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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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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이와 순미


BY 김隱秘 2002-12-23

0000 골목길 여자 미숙이 00000

H대 산책을 마치고 육교 계단을 내려오는데 상여 행렬이 멈춰서 있다.
저 여자가 누구더라....
소복을 입은 여자는 바로 민아의 친구 미숙이라는 여자였다.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어느 이상한 하루 다단계 판매회사에 따라 갔다가 뒷시간을 내서 강원도 평창의 가산 이효석의 생가지를 들러 왔던 그 여자.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듯이 흐븟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정말 불후의 명표현이 생각이 났다. 문학관과 생가지, 당시에 발표된 잡지와 신문등이 전시 되었던 곳을 그녀와 연인처럼 둘둘거리고 돌던 기억이 난다.
그래, 남편이 죽은게로구먼. 몇년째인가 식물인간으로 산다던 그 남편의 영혼이 이제 본향으로 돌아 간게지...
울음도 없는 상여 행렬은 아마도 집근처를 돌고 가는 모양이다. 북어포와 소주잔이 보이고 많지 않은 문상객들 속으로 나도 들어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사람이 죽는다는건 누구나의 철칙이건만 사람들은 영원을 살 것처럼 기고만장 하다가 어느날 닥친 강 앞에서 어쩔줄 몰라 하잖는가....누가 그랬지, 태어 나면서 부터 우리는 이미 죽음의 표를 예매한 상태라고....

그동안 민아와 이모 그리고 회사를 전전하다가 보니 골목길 여자의 생각을 왜 한번도 안한걸까..무언가 내게 하고픈 일이 많다던 그녀였는데...
내가 글을 쓰면 돈을 대준다고 했고, 책을 내면 자기가 앞장서 준다고 했던 여자인데...
조금은 억세뵈도 무언가 남에게 손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여자였는데...

남편을 묻고 돌아오는 여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정신이 혼미해서 한동안 갈팡질팡 하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사람도 있고, 충격을 이기지 못하여 우울증에 시달리다 결국 병들어 버리는 여자들도 있다지 않은가..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일이 무엇일까.. 배우자가 죽는 아픔이 그 으뜸이 아닐까.. 날마다 얼굴을 대고, 살을 섞고 생사를 같이하며 아이를 낳고, 바람이나 구름같은 세월 속에 손잡고 같이 살다가, 어느날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져 기약 없는 이별을 한다는 자체가 너무도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이 아니겠는가..

결혼을 하지 않고는 인생을 모른다고 하던 친구의 말이 생각 났다. 유언을 들어 보지 않고는 사람의 존재를 알 수 없다던 친구, 아버지를 산에 묻지 않고는 아버지의 맘을 모른다던 친구, 배우자를 떠나 보내고 홀로 방을 지키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결코 사랑의 참뜻을 알 수 없다던 친구, 명호라는 철학과 친구가 생각 난다. 어디가서 무얼 해먹고 사는지....

상여 행렬이 요랑잡이의 딸랑딸랑 신호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머지 않은 공원묘지로 가는 모양이다. 장의사 차가 움직이며 그 여자 미숙이의 울부짖음이 들리지는 않지만 보여 왔다. 다시l는 볼 수 없으니 얼마나 서러울까.. 구절양장 인생길에 만났다가 헤어지는 인생의 회자 정리인가.
나도 서러웠다. 보낼 사람도 가야할 사람도 오직 나 뿐인데.. 죽는다고 울어줄 사람도 없고, 친구놈들 와서 고스톱 치다가 소주나 축 내겠지.. 한많은 인생을 홀아비로 살다가 씨하나 못 남기고 그냥 몽달 귀신 되었다고 혀를 차겠지....

