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어느 때보다 주방이 넓어 보이고 썰렁해 보이는 건 경인 자신이 어제의 경인이 아니기 때문일까?...
한쪽 입가를 살짝, 스스로를 비웃듯 치켜 올리며 경인은 냉장고와 냉동실을 뒤졌다. 북어를 꺼내고 무를 꺼냈다. 경인 자신의 속이 쓰린 건 물론이거니와 선애와 진희 또한 밤새 술을 마신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를 듬성듬성 썰었고 북어는 쪽쪽 찢었다. 그리고 다시마를 듬뿍 넣어 국물이 만들어 지는 동안 이번에는 쌀을 물에 불려 놓고 잣을 꺼냈다. 물을 조금 타 믹서기에 갈았다.
[혼자서 밤을 센거야?]
주방 입구에 서서, 조금은 누그러진 여유있는 음성으로 진희가 말을 던졌다. 그러나 대꾸없이 경인은 쇠고기를 다지기 시작했다. 토독토독...칼질하는 소리가 리듬감있게 울려 퍼졌다.
[내가 한 말 때문에 네가 외박을 했다고 생각한다면...내가 너무 앞서 간거니? 너한테 충격이기는 한거야? 배신감이라도 느꼈어? 아니면 속이 후련하다는 기분이라도 들었어? 드디어 내가 너한테서 떨어져 나가겠구나 라고 생각하니 소리라도 지르고 싶어서 나간거니? 자축하려고? 그런거였어?]
진희의 목소리는 폭발 직전의 화산 같은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그러면서도 잔잔한... 여전히 경인은 대꾸가 없었다. 마치 혼자 있는 듯 시금치를 씻고 당근 껍질을 벗기고...
대꾸하기 싫은 이유도 있지만 경인은 진희와 입씨름할 상황이 되지 못했다. 머리는 띵하고-술을 마셨으니 당연한 일- 몸은 납덩이마냥 천근만근-남자와 사랑을 하는 일이 매일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이라 진희와 감정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젠 말하기도 싫어? 설마 혼자 밤을 샌 건 아니겠지?... 하긴...넌 곧잘 혼자 술을 마시곤 하지...]
[알면 더 이상 잔소리 하지마. 그리고 도와주지 않을 거면 나가줘, 걸리적 거려...]
[어? 경인이 니 언제 왔노? 니 밤새도록 어디 있었는데 연락도 안되냐!]
머리를 매만지며 선애가 진희를 비집고 들어오며 말했다.
[뭐 하는데?]
냄비속을 들여다 보며 선애가 물었다.
[아침... 그런데 너 집에 들어 가지 않아도 괜찮은거야? 남편이 아무 소리도 안해?]
[우리 남편은 날 믿잖아. 근데 니 어디서 뭐한 거냐?]
[아침 먹고 빨리 집에 가. 오늘은 내가 종일 가게 볼테니깐...]
[어디서 뭘 했는지는 묵비권이야. 말 못할 일이 있었는가 봐]
핵심을 피해 가는 경인을 비웃 듯 진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근과 다진 고기에 참기름을 넣고 볶았다.
불린 쌀을 믹서에 넣고 적당히 갈아 볶은 재료에 넣었다.
갈아 놓은 잣을 부었다.
다시물을 붓고 걸죽하니 저어가며 끓이다 다진 시금치를 넣었다.
[이야! 이거 괜찮네.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게 술술 잘 넘어간다야! 니 이거 어떻게 만든거냐? 가르쳐줘봐라. 우리 남편, 해 먹이게]
숟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선애가 수다를 떨었다. 반면 진희와 경인은 말없이 조용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언제부터던가...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은 두 친구의 감정 때문에 선애는 늘 위가 답답함을 느껴야 했다. 어느 한 쪽 편을 들 수도 나무랄 수도 없는 입장이고 둘을 화해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경인과 진희는 늘 가까이 있으면서도 그 사이에 놓인 유리벽을 깨뜨릴 생각들은 하지 않고 있었다.
선애는 그들 일에 대해서는 방관자가 되어야 한다. 두 친구 다 선애에겐 소중했다. 경인과 진희. 둘 또한 그러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다가가는 방법이 다른 까닭에 둘은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성의 사랑이든
동성의 사랑이든,
사랑은 사랑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선애의 사랑론이었다.
동성의 사랑...
진희는 그런 빗나가고 아픈 사랑을 제일 먼저 했다. 그건 도박이었고 고통이었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위태위태한 상태에서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후였다는 걸...
잘못된 사랑의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지만 그 순간은 영원하다는 걸 경인은 경험했다. 그리고 과거는 과거속에 묻어 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죄의식은 사람을 과거속에서 헤매게 한다는 걸...
시간은 ,
느리게 세 사람을 물고, 일주일을 건너 갔다.
경인은 핑크레이디를 들고 앉아 제리가 부르는 radiohead의 crip을 듣고 있었다.
영화 씨클로의 메인테마로 나왔던 노래인 걸로 기억한다...남자의 암울한 분위기가 주는 매력과 여자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떠올리며 경인은 잔을 입에 댔다.
선애가 어느새 앞에 와 앉았다.
[니 진희가 결혼하는 거 그냥 두고 볼거냐?]
[......!]
[결혼한다는 애 얼굴이 어둡다는 게 말이 되나! 지 엄마 좋자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건 미친 짓 아니냐. 진희 말릴 사람이 니 말고 누가 있냐? 진희가 와 결혼할라고 하는지, 너 아냐?]
어제 선애는 진희로부터 12월 20일에 날 잡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가 결한하다면 당연히 기뻐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애는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