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향을 향하여
나는 1922년 10월 22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수많은 이 땅의 애국지사들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일제와 싸우다 투옥되는가 하면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를 흘리던 암울한 시기였다. 혼란스러웠던 출생시기와 짝 맺음 하듯 내 삶은 너무도 기복이 심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더라면 그 고난의 길을 어찌 극복하며 뛰어 넘어왔을까,
아버님의 소천과 사랑하는 아내의 투병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회고록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마침내 이 한 권의 회고록을 쓰면서 느끼기는 부끄러움을, 바라기는 자손들의 신앙 생활에 미약한 부분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02년 2월
정빈,
나는 1922년 음력 10월 22일 경기도 양주군 (지금의 남양주시) 봉안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봉안은 안동 김씨의 시조 김선평(金宣平)의 20대 후손인 현립(賢立) 형제들이 1620년경에 이주하며 뿌리를 내린 곳으로 벼슬에 염증을 느낀 29대 주현 옹이 자손들에게 절대로 벼슬을 하지말고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라는 엄한 유지를 내리자 그 자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농사에만 전념하여 살아온 고장이다.
나는 세 살부터 잦은 병치레로 어른들을 괴롭혔다. 오죽하면 할아버지께서 "저 애를 퇴적 장에 갔다 버려라" 하셨을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할머니께선 내 병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작정을 하시고 나를 안고 집 앞에 있는 예배당에 나가 식음을 전폐하시다시피 하고 주야로 눈물의 기도를 드리셨다고 한다. -------나를 이야기하자면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할머니시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고, 내 신앙의 기틀을 잡아주신 분이다.
원래 할머니는 광적이라고 할 정도로 유별나게 미신을 숭상하신 분이다.
사람도 끼니를 잇기 어려운 때에 집안 뒤뜰에 있는 구렁이를 집안 수호신으로 모시고 하루 세끼 꼭꼭 밥을 주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내가 태어날 무렵 미국 선교사 곽괄연 목사로부터 복음의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으셨는데 어찌나 열심이셨던지 안동 김씨 문중에서 조상을 섬기지 않고 서양 천주학을 믿는다하여 할머니를 추방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할머니가 "문중에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내가 믿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하시며 옷 보따리를 챙겨 총총히 동구 밖을 나서시니 문중어른들이 손을 들고 만 것이다.
내가 육 칠세 되는 때에 사키로가 넘는 용진 큰아버지 댁에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걸어 갔다오자 마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으로 저렇게 사람되었지" 했다. 나 역시도 내가 올바로 성장하여 사람구실을 하게 됨이 순전히 할머니의 기도와 사랑덕분 이었음을 의심치 않아서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나는 여덟 살에 집에서 삼키로 떨어진 사립광동학교에 입학하여 책보자기를 허리 뒤에 차고 마을 뒤 성황당 고개를 넘어 학교에 다녔다.
몇 해 후엔 인접군인 광주군 남종면에 있는 분원공립보통하교에 사학 년으로 전학하였고
열두살 때엔 서울로 전학하여 마을최초의 서울 유학생이 되었다. 그 때 내가 다닌 학교는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계성보통학교였다.
아버지께선 농사를 어머니에게 맡기시고 서울로 올라오셔서 내 뒤를 돌보아주셨는데 나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촌동생 만일이를 데리고 청계천변 주교동에서 서울 을지로(그 당시 황금정)를 지나 진 고개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등교하였다.
육학년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께서 시골로 내려가시자 현저동에 사시는 할머니의 동생인 작은 할머니 댁으로 하숙을 옮겼다가 이내 동대문 밖 회기동에서 양약방을 경영하시는 아버지 친구 분 댁으로 하숙을 옮기었다. 같은 반 친구 교진군과 사촌동생 만일과 함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엔 경성상업실천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하숙집에서 두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의 학교였다.
경성상업실천학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학교로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이 일본인이었고 한국선생님은 중국어를 가르치는 북경대 출신 김경탁 선생님 한 분 뿐이였다.
