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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의 뇌진탕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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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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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BY 올리브 2002-11-06

** 기억의 초상 **


<그>

뱃고동소리가 바람을 타고 오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에 묻힌다.
아이들의 얼굴은 내일 소풍에 대한 기대로 사뭇 들떠있다.
김밥,음료수,과자,돗자리.....
그들의 목소리가 비릿한 바다내음에 스며들며 내 가슴에 박힌다.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 자. 이돈으로 누나랑 과자 사먹어 "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보고 싶지 않다.
달음박질치며 가게에 가서 과자를 하나 짚는다.
' 이게 휠씬 나아...소풍가면 뭘해...다리나 아프고...
과자 먹고 노는게 더 낫지...그래...이게 휠씬 나아....'
달콤하게 입안 가득 퍼지는 과자의 느낌만 생각하려고 한다.
아무 생각도 하면 안된다.
눈을 감고 계속 과자를 입으로 갖다 댄다.
고무 냄세가 난다.
정신을 차린다.
'졸면 안돼...빨리 일 끝내고...엄마한테 가 봐야 돼....오늘이 월급날인데...
엄마 약이라도 사드려야지...근데...친구 녀석들은 여학생들이랑....
텐트 가지고 ...놀러간다고 했는데....휴~....난....아니지....이제 이것만...
끝내면 퇴근이네...이번달은 잔업까지 다 했으니.....학비도 내고....다행이다..'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워진다.
그런데 자꾸 눈이 감긴다.
너무 잠이 온다.
멀리서 파도소리가 들린다. 파도 소리가 점점 커진다. 몸이 자꾸 흔들린다.
속이 울렁거릴 정도이다. 괴롭다.눈을 떠야 할텐데...
그때 누군가 심하게 어깨를 흔든다.
"빨리 일어나. 태풍이야....배가 항로를 이탈하고 있어.
일등 항해사가 자네 찾고 있어."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은 입을 벌려 배를 삼킬 기세이다.
몸을 제대로 가눌수가 없다. 빗줄기가 얼굴을 내리친다. 눈을 뜰수가 없다.
' 제길...이번만 타면...끝인데...어느 정도 돈도 모이고...그럼...되는데..
안돼!....여기서 죽으면...너무 억울해!....싫어!'
문득 손에 뭔가가 잡힌다.
줄이다.
' 살아야해....어떻게든....배고픔도 가난도....싫어...이제 행복해야해....
살고싶어!'
눈을 뜨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눈물이 흐른다.
' 눈을 떠야해! 의식을 놓으면 안돼! '

" 따르릉!! "
순간 눈을 떴다.
시계의 알람소리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꿈이였구나...
지난 시절은 낯선칩입자처럼 나에게와 잠자던 나의 불행을 이렇게 일깨워주곤했다.
어둠속에서 검은 날개가 춤을 춘다. 열어논 창문때문에 커튼이 날리고 있었다.
침대에서 내려 창가로 다가간다. 창문을 닫으려다 하늘을 봤다.
아직 하늘은 새벽의 푸른빛조차도 없다.
오리온 자리가 유난히 눈에 박힌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내가 유일하게 찾는 별자리야. 겨울이면...저기 보이지?
네별들이 사각형을 이루고 그 안에 별 하나가 있는거. 저게 오리온 자리야.
그리고 그 옆에 알파벳 더블유 모양. 저게 카시오페이야 자리야.
겨울이 오면 난 습관적으로 하늘을 봐.
오리온과 카시오페이야를 찾기위해서...."
이제 난 습관적으로 밤하늘을 본다.
내가 보는 저 별자리를 그녀도 볼것같아서...
창문을 닫는다.
잠귀가 어두운 아내는 평온하게 자고있다.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순간 그녀였으면...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안타까움과 자책이 밀려온다.
하지만 마음 밑바닥에 나의 배신에 최대의 변명거리가 잔인하게 고개를 든다.
'아니, 배신이 아니야. 우리 처음부터 같이 살면 안되는거였어.
그때 우리 그만둬야했어. 그래 내 잘못이야. 끝까지 버텨야했는데...
하지만 우리 둘다 이젠 그만둬야해.
차라리 다른 사람 만나서 사는게 당신한테도 더 나을지도 몰라.
마음없는 나랑 살면서 사랑못받느니...다른 사람에게서 사랑받으며 사는게 나을지 몰라.'

거실로 나와 담배를 한대 물었다.
잠자는 동안 정화되었던 폐는 강한 독성의 칩입자를 공격에 방어를 취해보지만
계속되어오는 공격에 잠시 방어를 멈춘다.
머리가 띵하다.
담배 연기가 천정을 타고 올라간다.
그때처럼 난 힘없이 천정을 보고있구나.