이날 이후 난 골목길 여자 민아 친구 미숙이를 보지 못했다. 누군가 그러던데 다단계에 빠져서 열심을 내다가 아들을 따라 경기도 어디로 이사 갔다는 얘기도 있고..여하간 나와 그녀의 인연은 그 아침 상여 소리로 끝이 난 것이다. 소매 끝을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어디 가든 인생의 고통의 멍애를 벗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니 내 맘이 괜히 슬퍼지고 봉평의 가산 이효석 생가를 돌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그녀의 모습이 한동안 뇌리를 맴돌았다.
떠나면 보고 싶은게 사람 맘이라더니 놓친 고기는 아니라도 그녀가 왜 보고 싶지..알 수 없는 서리가 가슴에 내리고 이제 겨울이 점점 깊어지면서 난 마지막 남은 잎새를 발견하려 난 지나온 날들을 더듬어 갔다. 담배 연기가 하늘로 오르며 나의 심정처럼 산발을 한다. 넌 연기야. 안개야. 지나가는 나그네야. 왔다가 가는게 인생이야. 기웃거리다 가는 탕아여. 이젠 좀 정신을 차리지 그래..
어디선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았다. 난 뒤를 돌아 봤다. 그러나 거긴 아무도 없었다. 갑자기 마음 속으로 둔곡리에 있는 별장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얼굴은 못났지만 정말 마음이 너그러워 보였던 별장여자가 왜 지금 생각 나는지 나도 몰랐다.

" 참 좋은 여자거든요."이사님을 제가 잘 얘기해 뒀거든요. 가끔 외로우시면 전화하세요. 그냥 같이만 있어도 청소가 되는 사람이예요.."

란같은 여자가 하던 말이 생각 난다. 내가 그 여자에게 끌리고 있는걸까?
못생긴 여자는 유죄라고 껄껄대며 술을 먹고 객기를 부리던 나와 윤식이의 술자리가 생각 난다. 맹랑한 객기였다. 교만이었다. 제 주재도 모르면서 늘 사람들은 과대포장을 하지 않던가. 엄청난 사람처럼 하늘이 어떠니 땅이 어떠니, 하늘아래 새 것이 없는 걸 아느지 몇가지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놓고는 위대한 업적이라고 하는게 인간 아닌가. 철사 동가리 하나도 이미 만들어진 우주의 물체가 아니면 만들 수 없는 것이련만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며 자기를 내세우는 게 인생의 어리석음 아니던가..
다시 말하지만 정말 별장 여자가 보고 싶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난 담배를 다시 하나 꺼냈다. 육교아래에 추리닝과 잠바를 파는 노점상 남자가 서서히 물건을 걷고 있다. 곧 하루가 마쳐지는 시간이 되려나 보다. 혼자인 사람들의 외로운 밤이 서서히 다가 오겠지. 무얼 하여야 잘했다고 할까....정말 즐거운 것은 없을까.? 찌꺼기가 없는 참 즐거움은 무얼까..?

0000 방황하는 봄 0000

방황하면서 두어달이 지나 갔다. 봄이 열리고 있었다. 개나리가 온통 노란색으로 사람들을 깨우고 곧이어 살구꽃이 피고 진달래가 피겠지. 심신산천의 계곡이 녹아 흐르고 버들 강아지 망울이 완두콩처럼 달랑거리겠지.

연구소는 점차 더 번성하여 갔다. 새로운 신약이 곧 나올거라며 유상증자를 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있는 성개선 증강제의 개발이 실용단계에 와 있다는 보고가 신문에 심심잖게 실리고 명박사의 연구열과 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책자도 사보로 나왔다.
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란 같은 여자는 가끔 나를 불렀지만 늘 상냥하고 무언가 줄듯 말듯한 말로 기대하게 했지만 아무 것도 내놓는 히든카드(?)는 없었다.
오늘은.. 하고 불려 가면 정말 무언가 긴장된 순간을 만들고 돌아 오곤 했는데 이런 일련의 일들이 작위적인지 아니면 그가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 되었다.

둔곡리의 별장 여자를 만나러 가끔 갔지만 작품을 보는 외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올 가을쯤 개인전을 연다고 했다. 갈 때마다 따스하고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그녀의 태도 속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 처럼 대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신입사원 때처럼 공주연구소로 미팅도 없었다.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보이고 아마도 그들이 내가 하던일을 대신 하겠지. 아니면 이제 실험은 다 끝났는지도 몰랐다. 또한 그러한 일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자꾸 짐스러운 작태로 여겨지는건 몸이 삭고 사람이 지친 탓인지도 몰랐다. 점차 진로에 대해 이젠 결정을 내려야 겠다는 생각이 쌓이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무얼 해 먹고 사나...통장을 보니 윤식이가 넣어준 돈이 아직은 견딜만큼 있고 회사가 넣어준 돈도 만만치 않다.
변화가 없는 다람쥐 챗바퀴 도는 생활이 나에겐 워낙 뒤틀린다.
여기 저기 이것 저것 생각해 본다. 나만 덩그러니 떠 있는 느낌이고 또 사실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는 그저 세월 베어먹기 삶을 사는 어리석음이 보인다.

