같이 잔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 여자를 보고도 단 1초의 감정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눈앞의 남자가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다시 머리속에 혼란이 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군살이 없는 잘 다듬어진 손이었다. 기억속의 그 손보다도 하얗고...
살며시 잡는 순간, 경인은 확실히 알았다. 그녀가 아는 강 재민이 아니라는 걸!
서로의 손이 닿는 순간,
서로를 거부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날밤, 경인의 모든 신체 기관은 강 재민이란 남자를 거부하기는 커녕 아주 자연스레 받아 들였는데 지금 눈 앞의 남자는 경인의 몸이거부한 것이다.
경인은 재빨리 손을 빼고 그를 가만히 살피듯 응시했다.
...누구란 말인가? 강 재민이 아니라면...
[김 민성이라 합니다]
혼란의 연속이었다.
꿈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 남자가 김 민성이라면 강 재민이란 남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민성은 경인이 불쾌했다.
반갑게 맞아주리란 기대 따위는 하지도 않았지만 최소한 예의를 갖춰 대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인은 기숙사 사감같은 딱딱한 가면같은 얼굴을 하고 그를 대한 것이다.
마치 도마위에 올려진 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진희가 입버릇처럼 경인. 경인. 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만나보니 더 거부 반응이 일었다.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도 본인은 정작 먼데를 헤매는 듯한 경인을 민성은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
...진희씨만 아니라면 상대하지도 않았을 여자야...
경인을 평가한 민성의 결론이었다.
경인 또한 민성이 자신을 달갑잖게 여긴다는 걸 직감으로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묻고 싶어도 참았다. 혹시 쌍둥이인지...!
...아니 아니...쌍둥이라면 성이 같아야 하잖아?...
머리를 저었다.
그런 경인을 아까부터 지켜보던 진희가 결국 입을 열었다.
[경인이 너...어디 아파? 표정이 안 좋아]
[응? 으응, 경인이 얘가 어제 잠을 좀 설친 모양이더라. 그래서 지금 컨디션이 좀...그래]
경인의 속을 알리 없는대도 선애는 경인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걸 눈치꼽고 적당히 둘러 댔다. 선애는 민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해하세요. 원래는 다정다감한데...조금 있음 괜찮아질거에요]
[.....]
민성은 건성으로 살짝 웃었다.
[의사라면서요? 분위기가 딱 그런 분위기네요. 근데, 진희 만난지는 오래되셨나요? 기집애가 통 얘기를 하지 않아서...]
[어떤 여잔지 알만큼은 됩니다]
[진희 어디가 마음에 들었어요?]
[모든 것이...]
하면서 민성은 앞에 놓인 커피 대신 물을 한모금 마셨다. 더 이상의 질문은 사양한다는 듯... 선애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저기 저 테이블에 앉은 사람, 현기 선배 아니니?]
진희가 말을 돌렸다. 민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안하무인같은 성격이 몸에 벤... 가끔 사람을 아주 황당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안하게 만들기도 하는 게 그의 천성인 것 같았다. 사람좋고 활달하기로 소문난 선애조차 당혹해 할 정도니...!
진희는 혀를 차며 그렇게 화제를 바꾸었다.
[맞아. 동창회가 있대]
[저 선배 참 오랜만에 본다]
[그렇지? 저 선배도 그렇고 그 친구들도 그렇고 매너가 굳.이야]
은근슬쩍 선애는 민성을 빗대어 그렇게 말했다. 날카로운 민성의 눈이 자신에게 꽂히는 걸 알았지만 선애는 모른 척 했다. 밥맛이었다. 진희의 남자만 아니라면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은데...
진희는 선애와 경인이 민성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데려 오기전부터 예견하고 있었던 일이라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가 그것을 알고 자리를 피해 주기를 바랬는데 그는 오히려 진희에게 나가자는 눈치를 은근히 주고 있었다. 진희는 그 무언의 명령을 외면했다.
그녀가 민성을 데려온 건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의 존재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존재의 의미가 다하자 김 민성이란 그 자체가 지루해 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진희 뿐만이 아니라 경인도 선애도 느끼고 있었다.
일분 일분이 너무나 더디게 지나갔고 수다쟁이 선애조차 입을 다물어 어색하고 밋밋한 공기만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결국 백기를 든 건 민성이었다.
[이만 가봐야겠군요...]
[어머!...그러실래요?]
선애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말꼬리를 잡았고 민성은 입가를 살짝 비틀며 자리에서 일어나 진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갑시다...]
[먼저 가세요. 전 친구들과 좀 더 있다가 갈게요]
[그러세요. 우리끼리 수다 좀 떨다가...]
[수다는 아줌마들 전용물 아닙니까?]
비웃듯 민성이 선애의 말을 잘랐다. 기막혀 하는 선애를 내버려 두고 민성은 진희를 완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일어나요]
명령조였다.
[먼저 가요. 전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요]
진희는 그의 손을 살며시, 그러나 단호하게 밀어 냈다. 그러자 민성이 양미간을 좁히는가 싶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때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경인은 잘됐다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좀 긴 듯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힘있게 들어선 남자의 시선이 경인에게 향했다. 순간,
경인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용수철처럼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대 남자 또한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강 재민.
그는 자신이 그토록 찾아헤매던 여자를 이제서야 다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