결혼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만났다.
6년 사귄 첫사랑과 헤어진 후 여자들과의 만남은 내게 그리 큰 사랑의
감흥을 주지못했다. 아니, 사랑자체가 없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그냥 만나고 즐기고 마음에 맞으면 잠자리도 하고 그러다 시들해지면
헤어지고 또 만나고....
한번도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진적은 없었다.
이상하리만큼 여자들이 곁에 많았다.
하긴 여자들이 많은 회사에 근무한 영향이 컸겠지.
여자가 끊일날이 없었다.길게는 4개월 짧게는 1달.
떠나도 아쉬운것도 없었다. 빈자리는 언제든지 채워지니까.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그런 생활도 시들할 무렵
평소부터 안 좋던 어머니의 위가 더 말썽을 부렸다.
아버지는 결혼을 재촉했다.
별여자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사무실에 일하던 여자가 눈에 띄었다.
말도 없고 참한 인상이었다.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였다.오히려, 결혼 상대로는 적합했다.
생활력도 강하고 차분하니...
만난지 5개월이 지나면서 양가 부모님 상견례도 하고 날까지 잡았다.
예식 한달을 남겨놓고 청접장을 돌리려고 인쇄소를 나서던 날.
우연찮게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 뭐해? "
"응. 잘 지내냐? 나 장가가볼려고 "
"오호 그래? 이제 바람둥이 생활 접을려고? "
"뭐? 이녀석이 "
"하하 아니야 형. 어 누구야? 전에 같은 사무실 아가씨 아니지? "
" 왜? "
난 그때 차라리 미리 말했어야 했는지도모른다.
그럼 더이상의 이야기도 지금까지의 갈등도 없었을지도...
" 형. 아니지? 천만다행이야 잘 끝냈어. 그 아가씨 형은 잘 몰라도
형 오기전에 시끄러웠었어.
유부남 사궈가지고 회사에 부인까지 와서 난리가 아니였어.
뭐 자기도 알고는 그랬겠어...그래도....."
후배의 소리가 아득해진다.
그리고나서의 모든일이 뿌연 안개 속을 헤쳐온듯하다.
아내의 울음섞인 소리도
지난일이니 모두 잊어달라는 목소리도
그럴수없다는 나의 말에 혼절하는 아내의 모습도
시린 마음을 안고 결혼식을 끝내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자책에 찬 나의 모습도
하루하루 의미없이 덤덤하게 보내는 결혼 생활도
이제는 빛바랜 사진속에 박혀있는 사진처럼 모든것이 아득했다.
나 역시 숫총각이 아니였기에
아이들 낳고 가정에 충실한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의 아픔은 점점 무디어가고 나의 행복 역시 조금씩 멀어져가고 있었다.
깊고 어두운 바다 밑바닥의 모래에다 모든 감정들을 묻어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혼 한달만에 다른 여자를 안았다.
또 다른 방황의 시작이었다.

어느날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나를 보면 항상 마음이 비워진것 같이 보인다고
그 빈 마음을 채울려고 여자들을 곁에 두는것 아니냐고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릴적부터 항상 허기졌었다. 몸도 마음도...
배가 고픈건 얼마든지 참을수 있었다. 어린시절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하지만 마음이 쓸쓸해지는건 정말 참기 어려웠다.
그래서 완벽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삶에서 누리지못했던 것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런데
삶이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행복이란 그리 쉽게 가질수 있는게 아니라고 믿었다. 나같은 놈에겐...
살아갈수는 있었다.
아니, 살아가야했다.
한 가정의 가장이고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책임은 져야한다고 믿었다.
어떻게든 세월을 보내고싶었다.
별다른 삶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굳히며 나를 방치하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호감가는 상대가 생기면 만났다. 그리고 아니면 헤어지고
그러다 "채팅"을 접했다.
자판을 익히기에 채팅만큼 빠른게 있겠는가?
여러사람들을 만나고...
하지만 사람을 만날수록 관계를 가질수록 마음은 자꾸만 비워졌다.
허무의 나락으로 빠지는듯 했다.

그러다 '꼬미'를 만났다.
그나마 긴 시간을 두고 만난 사이였다.
시작부터 다른 그녀와 나의 사이는
처음부터가 몇조각 없는 퍼즐맞추기와 같았는지도 모른다.
무조건적으로 잘해주는 그녀
어릴때부터 갖고 싶은거라면 학교를 빠져 아르바이트라도 해서라도 가져야 하는 성격
유난히 자존심이 세어 내 앞에 눈물 한번 보이지 않았던 그녀
끝임없이 내가 혼자되기를 바라던 그녀
나와의 잠자리가 욕구의 발산이라고 생각하던 그녀
이렇듯 난 그녀의 사랑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게 그리 쉽게 시작하지 않듯이 이별또한 쉽지가 않지아는가.

그녀를 만나면서 난 한번도 가정을 버린다는가하는 모험을 생각지 않았다.
호감이 가고 잠자리도 할만큼 그녀를 사랑한건 사실이지만
전부를 걸기엔 나의 사랑은 아직도 이기적인 구석도 있고
내 시린 마음을 채워주기엔 부족한 사랑임에 난 주저없이 그녀를 보낼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화려한 이별식이 아니였음 우리는 지지부진한 관계를 쉽게 끝내지 못햇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관심에 상처받는 그녀를 보며 난 이제 그녀를 달래주는것을 포기했다.
지쳤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차안에서 그녀는 집열쇠를 돌려달라고 했다.
그래 그것으로 끝을 냈어야했다.
너무 모질게 말한 나자신을 책망하며 그녀의 집을 찾아간것도
안 나오려는 그녀를 끝까지 나오라고 한것도
어색하게 나오는 그녀를 밀치고 그녀의 방에 들어선것도
흐트러진 침대위에 낯선남자를 본것도
당황하면서도 냉정한 그녀의 얼굴을 본것도
모두가 잘못이였다.
이후에도 나는 그녀와의 이별보단 아름답지못한 이별의 마지막장면에 두고두고 상처를 받았다.
우습게도 난 '꼬미'를 보내고 차라리 이혼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