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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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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BY 액슬로즈 2003-03-08


[선애야, 너 아니?...그 남자...이 태준...그 남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넌 아니?]

불이 꺼진 <마리아>에서 진희와 선애는 둘이서 술을 주거니받거니 하며 밤을 밝히고 있었다. 선애도 적당히 취기가 오른 상태고 진희도 이제는 취한 게 역력해 보였다.
술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모르지만 진희의 음성의 평소와는 다르게 꽉 잠겨 있었다.

[새삼스레 그 얘긴 왜?......난 모르지. 니네들이 그 문제에선 입을 봉했잖아. 그 일 있고 난 후 니도 경인이도 변했다 아이가. 특히 경인이가 말이다. 웃음도 없어지고 말수도 적어지고...]

선애의 입에서 서울말과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여서 나왔다.

[내가 그 남자를 죽였어...내가 죽인거나 마찬가지지...]

눈물 한 방울이 진희의 오른쪽 뺨을 타고 흘렀다.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아니, 처음부터 나에겐 관심도 없던 그 남자를 유혹하지만 않았어도...]

[후회하지마! 후회해봤자, 돌이켜봤자 서로 가슴만 아픈 걸 뭐하러 자꾸 얘기 하냐? 죽은 사람 두고 이런 소리 해서 미안하지만 그 남자, 너한테 넘어간 건 니 배경 때문이 아니었냐. 어떻게 보면 경인이 한테도 잘 된 일이잖아. 양다리 걸치는 남자도 밥맛이지만 여자 재산 탐내서 사랑없는 결혼하려는 남자는 더 밥맛이야. 그러니 넘 마음 아파하지마라]

[아직도 가끔... 그 때 일이 꿈에 떠올라. 그는...경인과 내가 보는 앞에서 죽었어. 경인을 밀어내고 대신, 트럭에 치었는데, 그의 머리가...!]

[그만해!]

버럭, 선애가 화난 음성으로 말을 끊었다.

[그만해라, 응? 잊어 좀! 니들 둘, 이제는 잊을 때가 되지 않았냐?]

이제는 진희의 양 뺨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흐느낌도 표정도 없었다. 눈물은 저 혼자만의 감정인냥 그렇게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선애는 잔을 비우며 인상을 찌푸렸다. 술이란 게 마시면 마실수록 쓰라리기만 했지 땡기는 맛은 없었다. 마셔봤자 이로울게 없는데 안 마실수도 없는 게 술이다. 그게 선애의 이론이었다.

[내가 얼마나 나쁜 계집애고, 경인의 말대로 소름끼치는 계집앤줄 알어? 그 사고 와중에도 난...경인이 다치지 않은 걸 얼마나...감사했는지...]

[......!]

[그 사람에게 미안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거야. 그리고 평생 고마워하고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게 그 이유야]

[죽음이 그의 운명이라면 삶은 경인의 운명 아니었겠냐. 좋은 게 좋다고 좋게 생각해]

[내가 경인에게 그런 소리를 한 건 경인이가 그 사고로 죄책감을 갖지 않길 바란 마음에서였어. 모든 건 나로 인해 생겼으니...]

[어쨌던 니 말대로 되긴 된거네. 경인이 걔가 그 후 남자 사귄 일이 없으니깐]

[아니, 그건 나에 대한 시위야. 일종의 복수지. 남자를 만나지 않으면 내가 더 괴로워 한다는 걸 알고 있거든...]

[뭔 말인지 모르겠다. 아유, 니들 문제는 하여튼 머리만 아파. 그건 그렇고 너 결혼하는 남자 뭐 하는 남자야?]

재빨리 선애는 화제를 바꾸었다. 그 일 얘기하자면 몇날 며칠이 흘러도 끝이 나지 않을테니깐.

[의사]

[그렇게 갑자기? 아니면 숨겨 두었다가 이제서야 얘기하는거냐?]

[엄마 주선으로 한달전에 선 본 남자야. 울 엄마가 더 좋아해]

[사랑없는 결혼이야? 왜?]

따지듯 묻는 선애의 말에 진희는 두 손으로 눈물 자국을 훔치고 생기없는 웃음을 지었다.

[사랑?...그건 동화같은 얘기야. 차라리 한여름에 폭설이 내린다면 믿을까...]

[얘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네. 결혼은 사랑이 있어야 하는거야! 그런 결혼이라면 당장에 때려치워라, 응?]

[내가 결혼해야 경인도 할 것 아니야...]

[뭐...?]



[네...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 친구가 결혼을 한다면 축하해줘야 하는 일 아닙니까?]

얘기가 끝나자 재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질문을 던졌다.
경인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듯한 미소를 짓다 말았다.

[결혼하려는 이유를 아니까요... 그래서 혼란스러워요.그 결혼을 막아야할지 내버려둬야할지...]

[혼란스럽다니요?]

[진희를 미워하지도 그렇다고 용서할 수도 없는 거와 같은 이유죠. 내버려두면 불행한 결혼 생활일 게 뻔하고 막자니...그건 진희가 바라는 것이고...]

[미워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

[전...친구인 진희가 절 필요로 할 때 거절했어요. 어디선가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동성은 그 상대인 동성이 치료할 수도 있다>라는 말을...그걸 그때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그 남자분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얘깁니까?]

[어쩌면요...전 말로만 친구 친구 했지 친구가 가장 힘들어 할때 등을 돌렸어요. 그랬기때문에...그가 죽었는지도...그의 죽음은 제 탓이에요. 제 탓...]

[그래도 남자분이 진심으로 경인씨를 사랑했다는 건 알았지 않습니까]

[사랑요...?!]

나즈막히 내뱉으며 경인은 술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 갔다. 단숨에 비우는 경인을 보며 재민은 경인의 심경이 어느정도 복잡하고 괴로운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속 깊숙이 묻어둔 얘기를 처음 본 사람에게 털어 놓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경인이 그렇게 했다는 건 재민 자신이 미더워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마 오늘 아무나 붙잡고 하소연아닌 하소연을 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우리 여기 나이트 갈래요?]

갑작스런 경인의 제안에 재민은 피식 웃었다.

...참 깜찍한 아가씨일세...

[가요!]

경인이 일어섰다. 그러나 한 발자욱 떼기도 전에 그녀는 비틀거렸고 쓰러지기 전에 재민이 잽싼 동작으로 부축했다.

[후훗...나이트는 다음에 가고 그만 집으로...! 이런, 둘 다 술을 마셨으니 운전은 안되고...택시를 잡아야겠군요. 경인씨 여기 잠깐만 좀 앉아 있어요. 나가서...!]

[아니요]

나가려는 재민의 팔을 경인이 잡았다.

[아니요...그러지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