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친정아버지가 돌가가시기 전 다니시던 병원의 수녀님들의 따뜻한 말씀과 기도때문이었는지 천주교로 개종을 하셨다. 주일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셨고 영세도 받으셨기 때문에 오빠와 나는 근처 성당을 물어 엄마의 영혼을 위한 미사를 부탁드렸다.
제주도까지 친척과 지인들을 오라는 것도 폐가 될 것 같아 아버지의 묘가 있는 춘천공원묘지로 발인날 정해진 시간에 오라고 연락을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 남편은 해외출장에서 돌아오기 전 네게 우연히 전화를 했다.
"오늘 엄마 돌아가셨어."
"나는 발인전날 저녁에야 인천공항에 내리는데 ..."
"아버지 묘 있는 곳으로 발인날 직접 와요. 어짜피 돌아가셨는데 제주도까지 올 필요 없쟎아. 주말이어서 비행기표도 구하기 어렵고"
"내가 알아서 할께."
저녁이 늦어서야 남편이 어떻게 연락을 했는지 몇 개의 화환이 빈소에 도착했다.
엄마는 살아생전보다는 죽고 나서 더 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동생직장에서 그리고 오빠가 속한 몇몇 모임에서 화환이 도착하고 남동생과 동생친구 몇몇이 내려왔다. 엄마의 영정사진은 너무 고왔다. 오빠가 24살에 결혼했으니 47살의 시어머니였던 엄마는 남들이 누나라고 할 만큼 고우셨다. 그 결혼색때 옥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으시고 찍으셨던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정말이지 몇년만에 우리 삼남매는 한 자리에 모여앉아 엄마의 장례절차를 의논했다. 엄마가 입원하시고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다시는 안 보고 살겠다고 몇번이나 마음을 다져 먹었지만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우리는 그렇게 모여앉았다.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보니 시신을 옮기려면 비행기좌석을 서너개 예약해야 한다고 했다.
"오빠, 죽은 다음에 그런 복잡한 절차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래 알아보니 화장을 해서 유골항아리에 넣어 항아리를 조그마한 석관에 넣어 묻으면 된다더라. 그렇게 하자."
"그래 오빠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합장묘 사 두었으니 아버지옆에 묻어드리면 되겠네."
동생은 힘없이 말했다.
"그렇게 하자구?"
다음 날 아침 이모와 이모부가 도착하셨다. 엄마까지 돌아가시고 나서 그나마 내가 친정이라고 찾아갈 곳은 이모댁뿐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친정과 내 관계가 달라질 리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떨어진 고아가 된 기분이었다.
이모와 이모부가 도착하시고 나서 입관을 했다.
장의사가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병원에서 그리고 퇴원하셔서 고통을 겪으실 때보다 엄마의 시신이 훨씬 평온해 보였다. 무섭지도 않았다. 삶과 죽음은 역시 경계가 없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영혼이 긴긴 싸움 끝에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남동생은 엄마의 얼굴을 만지며 울었다.
둘째 올케는 몸이 너무 아프다며 빈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도 빈소에서 나와 이모를 만나는 일이 마음 편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은 되었지만 나는 문상객 접대를 위해 혼자 뛰어야 했다.
오빠가 큰 올케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라도 보내서 절을 시키라고 전하라고 했다.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절은 해야하지 않냐고.
전화를 받은 큰 올케는 아이들은 데리고 와서 조문을 했다.
오빠는 큰 올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큰 올케는 연신 오빠 눈치를 보았다.
"아가씨, 사람이라도 사지 혼자해요." 하면서도 슬그머니 아이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