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의 잠을 설친 이후로 나의 몸 상태는 극도로 나빠졌다.
열이 오르면서 머리가 무겁고 속도 매스껍고 어지럼증까지 나타 났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약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회사를 가는지 마는지 얼굴만 비추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들러 봤지만 뚜렷한 증상이 없고 스트레스와 과로인 것 같다고만 했다.
무기력증이 또 도지는 건가. 때론 나같이 막사는 사람에게도 깊은 수렁이 있게 마련인가보다. 너무도 인생을 혹사하며 살다보니 어지간한 일에는 충격을 받거나 가슴을 보이는 일이 없지만 요즈음 내가 접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스스로의 인생 과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었던 것같다.
부모님 산소에나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차를 몬다.
대화동을 지나 와동을 지나면 신탄진이 나온다. 신탄진은 새여울이라고 하는 동네다. 봄이면 법꽃 축제가 유명하고 한시절을 구가 했던 담배인삼공사가 있다. 이제는 옛촌 티를 벗고 엄연히 대전시에 편입된 도시지역이긴 하나 아직도 재래시장이 5일마다 열리기에 촌노들을 통하여 향수를 맛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사무소를 앞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면 대청댐 가는 길이다. 언제 들어 섰는지 여관들이 운집해 있다. 세상 어디든 사람 사는 곳에 잠자는 곳은 있어야 겠지..그래서 저 많은 여관마다 잠을 자나보다. 더우기 나같은 성의 거렁뱅이들이야 숨어서 구걸을 할 수 있는 좋은 장소가 아닌가....
이현 고개를 넘어서니 낮익은 나무들이 많다. 사람은 다 떠났지만 산은 그대로 대청댐을 깔고 앉아 물을 내고, 나무는 여전 거기 서서 역사를 지키고 섰는데 나만 나이가 들어 쓸쓸히 고향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가는구나.
산새들이 날아 다닌다. 대청호반의 물속에 내 고향이 있었는데....그래도 우리가 살던 청개동에는 집을 옮겨 짓고 사는 몇몇의 집들이 남아 있고 요즈음은 도회지 사람들로 차츰 인가가 늘어 나고 있다는 소릴 들은적이 있다.
아버지 어머니 산소는 합장이다.
일년에 한번씩 벌초때만 찾아 왔지만 이렇게 불쑥 온건 처음이다. 와 보았자 홀아비 몰골에 몽달귀신 되게 생겼으니 무슨 면목이 있어 찾아 오랴.....
갈참나무 바스럭거리고 솔만 푸른 산에 그래도 외롭지 않게 함께 누우신 부모님 산소를 난 빙빙 돌았다. 어머니의 인자하신 눈과 아버지의 꾹다문 입이 떠오른다. 마을 아래를 처다보니 옛그림이 그려져 온다. 골목길에서 딱지치고 자치기 하고 놀던 친구들 다 어디가 사나..
강통차기, 진도리하며, 눈사람 만들고 쥐불놀이 하던 형아들은 지금 무얼해먹고 사나....
저쪽에 예배당이 있었는데...
<<<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 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왜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하나님께 그렇게 날마다 기도를 드려요?"
내가 주일학교 담임인 은희 선생님에게 그렇게 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기도를 하늘로 나르는 천사가 있지.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그 기도는 하늘나라에 올려진단다. 기도가 쌓이고 쌓여 때가 되면 그 기도가 응답이 되는거야. 너도 소원을 계속 빌어 봐. 하나님이 네 소원을 들어 주실거야.."
내가 교회에 안가는 날은 그렇게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던 은희 선생님은 지금 어디 계실까?>>>
생각이 여우 꼬리가 된다. 윤식이 놈은 그 길로 어디로 갔는지 장비도 거둬가지 않고 소식도 없으니 어디가서 잘못 되지나 말아야 할텐데..옥순이는 지금 무얼하고..민아는 잘 살겠지... 난 지금 무얼하고 있는건가.
아버지, 어머니, 너무 살기가 힘들어요. 힘들어서 왔어요. 죽을 죄를 지었지요 제가...제사밥 한번 떠 놓은적 없고 그냥 그렇게 나이만 찻네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릴면 될까요...
추억을 차곡차곡 다 씹어보고 그려 보아도 마음이 잔잔해지지 않는다.
돌아가야지..
산아래로 내려와 차의 시동을 건다.
전화가 온 모양이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낸다.
"여보세요.."
"야, 나야 윤식이..."
"어떻게 된거야 ?"
"너 지금 어디냐?"
"나, 묻지마.."
"어딘데..?"
"응, 청개동 산소에 왔어.."
'뭐, 지금 청개동에 있단 말야.."
"그래.."
"와, 무지하게 가고 싶네.."
"와라.."
"오늘은 못가고 며칠 사이에 한번 들러야지..."
"왜? 뭔일 있어?"
"응, 나 정리하기로 했어. 지금까지 살아온거 다 정리하기로 했어."
"......"
"나 다음달 2일날 중국 간다. 선배가 거기에 대형 음식점을 내는데 도와 달라고 해서..."
"야, 그럼 아주 가는거야?"
"글쎄, 당분간 거기서 눌러 살 생각이야."
"그래..서운하긴 하지만 잘 됐다. 근데 너 우리집에 두고간 장비는 어쩔래?"
"아, 그거 내일쯤 회사에서 사람을 보낼거야. 그때 주기만 하면 돼"
"야, 가기전에 한번 만나자..."
"알았어.."
다 떠나는구나. 나는 이제 어디에 몸을 붙여야 하나..유일하게 다가오는 얼굴 하나 있다.
별장여자 순미의 미소다.
다음엔 부모님 산소에 꼭 같이 와야지..난, 산소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다음에 꼭 짝을 찾아서 함께 오겠다는 다짐인지도 몰랐다.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나 보다. 회사로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