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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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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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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액슬로즈 2003-02-15

또르르...
출입문 열리는 소리에 경인이 고개를 들고 확인을 하며 양미간을 좁혔다.

홍 진희.
나이 서른. y대 영문학과 시간 강사. 경인과는 고등하교 대학교 동창생. 미혼.

[...오랜만이다...헌데 이 시간에 왠일로...?]

경인이 시계를 힐끗 보고 말했다. 진희는 한껏 차려 입은 모습이었다. 화장도 다른 때보다 진한 것 같았고 스커트 길이도 짧았다.

[막내야 여기 커피 한 잔 주겠니? 블랙으로]

경인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진희가 먼저 입을 열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커피가 앞에 놓일 때까지도 진희는 말이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결혼해]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내려 놓기가 무섭게 곧바로 진희는 메마르고 화난 듯한 음성으로 앞에 앉은 경인에게 내뱉았다.
그러나 차마 경인을 바로 볼 수 없는 진희는 보라빛 레이스 커튼 아래의 거리로 시선을 내리 꽂았다.
아주 주의깊게 무언가 관찰하는 눈초리 같았으나 실상 진희의 신경은 온통 경인에게 쏠려 있었다.
건너편 보세 옷가게에서 아가씨 둘이 손을 잡은 채 나오고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통통한 스타일이었다.

......결혼해.

진희는 자신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왔는지 갑자기 의심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경인이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결국 내 속으로 중얼거리고 만 것일까?

...하는 생각. 왜인지 안도하면서도 발끈하는 성질이 치밀어 올라 진희는 다시 말해 볼 심사로 고개를 털어 경인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순간 진희의 혀가 그대로 굳어 버리고 심장 내려 앉는 소리가 들렸다.

웃...고 있어?...

충격적인 표정으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어야 하는데.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는 듯 얼이 빠져 있어야 하는데...
경인은 진희를 건너다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얼음물처럼 냉정한 평소의 경인이 답지 않은 진심어린 그런 미소를 짓고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오히려 충격적인 사람은 진희였다.

[결혼...한다...]

음성도 나즈막하니 흔들림이 없었다.
그건 진희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너무나 빗나가고 있어 혼란스러운 것 또한 진희였다.
경인은 조그맣게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고른 치아가 보이고 그 사이로 레몬즙 향기가 스며 나오는 듯한 착각마져 들었다.
경인에게선 언제나 레몬같기도 하고 오렌지 같기도 한 향기가 나곤 했다.
아무렇게나 자른 듯 하면서도 질서정연한 경인의 층계식 생머리가 윤기나게 빛나 보이는 건 기분탓이리라.
그리고 검은 색 하이네크 스웨타가 늘 그렇듯 그녀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것도 진희는 신경 쓰였다.
가슴이 일순 두근거리자 진희는 지끈.입술을 깨물며 그런 반응을 이끌어 내는 경인을 노려 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었으나 그게 커피라는 것도 잊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뭐야/]

신경질적으로 진희가 묻고 말았다.

[비웃음이니? 아님, 안도의 웃음?...어느 쪽이야!]

그러나 경인은 대답대신 커피를 마시며 실내를 새삼 둘러 보았다.
창마다 레이스 달린 커튼이 하늘거리고 오렌지 계통의 벽에는 손으로 직접 그려서 예쁘게 색을 입힌 만화 주인공 같은 여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들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카드 천의 오렌지 색 소파는 안온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내 말 듣고나 있는 거야? 아님, 못 들은 척 하는 거니?]

진희의 말에 칼날이 섰다. 효과가 있는 걸까 경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한달여만에 와서는 불쑥 내뱉는 첫 말이 결혼해.라는 말이라니...]

피식 웃으며 경인이 감정없이 입을 열었다.

[결혼이란 게 골치 아픈 문젠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너한테 남자가 있었니? 그래서 소식이 뜸 했던 거야? 데이트 하느라고? 결혼 결심 하느라고?]

빈정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경인은 진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홍 진희! 넌 진짜 예측 불허야. 네 성격에 한달만에 결혼 결심해? 어떤 남잔지 대단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네. 하긴...사랑하는데야 한달이면 길다고 할 수도 있지...근데 그 남자가 갑자기 어디서 생겼니? 갑자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니 방에 떨어진 건 아닐테고...?]

익숙해진 경인의 빈정거림이었으나 매번 접할때마다 진희는 섭섭하고 또 섭섭했다.

[재주도 좋구나 홍 진희. 상대는 누구니?]

[남자!]

감정 억제를 잊은 탓에 그 말이 크고 날카롭게 퍼져 나와 진희는 당혹해했다.
경인은 냉정하게 웃었고 진희는 잡아 먹을 듯 경인을 노려보았다.

[당연히 남자겠지. 도도하고 지극히 여성적인 홍 진희양께서 여자랑 결혼할리는 없지 않겠니?]
[......]
[연애? 소개?... 말 안해도 알겠다. 후자겠지]
[......!]
[요즘 애들 말로, 뿅. 갔니?]
[......!]
[아! 그 정도는 아니더래도 네 피를 뜨겁게 만들 줄 하는 남자겠군. 그래?]
[그만해, 유 경인!]

이 사이로 밀어내 듯 진희가 경고어린 표정으로 나지막히 말했다.
그 반응이 반가운 듯 경인이 진희를 마주 노려보며 냉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