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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다며 서운함을 토로한 A씨의 사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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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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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BY khl7137 2002-12-15


영과 나의 사이가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을때 나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복학생 선배였다. 시원스런 스포츠형 머리에 입가에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 보기에도 즐거워 보이는 남자였다. 선배가 내게 관심을 보였을 때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쩔수 없는 나도 여자라는 사실앞에 뜨끔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머리를 한번이라도 더 빗게 되고 거울앞에 서는 시간이 조금은 더 길어지고 옷차림을 한번더 보게 되는 현상은 나에게 있어 낯선 것이었다.

내가 선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건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솔직히 태민이 군대 가면서 한 말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고 하루에 적어도 두어번은 떠올랐으나 선배가 나타나고부턴 태민이 내 관심밖으로 밀려난 건 사실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서 다정스레 책을 보거나 둘이서 커피숍에 앉아 음악에 취해가는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갔고 집앞에서 가벼운 키스를 나누는 사이로까지 갔을때 나는 영이 떠올랐다.

내 시간에 쫓기고 영은 영대로 시간이 나지 않았다는 건 핑계였다. 얼마든지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영과 나였다. 그런 우리 둘이 소원해진 건 내 잔소리가 영에겐 귀찮아서 일테고 나는 수시로 바뀌는 영의 남자관계가 짜증나 잠시 서로를 피하고 있었는지도...

영이 학교에 모습을 드러낸 건 선배와 내가 동아리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불쑥 모습을 드러낸 영이 놀랍지는 않았으나 선배와 있는 모습을 들킨 것이 어쩐지 나로서는 어색했다.

[어쩐일]
[내 두번째 마누라한테 너무 소홀히 한 것 같아서]
[알긴 아는구나]
[근데 둘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
영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곧바로 물어왔다.
[보통 사이는 아니지 그렇다고 특별한 사이도 아니야 아직은]
[내 마누라한테 남자가 생겼다니...괜히 질투나네]
나는 그냥 웃어 넘겼다.
[어디까지 갔어? 자봤어?]
[관심 꺼 그 단계는 아니야]
[그럼 키스?]
나는 웃음으로 답을 주었다. 영이 휘파람을 불며 나를 꽉 조여 안았다.

사람의 관계는 참으로 알수가 없다. 더구나 남녀관계는 종잡을 수가 없다.

내가 영이 보고 싶어했던 책을 들고 주희네 집에 갔을때였다. 가급적 나는 주희와 마주치는 걸 피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날은 할일도 없었고 심심하던 차라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영은 없고 주희 혼자 방에 배를 깔고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들어 가기를 주저하는 나를 알기나 하는 듯 주희는 들어오란 소리도 없었다. 책을 전해주란 소리를 하고 돌아서는 내게 주희가 한마디 했다.
[너 연애한다며?]
그 순간 머리속이 쏴.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 문제를 영이 주희에게 하지 않을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알아야했다. 영이 나보다 주희를 더 아끼고 사랑했음 했지 덜하지 않다는 걸...
떨떠름함 기분을 안고 내리막길을 돌아 나오던 나는 앞에서 오는 한쌍의 남녀와 부?H쳤다. 길을 터주려고 한 나는 놀라서 숨을 들이 쉰 채로 굳어 버렸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남자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인 여자.
웃고 있는 영의 어깨를 다정스레 감싸고 있는 기철 선배.

한순간 나는 어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이 현실임을 가르쳐 주었다. 부리나케 손을 내리는 선배와 입을 벌린 채 있는 영. 무어라 말을 하려던 영은 내 표정에 체념한 듯 이내 입을 다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고 선배는 변명을 하려 입을 뗐다.
[진아 내가 설명할께]
설명은 내가 본 걸로 이미 결정난 것이다. 나는 차갑게 선배를 노려보고는 그들을 외면하고 집으로 왔다.

온몸이 떨려왔다.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데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잠이 올리 만무했다. 배신감보다 분하다는 느낌이 먼저였다. 나는 내 몸속에 내가 모르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복수가 먼저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복수란 사랑하거나 증오할때 생겨난다.