외로움의 강도가 점점 커지는 것은 늙는 징조인가. 한숨이 자주 나온다.
여자를 봐도 그 전 같지 않다. 술을 먹어도 그렇다. 광란이 없으니 미치지도 않는다. 그저 귀찮고 세상 한 복판에 나 혼자 서럽게 서 있다는 생각뿐이다. 한해가 다르다더니...철이 드나?

산을 보니 진달래가 활짝 피었음직 하다.
오늘은 둔곡리로 가야지. 마음이 먹었다.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란같은 여자를 바꾸라고 했다.

"사모님, 접니다."
"네, 이사님.."
"오늘 저 둔곡리 별장에 가려고 하는데요.."
"출근 안하시고..?"
"네, 회사가도 별로 할일도 없고..그만 둬야 할까봐요.."

갑자기 상대방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요즘 좀 서운하게 했나보네.."
"제가 지금 거기로 차 보낼께요. 다녀 오세요. 잘되었으면 좋겠네요.."
"네, 잘 되다뇨?"
"그 친구가 그랬어요. 참 좋으신 분이라고.."
"무슨?"
"네, 그애가 요즘 계절앓이를 하거든요. 봄을 많이 타는 아이에요. 가셔서 위로좀 해 주시고
과감히 말씀좀 하세요. 그 애가 그랬어요. 여자가 먼저 말할 수 있느냐구요.."

그럼, 그 여자가 나를.....

"본래 남편하고 정 좋던 여자들은 혼자 못살거든요. 그애가 그래요. 이사님이 희생좀 하시면안될까요?"

나는 전화의 말을 그냥 듣고 있었다. 할말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선이 좌로 우로 왔다 갔다 했다.
무언가 엉키고 설킨다. 무어라 표현하기 곤란한 지역이 나타난다. 섹터가 여러개 생겼다가는 지워지고 다시 생겨나고....
그럼 그 여자가 나와 남은 여생을 살자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지난번 언젠가 그가 한 말이 떠 올랐다.

"이사님, 맘이 참 약하신가봐요. 술을 한잔 드리까요 독한걸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여자는 나를 처음부터 사별한 남편의 후계자(?)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가 남겼던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들이 자꾸 재생 되어 왔다.

전화가 온다. 그냥 내려가면 되지...차를 보낸다더니..
회사에서 보낸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회사는 나를 위해 왜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운이 좋아서겠지...

"이사님, 타세요. "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기사가 아닌 앳된 아가씨였다. 스므살은 됨직한 현대적 몸매를 갖춘 아가씨다. 늘씬한 몸매가 나의 눈과 몸을 당황케 한다.
이런 여자를 왜 보내..마음이 웬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어여쁜 아가씨와 둘이 언젠가 가 보았던 아름다운 용담댐 길을 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났다.

어디로 가야하나..마음에서 둔곡리와 용담댐을 저울질 하는라고 바쁜데 우뇌에서는 아마도 둔곡리로 갑시다 용담댐으로 갑시다라고 서로 우기고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황당한 남자의 습성이 되살아 나는 걸 아는지 태양 볕이 살 속으로 파고 든다.
나는 순간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는 왜 왔어?"
"네, 오늘 이사님을 잘 모시라고 했어요"
"그럴필요 없어요. 둔곡리 잠깐 갔다 올텐데..."
"거기까지 같이 갈께요. 저는 차에 있으면 되니까요...잘못하면 저 혼나요 이사님"

아가씨가 애교를 떤다. 갑자기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 났다. 고운 피부가 너무 탐스러웠다. 기사가 내 맘을 아는 듯 싱끗 웃는다. 나는 검연쩍어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기사에게 말했다.

"이 아가씨는 회사에 내려주고 둔곡리 저번에 갔던데로 갑시다."

000 약속 00

순미, 즉 별장 여자는 내가 오는걸 이미 알고 있었나보다.
앙칼진 애완견 짓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숲사이 길로 마중을 나왔다.

