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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이론


BY 김隱秘 2002-12-11

000 상대성 이론 0000

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아인슈타인이 창설한 상대성이론은 20세기를 원자 시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학자 레이비는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근거로 하지 않은 아이디어는 거의 없다" 라고 단언했다.
유머가 풍부한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상대성 이론의 정의를 물어 보았더니 그는 다음 같은 대답을 하였다.

"한 남자가 예쁜 여자와 한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있으면 그 한시간은 1분으로 생각되겠지요. 그러나 그가 뜨거운 난로 옆에 1분 동안 앉아 있으면 그 1분은 한 시간이나 되게 느껴질 고요. 그게 바로 상대성이오"

그랬다. 알 것도 같고 아직 모르고 있는 것도 같은 그 대단한 '상대성 이론' 이 지금 내 머리에 떠오른다.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특별한 주제가 아니더라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이 인간사 아니던가.

그렇다. 난 지금 이모와 앉아 있다. 그러나 탐닉하는 마음이 사그라진 상태에서 이모와 앉아 있는 시간은 어쩐지 즐겁지 않다. 오랜 시간 혼자 있을 시간에 이모가 내게 주었던 아름다운 희생(?)인지 적선인지 서로의 채움인지 구분이 안되는 시간은 정말 영롱한 그림이었지만 웬지 지금의 술잔은 불을 지피기 보다는 몸이 움추려 드는 걸 부인할 수가 없다. 한 여자를 위하여 마음껏 쏟아버린 허탈감이랄까..더 이상 점령하고 싶지 않은 전사의 안주 소망이 창과 칼을 다시 세우는데는 시간이 필요해서인 것 같았다..

"조카, 몸이 피곤해 보이네.."
"네, 낮에 봉사활동하느라고 오랜만에 힘을 좀 ?㎢醮?."
"그래, 힘도 써봐야 힘이 난다데..그런데 뭐 했어?"
"네, 여러가지 했지요. 청소도 하고, 놀이도 하고,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난 이 것 저 것 둘러 댔다. 이모는 술잔을 비우고 내게 내 민다.

"자, 한잔!"

소주 한잔이 내게 더 부어진다. 오장육부로 자극이 온다. 등산중에 알콜을 먹고 추위를 이기는 것처럼 우린 가끔 너무 지쳤을 때 일시적 힘을 얻기 위해, 또는 스트레스를 이기려 술을 마시고, 잠시라도 복잡한 세상을 잊으려 술을 마시고, 용기를 얻으려 술을 마시고, 즐거움을 배가 시키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가. 지금 마시는 술의 핑게는 무엇일까...

"이모도 한잔 더!"

조금은 용기가 솟아 났다. 지난 민아타임(?)이 희석 되기 시작한다. 앞에 다소곳 앉아 있는 이모가 자꾸 여자가 되어 간다. 허벅지의 스타킹이 점점 살처럼 느껴지나보다. 이모는 그걸 원하는지도 몰랐다.

"이모, 오늘 영감님 어디 가셨어요?"
"으으응, 영감쟁이 고리타분해. 잔소리 때문에 머리가 아파.."
"무슨 잔소리요?"
"사사건건 좁쌀 영감이지 뭐, 내가 잠깐 나가도 어디 가느냐, 어디 갔다 왔냐, 옷은 왜 그렇게 요란하게 입냐, 립스틱 색깔을 바꿔라..별별 간섭을 다해 참 나 머리가 터질 것 같애.."
"그래서, 어쩌실려고요..?"
"응, 생각중이야. 마땅히 대책도 없고 해서 실은 헤어질까 생각중이거든..뭐 제대로 날 위해 주는 것도 없고..그렇다고 조카한테 못할말로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잖아. 응..안그래"

헤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왔다. 이모 같은 여자가 벌써 나이 많은 노신사와 산다는 자체가 어쩜 어울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자, 한번 부딪칠까?"

이모이 입술 색이 더 고와지기 시작했다. 알콜은 사람의 피를 돌린다. 피가 돌면 생각이 바뀐다. 소주 한잔을 먹었을 때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과 한잔도 먹지 않았을 때의 모습은 천양지판이다. 우리 무슨 노래의 가사처럼 술잔을 부딪쳤다. 챤챤챤!
테레비는 저 혼자 떠벌거리고 이모는 그동안 영감쟁이와의 생활 속 불평들을 내게 몽땅 쏟아 놓는다.

"이모, 너무 그러시지 말고 여기와서 사세요.."

나는 결국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정말이야. 조카와 같이 살아도 돼지? 근데 우리 여기서 살면 이상하니까 이사 가면 안될까? 아주 좀 낮 선곳으로 말야.."
"네..?"

