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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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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BY ich63 2002-12-16

잠결에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진다. 힘들게 눈을 떠보니 선배다.
"회사는 어떡하고?"
"외근 나간다 하고 나왔어. 좀 어때?"
"많이 아프네. 이렇게 아파보긴 처음이야. 나이는 못속이나봐.몸이 벌써 신호를 보내는 걸 보면."
"밤낮이 바뀐 생활을 오래해서 그렇지 니 나이가 얼마나 된다고.
사람이 밤에 잠을 자고 낮에 활동을 해야지 올빼미처럼 사니 몸에 무리가 올밖에. 이참에 푹 쉬어."
"나 졸려. 선배는 볼 일 봐. 정말 간호 필요 없다니까. 잠만 푹 자면 돼."
"그래 걱정말고 어서 자."
일민은 이불을 끌어 서인의 목까지 덮어주고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 본다. 거리가 황량하다. 가로수는 잎이 다져서 앙상하고 사람들은 추위에 걸음을 재촉하며 뛰다시피한다.
'쓸쓸한 계절이군.'
그러면서도 서인을 온전하게 혼자서 간호할수 있는 행운에 감사한다. 때때로 사랑은 받는 것보다는 베풀때 충만감을 더 느낄 수 있으니까. 해주고 싶은데 해 줄수 없는 고통은 이미 충분히 맛보았으니까.
'지금 서인이는 나의 보호속에 있고 아무도 그것을 침범할 수 없다. 서인의 남편이 돌아올때까지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몹쓸 생각도 언듯 스친다.
2시가 좀 넘으니까 서인의 핸드폰이 울린다. 잠을 깨우기 싫어 전원을 꺼버렸다. 서인이 전화소리를 들었나보다.
"내 핸드폰 "
할수 없이 핸드폰을 건내준다. 번호를 확인하더니 이내 전화를 건다
"상진아, 엄마. 니가 전화했어?"
"엄마 많이 아퍼?"
"하루만 더 있으면 괜찮을 거야. 저녁은 엄마가 동준아줌마에게 전화해 둘테니까 거기 가서 먹어. 항아리에 돈 있으니까 학원가기 전에 간식사먹고. 누나는?"
"아직 안 왔어."
"싸우지 말고 문 꼭 잠그고 있어. 모르는 사람오면 열어주지 말고."
"알았어.엄마"
"왜?"
"빨리 나아. 엄마 보고 싶어. "
"엄마도 아들 보고 싶다."
핸드폰을 끊고 나니 가슴이 아프다. 당장 퇴원하고 싶은데 선배의 얼굴을 보니 말을 꺼낼수가 없다.
다시 전화를 건다.
"동준엄마, 나 유진 엄만데 내가 지금 병원에 있거든."
"왜? 어디가 아파서?"
"독감이 심하게 왔나봐. 남편도 없고. 미안한데 우리애들 저녁좀 먹여줘. "
"걱정하지 말고 애들 보내. 아예 책가방 챙겨서 가라그래. 오늘 여기서 재우고 내일 학교 보낼게. 동준이가 좋아하겠다. "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별소릴 다하네. 간호할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아?"
"활동엔 지장이 없으니까 괜찮아. 애들 때문에 그렇지."
" 언제까지 있으래?"
"내일은 퇴원해야지."
"그럼 쉬어. 그 동안 너무 무리했나봐."
"부탁해."
"걱정 말라니까."
이럴때 부탁할 사람이 있다는 게 행운이다. 내가 복이 많은 사람 같다.
"먹고 싶은 것 없어? 잘 먹어야 낫지."
"입이 깔깔해서. 시원한 과일이나 먹었으면."
"알았어. 내 사올게."
선배는 후다닥 나간다. 사람이 사람에게 정을 준다는 것이 저런 것인가. 남편과는 비교가 된다.
작년에도 좀 아팠다. 남편과 다투고 난 뒤 서로 말도 안하고 냉전이 지속될 때 신경을 써서 그랬는지 열이 나며 자리에 누웠다. 그래도 남편이라 위로 받고 간호 받고 싶은 마음에 직접 전화는 못하고 애들 시켜 엄마 아프다고 전화를 걸게 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아빠 바빠서 못가."
어디가 아프냐 어떻게 아프냐 한마디 질문도 없이 바빠서 못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에 대한 섭섭함과 배신감에 눈물이 계속흘렀다.
자기가 아플때는 내가 어떻게 했는데. 잠도 안 자고 주무르고 숨쉬나 안쉬나 귀 대보고 죽 쑤어 먹여주고. 그런데 어떻게 저럴수가.
눈물을 흘리는 날보고 아들은 엄마 많이 아프냐며 위로의 말을 했고 딸은 방에 와 보지도 않았다. 아들이 주방으로 가더니 지 누나에게 물었다.
"누나, 유자차가 좋을까 보리차가 좋을까?"
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아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보리차가 낫겠지."
조금 있다가 문이 열리며 아들이 컵을 들고 왔다. 보리차가 든 컵.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남편에 대한 섭섭함보다 아들에 대한 감사함이 더 크게 느껴졌었다.
지금 왜 그때 생각이 나는 걸까. 남편이 옆에 있었어도 이런 대접은 못 받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