며칠을 나는 선배의 시선을 무시하고 대화를 거절했다. 영의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둘을 그냥 내버려 두자니 내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분노로 복잡하던 머리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나는 선배와 영을 같은 자리에 불렀다. 선배와 영은 선처를 기다리는 범죄자같은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진아...]
[선배는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남자였다는 걸 알아요?]
선배가 입을 열기전에 내가 먼저 선수쳤다.
[넌 내가 가장 사랑한 친구였다는 거 알아?]
어느새 난 선배와 영에 대한 감정을 과거형으로 돌리고 있었다.
영의 얼굴이 어둡게 어둡게 그늘졌다.
[누가 먼저였어]
[니 친구가 먼저 전화했어]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듣고나니 그 충격은 생각보다 크게 나를 내리쳤다. 눈물이 핑 돌것같아 얼른 눈을 한번 깜빡였다.
[진아 미안해 니 친구라 어쩔수 없었어]
[어쩔수 없었던 사람이 다정하게 어깨를 안아요?]
선배의 변명에 나는 냉소적으로 쏘아붙혔다. 선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처음엔 충동적이었어]
영이 입을 열었다. 애절한 음성으로
[진아 난 니가 만나는 남자라면 내가 만나온 남자들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질투심도 났고...한번 만나보자는 심사로 전화했는데 의외로 쉽게 나오더라 널 사랑하냐고 묻자 그냥 친한 후배라고만 했어 넌 이 남자한테 진심인데 이 남자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화가 나더라 별수없는 남자라는 거...너한텐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는 거...]
[거짓말이야 꼬리친 건 너야]
[널 진에게서 떼어낼려고 그런거다 너같은 놈은 언제든 양다리를 걸치려고 할테니깐 넌 진에게 어울리지 않는 놈이야 이 나쁜 놈아]
[뭐 이런 게 다 있어]
[싸우려면 나 없는데서 둘이서 싸워]
내가 목소리를 높혔다. 마치 사랑싸움 하는 연인들 같은 꼴이었다. 선배와 영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적은 항상 가까이 있다는 말 알아?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등져도 영이 너는 아닐거라고 믿었어 너에게 느낀 배신에 비하면 선배의 배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니가 나한테 배신을 안겨주다니...여자의 우정은 모래위에 새긴거와 같다더니 지금 이 순간 딱 어울리는 말이다. 그렇지? 하지만 덕분에 사랑의 감정이 생기기전에 선배의 진면목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진아...]
영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남들 앞에서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 영이가 말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영에게 어떤 동정도 연민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엔 내 상처가 더 컸으니깐.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는 이유가 없지만 미워하는데는 이유가 있어 널 미워하지는 않아 다만 마음이 아프네 무진장]
[진아 제발...]
[넌 너를 가장 사랑하는 친구 하나를 오늘 잃었어 그걸로 용서를 대신 할께 다시는 보는 일 없을거다]
[진아!!]
울음을 삼키며 영이 나를 찾았으나 돌아보지 않았다.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포장마차 구석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가슴속 상처가 톡톡 소리를 내며 하나 둘 터지는 듯 했다. 사랑에 대한 환상과 우정에 대한 신뢰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걸 나는 보았고 경험했다. 그러나 영의 눈물이 마음에 걸렸다. 영이 내게 보여준 사랑과 정성 믿음 그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더 나는 영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남자가 여자에게 줄수 있는 건 웃음과 눈물이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에게 얻는 건 한 가지가 더 있다. 욕망에서 비롯되는 환희. 그런 까닭에 남자는 사랑없이도 여자를 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자는 사랑없이는 몸이 열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자는 약한 것인가!
어쨌던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나는 상처를 입었다.

마음의 상처는 싸 안을수록 커지는 법이다. 그냥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치료약인 것 같았다. 아프면 아픈대로 쓰리면 쓰린대로...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건 영의 빈자리였다. 불쑥 불쑥 나타나 무언가 쥐어주고 감싸주던 영의 존재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영의 존재는 희미해지지 않았다. 작은 구멍이 점점 더 크지면서 가슴 한 쪽이 뻥 뚫린 듯 휭했다. 쓸쓸했다. 허전했다. 공허했다. 분명 선배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내가 나를 추스리지 못할 때 교수님이 한 출판사를 추천해 주셨다. 그리고 태민이가 때맞춰 제대를 했다. 잊고 있었던 태민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