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조심해...]
금방 녹아 버릴 듯 진희의 음성은 가라앉고 있었다. 경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무관심한 눈빛으로 진희를 보았다.
[네가 기대한 대답 아니야? 그럼 뭐라고 해주길 바란거니. 내가 게거품 물고 펄쩍 뛰길 바랬니, 바지 가랑이 붙들고 결혼 하지 말라고 빌길 바랬니? 뭘 기대 한거야. 뭘?]
[기대? 그 딴 거 바라지도 않아 그 딴 것...]
이번엔 진희가 찬 서리같은 미소를 흘렸다.
[언제 네가, 내가 원하는 답을 해준적이나 있어? 이번에도 그렇겠지 내가 결혼을 하든 동거를 하든 넌 상관이 없지 네 앞에서 사라져 주기만을 바라지?]
[그런 넌 사라져 준 적 있어? 없지?]
진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화가 치밀어 올라 그대로 계속 앉아 있다간 경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남길 것만 같았다. 아니면 실패한 계획에 분해서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하든지...
결혼얘기도 경인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었는지도...
무리수를 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커피 값 계산하고 갈께]
[널 움직인 남자!...보고 싶으니깐 한 번 데리고 와]
돌아서는 진희의 등에 대고 경인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슬픔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진희의 눈가를 적셨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서면서 진희는 경인을 만나게 된 걸 후회했다.
같은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던 것을 후회하고,
입학식 때 스커트가 찢어져 도움받은 사람이 하필 경인이었다는 사실도,
같은 반이 된 것에 너무 반가워한 것도 후회 막심이고,
경인에게 강한 매력을 느껴 호기심을 갖게 된 일도 후회했다.
3년동안 같은 반이 되게 해달라고 내심 바랬던 일도,
그 소원이 이루어져 행복해 했던 순간들도,
진희는 후회했다.
잊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중요한 건 그런 후회를 되씹는 순간에도 경인은 가슴 한 쪽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과 계단을 다 내려 올 때 즈음이면 후회한 사실을 미안해 한다는 것이었다.
진희는 자신이 주는 것은 뭐든 다 외면하는 경인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자신을 가까이 하지도 그렇다고 멀리 하지도 않는 그 진실 앞에서 늘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건 진희였다.
[정말...결혼할거야...이젠 나도 벗어나고 싶어...이만큼 고통 받았으면 충분해...유 경인! 너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야...]
[언니...잔 치울까요?]
아르바이트하는 정아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경인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음. 하고 대답했다.
[제리는 아직 안 왔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깐요 왜요, 전화 해 볼까요?]
[아냐 됐어]
경인이 무대위로 올라 갔다. 창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 마이크를 잡았을 때 또 다른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 섰다.
여자는 무대 위 경인을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주방쪽에 서 있는 정아에게로 갔다.
[너거 사장 노래 불렀나?]
새까만 머리를 한 올 남기지 않고 뒤통수에서 묶어 보기좋게 올림 머리한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코트를 벗었다. 정아가 고개를 저었다.
[뭔 일 있었나?]
[아뇨. 조금 전 홍 진희씨 다녀가신 것 빼고는...]
[진희가 왔었나?]
여자의 음성엔 놀라움과 반가움이 함께 묻어 있었다.
이 선애. 서른. 경인과 진희의 친구이자 <마리아>의 동업자.
결혼한 몸으로 세 살된 딸이 있다.
[진희가 왔었다? 근데...또 뭔 일이 있었기에 자 신경이 저리 곤두서 있노...]
혼잣말을 하면서 선애는 궁금해 했다. 그리고 이왕 왔으면 자신도 보고 가야지, 그냥 가버린 진희가 야속했다.
[선애 언니, 우리 사장님 노래 부를 줄 아세요?]
정아의 물음에 금방 선애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