"어서오세요. 이사님"
"아, 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날이 참 포근 하네요, 오셨으니까 산길 한번 올라갔다가 들어 가세요"
"그러겠습니다.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그냥 아무때나 와도 된다고 해서.."
"그럼요, 제가 없어도 오셔서 둘러보고 가셔도 되고..."

언중유골인데..
무언가 나를 점찍어 놓은듯도 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회사는 안가셔도 된다고 하던데.."
"예.. 사모님이 그러시든가요..?"
"예, 좀전에 전화가 왔었거든요...대접을 잘 하라고^^"
"신경 안쓰셔도 됩니다. 본래 제가 촌놈이라 아무렇게 하셔도 괜잖습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을 수인사를 했다. 따르던 무리는 벌써 사라져 주었다.

겨울 숲은 포장 되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기암도 절벽도 생긴 그대로다.
봄에는 푸르름으로 잎새를 불러 울긋 불긋 꽃을 피워 치장을 하면 산이 이렇게 곱구나 하는 감탄사가 나오고, 여름엔 무성한 숲으로 어우러져 장엄한 산의 위용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내 가을이 되고 마지막 불꽃 같은 단풍이 물들면 우린 정말 절정에 이른 산에서 떠나가는 세월을 늘 아쉬워 하지 않는가.
허나 겨울 산은 다르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초라한 몰골까지 다 드러내놓고 침묵하며 섰지 않은가..난 그래서 겨울산을 좋아하고 겨울 바다를 그리워 하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손이 참 이쁘다. 얼굴도 자꾸 보니 예쁜데가 많다. 보조개인듯도 하고 주름 같기도 한 볼. 도톰한 입술로 부터 늘 여유로와 보이는 미소가 풋풋하게 느껴진다. 몸매도 잘 관리했구나 싶다. 적당한 키에 마르지도 살찌지도 않고, 나이에 걸맞는 걸음걸이는 참으로 안전한 여생을 같이가도 좋을듯 하고.....
정이 드나...그녀는 날 어찌 생각하고 있는걸까..?
궁금했다. 이 여자와 난 지금 무슨 목적으로 여길 걷고 있을까? 내 인생길에 이 여자는 어떤 무게로 다가온 것일까..? 다 가버린 잠시잠깐의 불장난 속에 영원히 소유할 수 없었던 여인네들은 지금 다 제자리로 돌아 갔는데.....

여자를 보면서 민아를 생각 했다. 그녀와의 비밀스런 추억이 스치며 지나 갔다. 늑대는 늘 썩은 고기 먹던 시절을 음미한다더니... 여우는 교활한 모습으로 짝짓기 하던 시절을 생각하며 운다지 않는가...후회의 모습으로 울고 그리움의 모습으로 울고...수구초심은 꼭 고향이 그리워서 우는걸 얘기하는 걸까....?

"이사님, 호칭이 좀 불편하네요."

그녀가 약간 가파른 길에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를 부르시기가 불편하신가봐요.."
"그래요, 여기 오실때만이라도 아주 친근하게 불렀으면 좋겠어요 ^^"
"그러세요..원하시는대로..."
"참 우습죠. 저는 다른 호칭은 싫고 늘 좋아하는 사람을 부를때 선생님이라고 불렀거든요.."
"네...그럼 저를 좋아하시나요^^?"
"네, 선생님을 처음 보는 순간 그랬어요. 너무 단순하시고 마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마디가...?
"네, 참 착해 보이고..법 없어도 살 분, 물흐르듯 사는 분 같이 느껴졌어요"

사실 그녀는 날 잘못 본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처음부터 좋은 느낌을 가지고 보아온 것에서 연유된 것이리라.
산길이 끝나는 자리에 널직한 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포롱거리며 잎새들을 흔들고 우린 땀이 올라올 듯한 몸으로 숨을 몰아 쉬었다.

"기분이 상쾌하네요. 저 아래 마을이 참 정겨워 보이네요.."

그랬다. 산 밑으로 옹기종기 붙어 있는 집들은 앞으로 흐르는 작은 냇가로 향하여 입을 대고 피어 오르는 연기가 옛날 푸른 솔가지 연기는 아니라도 참 자연스러웠다. 지금이야 시골에도 다 기름보일러를 지피지만 더러는 장작으로 굼불을 지피는 집이 있다고 들었다.

