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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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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BY fragrance 2003-03-03

밤늦게 남편이 불쑥 나타났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반가왔다. 열흘간의 해외출장에 시차적응도 안 되었을텐데 그래도 피곤한 기색없이 와 준 것이 고마왔다. 대학교때 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여자가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되는 것하고 남편출세시켜 교수되는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는 줄 아니? 하드 커버의 두꺼운 책표지에 이름이 실리냐 아니면 머리말에 항상 곁에서 지켜봐 준 아내 ㅇㅇㅇ에게 감사한다고 실리느냐 그 차이라고."
주위에 모인 몇몇이 깔깔대고 웃었었다.
결혼을 해서 12년을 살면서 참 많은 고민과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치미는 울분들이 있었다. 결혼은 생활이었기에 양쪽 집 어느 곳에서도 한 푼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직장생활은 자아완성이라기 보다는 자아착취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내 자격지심이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이 기르는 일도 만만치 않았었고 직장에서도 내 양껏 욕심내어 일하기 힘들었다. 항상 몸은 파김치였고 일을 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그저 쉬고 싶은 하루하루였다. 우리나라 직장생활이 남자위주여서 정시퇴근을 할 수 없었던 것도 어려운 점 중의 하나였지만 빨리 벌어 자리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일하는 아주머니도 제대로 안 쓰고 버틴 것도 지금 생각해 보면 큰 원인이었던 것 같다.
남편에게는 내 고민을 일일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남편은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고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인지라 아마도 내 어려움 따위는 소위 말하는 헝그리정신이 부족한 데서 오는 무슨 타령쯤으로 들리는 모양이었다. 힘들 것 알고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에게는 분명 있었을 거다. 그래야만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명분이 선다고 생각했을 테고.
결혼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며 서로가 각자 나아가는 거라는 원칙론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적어도 내가 너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기대어 울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었다.
나는 결혼을 해서 살면서 남편이 내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없음을 알았다. 이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내 대학동기 중의 하나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냥 부부는 서로 불쌍해서 살아주는 것 같아. 잘 통하지는 않고 털터어놓고 이야기 상대는 될 수 없어도 그래도 어쨋든 착한 사람이니까그냥그냥 사는 것 같아."
나는 빈소에 찾아온 남편을 보고서 그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도 나타나 주니까 왠지 든든한 것 같은 느낌. 이것이 평생 두 사람을 묶어주는 질긴 끈일까 싶었다.
이모부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정은아빠가 잘 살았는가 보다. 화환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그만하면 훌륭한 인격이다. 장모님 마지막 가는 길 초라하지 말라고 여기저기 전화걸어 화환 보내게 한 것 보면 말이다."
조문객도 별로 없엇고 동생이 친구들과 빈소에게 자겠다고 해서 남편과 오빠 그리고 이모, 이모부 나 그렇게 다섯사람은 오빠의 좁은 원룸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려고 빈소를 떠났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먹어야하고 자야 하고 그게 세상 이치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