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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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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BY ich63 2002-11-25

영화는 그런대로 잘 만들어 진것 같았다. 샘으로 나오는 숀펜의 연기가 좋았고 어린 딸역의 다코나 패닝은 너무 예뻤다. 중간 중간 필요할때마다 도와주면서도 우려의 마음을 갖고 있는 애니는 또 어떠했나. 그런데도 나는 내내 짜증이 났다. 그들의 사랑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그런지 자꾸 짜증이 났다. 아마도 내겐 권리라는 단어는 사전에만 존재하는,현실속의 단어가 아니어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무는 있으되 권리는 없다. 왜 샘은 아이를 낳았을까? 아이가 정녕 행복하리라 생각했을까? 루시가 좀 더 커서도, 사춘기가 되어서도 아빠를 부끄러워하지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명목하에 루시에게 너무 큰 짐을 지어 준 건 아닐까? 루시가 그것을 다 극복하기까지 그 애의 고통은 얼마나 클까?
남편은 늘 나더러 쓸데없는 걱정한다고 나무란다. 그런걸 왜 생각해? 나도 그러고 싶진 않다. 그런데 나의 시스템은 그렇게 작동된다. 부팅과 동시에 걱정거릴 찾는다. 영화 중반즈음부터 아이들이 지겨워하기 시작했다. 재판하는 것이 그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시킬수 없었던 것 같다. 싸우고 죽이고 때리고 맞는 것들에 너무 오래 물들어 있어서리라. 선배는 가끔씩 아들에게 설명을 해주며 팝콘을 나눠먹고 있었다.

"엄마, 배고파."
극장을 나서면서 아이들이 말했다.
"나도 배고픈데, 우리 햄버거 먹으러 가자."
선배가 애들을 데리고 롯데리아로 들어섰고 나도 할 수없이 따라갔다. 내가 오히려 이방인 같았다.
" 엄마,또 버스타야 돼? 차는 왜 고장나가지고."
선배와 나는 공범이었으므로 시선이 마주치자 피식웃고는 딴짓을 하였다.
"내가 태워줄게.나도 집에 가는 길이거든."
"아저씨는 집이 어디에요?"
"주엽"
"주엽이 어디야?"
"그랜드백화점 알지? 그 앞이야."
선배는 아이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집에까지 데려다 줬다.

선배는 아르바이트가 가자 마자 곧 가게로 들어섰다.
"안 자고 왜 왔어요? 내일 출근해야 되잖아.어제도 제대로 못잤을 텐데."
"낮에 좀 잤어. 그리고 내일 월차 낼려고."
"무슨 일 있어요?"
"내 생일이야.
선배는 그러곤 한참 말이없더니 "받고 싶은 선물이 있어. 해 줬음 좋겠어. " 라고 했다.
"뭔데요. 할 수 있으면 해 드려야지. 신세를 한 두번 졌나."
"점심식사."
"그거야 못사겠어요? 뭐 먹고 싶어요? 말만해요."
"사는 거 말고 니가 해주는 밥먹고 싶어. 미역국에 하얀 쌀밥."
"나 요리 못하는데. 햇반하고 즉석 미역국 사가면 되겠네."
"그럼 약속했다."
선배는 몹시 좋아라 했다. 아직도 소년 같았다. 감동받는 소년.
그 모습을 보는 나도 풋풋해지는 느낌이다.
일요일 치고 손님이 조금 많아 선배가 청소를 도와줬다. 잠시 카운터로 온 사이 전화가 왔다. 남편이다. 별 감정없이 잘 놀다오라고 말하는데 " 서인아, 또 뭐해야 돼?"라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도 들은 것 같다. 대번에 목소리가 굳어지며 "누구야."라고 한다.
선배보고 말하지 말라며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는 "친구.지금 바뻐.끊을게."라며 전화를 끊는다.약간 분위기가 씁쓸하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괜찮은 기분이구나. 슈퍼에 가서 시장을 보고 선배오피스텔로 갔다.
집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미역을 물에 불리고 쌀을 가져오래서 쌀을 씻고 생일상을 준비한다. 선배가 뒤로 와서 껴안는다. 전기가 온다. 뿌리치고 싶지 않다. 잠시 그러고 있는데 선배가 속삭인다.
"오늘 하루만 내 아내가 되어주면 안될까? 딱 하루만이라도."
그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같이 식사 준비를 하면서 부부같이 여겨졌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부로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안될말이다. 난 남편이 있고 선배는 아내가 있고. 우리 둘다 아이들이 있고. 식탁에 상을 차리면서 느릿느릿 말했다.
"있잖아요. 웃을 지도 모르는데, 우리 딸도 엄마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데, 나는 어렸을때부터 내가 전생에 선녀였다고 생각했어요. "
"선녀"
"응 선녀. 천상에서 내려다 보니 인간세상이 너무 예쁘고 재미있어 보이는 거야. 그래서 옥화상제를 졸랐어. 인간세상으로 보내달라고.
하도 졸라 대니 어쩔 수없이 내려보내 주신 거지. 그런데 세상은 만만치가 않았어. 그래도 어떡해. 내 선택인걸. 내가 착하게 살지 않으면 난 천상으로 돌아갈수 없어. 난 윤회의 사슬속으로 얽혀 들어가기 싫어. 경험은 한번으로 족해. 김승희 님의 시중 이런 구절이 있거든요.
-나의 어머니는 옛날에 선녀였습니다.그리고 이 간막극같은 아수라의 윤회가 끝나고 나면 어머니, 나의 어머니는 반드시 천상에 계하실 것입니다.- 나도 반드시 천상에 계하고 싶어. 무슨 뜻인지 알죠?죄 짓고 싶지 않아."
선배는 웃어주었다. "그럼 선녀가 해준 밥을 먹어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