"근데, 저는 뭐라고 부르죠?"

난 그녀에게 그런말을 던졌다. 아마도 지금껏 부를 호칭을 내가 생각하고 있었는지..아니면 할말이 궁해진 탓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글쎄요..^^ 선생님 좋으신대로 말해 보세요.."

별다른 호칭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순미라고 불러주세요^^"
"순미! 그래요 그게 좋을까요?. "
"네, 제이름을 찾고 싶어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거든요. 그냥 환쟁이라고도 하고 작가라고도하고 사모라고 불러주기도 하고..언니도 되고, 친구도 되었지만,.. "
"알겠어요. 순미씨"
"아녀요. 씨 자는 빼주시고 순미라고 불러 주세요. 제가 나이가 적다고 알고 있는데.."

그랬다. 그녀는 나보다 세살이나 아래라고 했다. 나이가 좀 먹어 보이긴 하지만...

우린 바위에 걸터 앉았다. 갑자기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혼자 오랜시간을 지내다 보니 홈초롬이 젖은 생쥐같은 심정이 된 탓인지 누군가 내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다가가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게 습성이 되었나 보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기로 했다.

"순미, 나 외로워!"

그녀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 잔잔한 호수가 있었다. 나를 감싸주고 싶다는 표정이 분명했다.

"외로우시죠, 선생님.."
"네..추워요"
"그래요. 혼자 사는건 너무 추워요."
"같이 살면 부담이 될텐데."

난 그녀와 같이 살게 해 달라고 청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가 손을 내 밀었다. 누나처럼 엄마처럼...
정말 둘이 있어도 어색한 포즈로 우린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러 여자들과 어울렸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두려웠다. 정말 그녀가 나를 정상적으로
대하고 있는건지....잠시 잠깐의 치우친 감정은 아닐까...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혼돈스러웠다. 그녀도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손이 정말 따스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과 정말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엉켰다.

"한번만..."
"선생님.."
"순미.."

우린 그냥 꼬옥 포옹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풍기는 냄새가 나를 자극 했다. 한참만에 맡아 보는 여자의 내음이었다. 그리고 정말 같은 방을 쓸지도 모를 여자의 등을 난 어루 만졌다.

그동안 만날때마다 전화할 대마다 익혀오던 외로움의 바램이 쉽게 접착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그래. 란같은 여자의 말대로 정 좋게 살던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수절을 못한다고 했잖은가..

여하간 이상하게 쉽게 우린 친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서로를 울타리로 아니면 위로해 줄 남은 날의 동반자로 생각해 가기 시작 했다. 보면 볼 수록 정이 가고 말하면 말 할수록 청소가 되는 여자라고 했던가. 참으로 미인들의 애교나 입에 발린 소리보다 가슴으로 뿜어 내는 그녀가 너무 내겐 새롭고 신선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더해 갔다. 그러나 우린 아직 대뜸 침실을 꾸밀만큼 자유롭지는 못했다. 그건 그녀가 내겐 너무도 신중한 대상자이라서 그런 것인듯도 했고, 아니면 내 행실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녀에게 몹쓸짓을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덜익은 모습으로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금새 거리에 반팔 행진이 이어지고 여자의 나신이 남자들의 시야속으로 아름답게 들어 오는 여름인데 난 이제 무언가 새로움으로 거듭나고 싶어졌다.

그래, 결혼하면 어떨까? 그 여자와...
난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보세요..?"
"나야 순미, 보고싶어..."
"네, 선생님 무슨일 있으세요?"

당황한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난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걸까..?

"우리, 이대로는 안되겠지.?"
"네..?"
"정말, 갈께.."

난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문을 나섰다.
내 머리에 그녀가 가득차 있었다. 그래, 가야지. 가서 같이 살자고, 같이 끌어안고 자자고
밥좀 해달래야지, 아니 아기를 낳아 달라고 할거야....
내 맘속에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눈이 침침해 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난 침몰된거야..난 지쳤어..그녀면 과분하지.. 난 차키를 꽂고는 정신을 차리려는듯 담배를 찾았다. 이렇게 허둥대다니..라이터의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변하고 있는 나를 스스로 보고 있었다. 나이탓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