팔자를 여러번 고친 여자들은 변한다던가. 염치가 없어진다던가. 아니 이러나 저러나 버린 몸이니 별 아까울 것이 없어서일까..
이모는 많이 변해 있었다. 술 기운 속에서도 내 입장이 난처해 짐을 느꼈다. 어쩌다 이모와 만나지만, 무슨 수로 한지붕 아래서 생활을 계속한단 말인가..그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고 그건 남들에게도 용납되지 않는 남사스런 일인것을..잠시의 욕망 뒤에 오는 후회는 어찌 감당하고..

"좀더 생각해 보세요. 저야 좋지만...그냥 오늘은 술이나.."
"그래, 알았어..나도 해 본말이지 어떻게 조카하고 같이 살아..부담 갖지마 ㅎㅎ"

두병이 비워지고 더 이상 술이 없다.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술 한병 더 사올께요."

현관을 나서 편의점으로 술을 사러 가면서 난 생각했다.
오늘 나를 타락시킬 뱀은 지금 어디로 나를 끌고 가는걸까? 이모는 왜 이 시간에 여길 왔을까? 오늘의 하루를 되 짚어 본다.
원조소녀, 민아, 그리고 미숙한 처녀 연주, 이모..
참으로 혼자사는 남자의 복잡한 하루가 요괴스럽게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군가 나를 꽉 잡아 줬으면, 아니 나를 꼼짝 못하게 소유할 여자가 있었으면 흔들리지 않을텐데...남자는 강한척 해도 여자가 없으면 별 수 없지 않은가.

80년대 중동특수로 많은 한국의 기술자들이 건설근로자로 파견되어 달러벌이를 할 때 우리 옆집에 박준영이라는 사람이 살았었다. 여덟살짜리 딸과 여섯살짜리 아들을 낳은 아내를 두고 사우디로 간 그의 집안이 결국 부서지는 꼴을 나는 목격 했었다.
이쁘장한 준영씨 마누라를 남자들은 그냥 두지 않았다. 그렇게 요조하던 그녀가 아이들을 놔두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나더니 급기야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았고 화려한 옷을 사입고 삐쪽 구두를 사 신는가 했더니, 다니던 봉제공장의 젊은 총각과 눈이 맞아 도망을 치고 준영씨가 돌아 왔을 때는 아무것도 없는 빈집에 할머니가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수난을 겪고 있엇던 것이다. 준영씨는 날마다 술로 나날을 보내고, 밤이면 밤마다 동리를 돌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어디론가 떠나 갔는데 지금도 그때의 행색이 눈에 선하다.

그렇다. 남녀는 항상 각방을 써서는 안되고 함께 살을 부비고 살아야 탈이 없는 것을..나같은 위인은 늘 이렇게 홀로 살고 있으니 동병상련의 여자들이 모여드는 것이겠지...
참으로 한심한 인생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보니 웬지 마음이 울적해 진다. 가로등의 반짝이는 불빛이 눈부시지 않은데 눈에서 괜한 눈물이 날까.. 술 기운 탓일까? 군중 속에, 아니 여자들 속에 외로움이랄까...바람 같은 구름 같은 신세의 한탄이랄까..정말 마음이 자꾸 연탄가스처럼 가라 앉는다.

술 두병과 안주가 든 비닐봉지를 털래 거리고 이모가 있는 집으로 들어 가며 난 마음이 찹작 했지만 조금씩 불어오르는 술에 힘을 빌어 외로운 이모를 잘 달래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우린 그냥 외론운 걸 메우는 거야..
문을 열고 들어섰을때 이모는 거실 가운데 옷을 다 입고 서 있었다.

"조카, 나 오늘은 그냥 갈래.."
"왜요? 술도 사 왔는데..."
"아냐, 조카도 피곤한 것 같고..영감쟁이하고 일은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해야지.."
"그래도, 내일 가시지 그래요. 마음도 상하신 것 같은데.."
"아냐, 가야지..생각해 보니까 가야될 것 같애.."

간다고 하니 좀 서러웠다. 서럽다기 보다 허전하고 쓸쓸하다. 빈 가슴에 찬바람이 홱 불어온다. 사람의 마음이 이다지 간사한가..

"조카, 미안해. 시간나면 또 올께.."

이모는 노란 외투를 입고 그렇게 가 버렸다.
호나뿐인 방. 역시 난 혼자라는 걸 느끼는 순간 침침한 슬픔이 내려와 눈물 주머니를 자극한다.

"흑흑흑~~"

난 너무 내가 가엾어 그렇게 치를 떨고 있었다.
사온 술병이 나딩굴어져 있다. 난 병을 돌린다. 그래 더먹고 취해야지....잊어야지....
혼자 마시는 소주는 외로움을 배가 시키는 마력이 있는 것일까. 빌어먹을....
난 핸드폰을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