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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기준 연령을 75세로 상향 조정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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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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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ich63 2002-10-21

일민은 거기 더 있을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왔다. 술깨러 들어가 술이 확깨기 했지만 이대로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져 몸이 움추려 들었다. 어디 따뜻한 곳으로 들어가야 할 것같았다.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 바로 앞에 있는 까페로 들어갔다. 구석자리로 가 양주와 과일 안주를 시켰다.
옆테이블에서는 손님들이 아가씨들과 희희덕거리고 있었다. 술을 연거푸 들이 마셨다. 서인이가 저렇게 사는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내가 지켜줘야 했었는데, 내 마음이 더 다치더라도 내가 더 노력해야 했었는데......

서인은 써클 한해 후배였다. 조그만 몸에 눈이 까만 귀여운 후배였다. 1학년때부터 성수랑 잘어울려 다녔다. 그러면서도 미팅도 하고 소개팅도 하는 걸 보면 둘이 사귀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가 끊이질 않았다. 이사람과 데이트하는 가 하면 며칠후엔 다른 남자였다. 오죽했으면 스캔들 메이커라고 했겠는가. 써클 남자들이랑도 거의 한번씩은 데이트를 해본 것 같았다. 헤픈 여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이 늘 서인을 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리내 계곡을 지나 숲으로 들어가면 공터가 군데군데 있었고 우리 써클파크도 거기에 있었다. 바로 앞엔 음대 강의실이 있어 간간히 음악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거기서 포카놀이도 하고 토론도 하며 우리의 젊은 가슴을 달랬었다. 80년초 대학가는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몸살을 앓았고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데모에 참가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할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젖어있었다. 그런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우리는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써클 파크에 둘러앉아 한가지씩 질문을 하면 돌아가며 대답하고 다돌고 나면 옆사람이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그런 식이었다.
"제일 가기 싫은 곳?"
"재래식 화장실"
"화장터"
"공동묘지"
"집"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어서 모두들 서인을 바라보았다. 자연 게임은 중단되었다.
"너 집이 왜 싫어?"
누군가 물었다.
" 좋은 아버지, 어머니랑 사는 사람들은 모르는 문제야. 난 어떤때는 아버지가 죽어줬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이라도 살게.사랑해야 할 사람을 증오하며 살아야 하는 마음 모르지? 날씨 참 더럽게 쓸쓸하다."
서인은 그 말을 남기고 파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아래로 내려갔다.
그때 그애 마음이 병들어 있는 것을 알아챘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