나는 부모님의 짐을 조금이라도 들어드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방 속에 맨소래담, 뇌신, 가요루소화제 ,옥토정기, 같은 의약품과 학용품을 넣어 다니며 학우들에게 팔아 학용품비로 조달했다. 그 때 많은 학우들이 나를 도와주었다.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삼학년 신학기부턴 하숙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인 봉안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했다.
새벽 네시반에 기상하여 새수하고 책가방 챙기고 식사하고 자전거로 오키로나 되는 비포장 도로거리를 팔당역까지 달려 나와서 여섯시 기차를 탔다. 집에서 역까지의 도로는 명색이 국도이지 굵은 자갈이 깔려 있어 자전거가 달릴 수 없는 굴곡이 심한 도로였다. 양평에서 청량리역까지의 구간에서 통학하는 학생은 비교적 많은 편이였다. 덕소에서 승차하는 경성고등상업학교의 최인규, 양평의 보성전문학교 이삼혁을 위시하여 경기중학교 경북중하교 대동상업학교 경성농업학교 경성상업실천학교 소화공과학교, 배화여학교 동덕여학교 정신여학교등에 다니는 학생들이 섞여있었다. 남학생이 이십여명 여학생이 십사명 도합 삼십육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생들 중엔 일본인들도 상당수 섞여있었다. 기차안에선 웃지 못할 촌극이 종종 발생하였다.
어느날 아침, 양평에서 통학하는 보성전문학교의 (이모군과) 동덕여학교의 (최모양이) 열차 승강대 옆에서 남의 눈을 피해 서로 포옹하며 속삭이던 중 마침 화장실에서 나오던 시골 할아버지의 눈에 띄고 말았다. 할아버지 눈에 그 광경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이놈들 거기서 무엇 하는 짓들이냐? 여러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에서!"
청천변력 같은 할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객실 안에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가끔은 일본인 친구들이 한국여학생을 놀리며 희롱하는 일도 있었는데 한번은 내가 나서서
"너희 놈들은 남녀구별도 못하고 공중도덕도 모르는 놈이냐?"
하고 꾸짖자 마침 양평 구둔에서 채광을 하는 일본인 관리소장이 옆에 앉아 있다가 정색을 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어이 학생! 너의 놈들이라 하니 누구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네놈 말속에는 불순한 뜻이 있는 듯 한데? 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저런 일을 두루겪다보니 나는 통학 분위기를 보다 명랑하게 만들 그 무엇을 찾게 되었고 나아가 우리 한국학생들의 단결과 일인학생들의 한국학생들에 대한 우월감을 깎아 내릴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생각 끝에 만든 것이 친목회였다. 친목회엔 다음과 같은 회칙을 만들었다.
첫째, 회원은 경경선 남녀통학생 전원을 회원으로 한다.
둘째, 기차를 승차할 때에는 남녀 지정된 객차에 승차하여야 한다.
셋째, 회원 중에 어려운 환경이 발생하였을 때에는 물심양면으로 도울 것이며 상호협조 하여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한다.
넷째, 각 역 단위로 한 명씩 규율부장을 두어 풍기단속에 유의한다.
다섯째, 춘추로 일년에 두 번씩 친선의 날을 정하여 회원간의 친교를 가진다.
회장은 내가 맡았고 부회장은 미쓰하라(일인), 총무 이은규, 규율부장에는 이도성, 친교부장 다나까(일인), 고문은 최인규가 맡았는데 최인규는 후에 내무 장관이 되었다. 아무튼 친목회 결성이후 통학생들은 한결 재미있고 명랑한 분위기에서 통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친목회 때문에 상처도 받아야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한국학생 임원 몇이 청량리역전에 있는 원산여관방에서 성탄 축하 겸 단합 모임을 가졌다가 순찰중인 일본인 순사에게 모두 끌려갔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청량리 파출소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인 경찰의 주먹과 구두에 사정없이 맞고 짓밟혔다. 무슨, 나쁜 일을 음모했다는 것이었다. 순전히 친교를 위한 모임이라고 우겼으나 그들은 믿으려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풀려나긴 했으나 이 때의 사건은 우리들에겐 잊지못할 악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