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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BY bebestar 2002-07-13

-아랫집 여자(4)

조금은 황당한 질문...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라...
김말자씨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자기 생각을 피력하라면이야 당연히 돈많고 권력있고, 그래서 사는데 별 어려움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말을 들으려고 꺼낸 질문이 아닌것 같은 생각에 선뜻 입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저 어정쩡한 표정만 짖고 있는데 평상에 누워 배를 실룩거리며 자고있는 혜정이와 김말자씨를 번갈아 가며 보고는 씩 웃더니
"경훈이 엄마같이 요만한 애기들 손잡고 다니는 엄마들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그런다.
'이 아줌마가 무슨 말을 하고 있데?
요만한 애들이 얼마나 말도 안듣고 속을 썩이는데 이런 애들 손 잡고 다니는 애 엄마들이 부럽다고 그러냐...
자기도 애들이 셋이나 있더구만, 이만한 시기 다 지나고 애들한테서 해방되고 나니까 그때가 그리워 진다는 거야, 뭐야...'
김말자씨는 머릿속으로 전혀 납득이 가지 않은채로 그녀의 이유가 듣고 싶어졌다.

문득 김말자씨는 동갑내기 시누가 자기보다 4년 더 늦게 결혼을 해서 아직 아가씨 시절이었을때 한참 결혼 준비를 하느라 바쁜 시누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아가씨는 참 좋겠다. 드레스도 입고,신혼여행도 가고 정말 좋겠네."
"어머, 언니는 다 안해봤수?"
시누의 말 속엔 뭐 이런걸 다 부러워 하냐는 빈정거림이 묻어있었다.물론 김말자씨도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정말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밖으로 뱉어 놓은 그 말이 아니라, 결혼식장과 신혼여행지를 벗어나는 그 순간부터 현실로 다가오는 집안 일들과, 시댁, 친정, 회사, 친구들 해가며 신혼집이라면 기본 대여섯번씩은 치러야 되는 '집들이'하며, 결혼을 한 이상 언젠가는 낳아야 될 아기에 대한 - 배에 담고 열달, 낳을때 그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산고하며, 낳고 나서는 기저귀 땔때까지는 겪어야 될 일들들들- 고생스런 이야기들 이었다.
동갑내기라 느끼는 서로에 대한 묘한 경계심도 작용을 했겠지만 같은 나이에 벌써 두아이의 엄마가 되어 버린 김말자씨 입장에서 보면 아직은 자기가 책임져야 하거나 챙겨줘야 할 가족이 없는 시누가 정말 부러웠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평생 자유인을 부르짓으며 살 것처럼 콧대를 세우던 시누가 시집을 간다니 신랑자리가 어떻든, 시집 자리가 어떻든 간에 결혼을 하고 나면 저도 나랑 크게 다를바 없을거란 생각과 언젠가는 저도 애를 낳을테고, 그러면
'난 아줌마들,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도 안 감고 대충 묶어서 애들 들쳐 업고 시내에 다니는거 보면 정말 저렇게 살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결혼하고 애 낳으면 여자들 다 그렇게 되나? 자기 관리라고는 전혀 안하잖아. 언니는 그러지 말아요. 으~ 정말 싫어'하며 시댁에서 잔 다음날 아침에 세수도 못하고 애기 기저귀를 갈고 있는 김말자씨의 뒤통수에 대고 그런 밉살스런 말을 해대던 너도 별수 없을꺼라는 그런 말이, 그리고 나는 그 지긋지긋하고 몸서리 처지는 시간이 석달 전 둘째를 낳는 산고를 끝으로 다 지나갔는데 아가씨는 이제부터 그 일들을 다 겪어야 되니 참 안됐다는 말과, 사실은 그대가 전혀 부럽지 않다는 그말이 하고 싶었지만, 진짜 마음은 가증스런 축하 인삿말 속에 묻어 두고 속으로만 삭였던 기억..

김말자씨는 여전히 혜정이에게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그녀를 쳐다봤다. 이유가 듣고 싶었던 게다. 자기가 시누에게 속내를 숨기며 그런 인사를 건냈던건 분명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 가슴속에 자기보다 좀 더 여유를 부리고 살던 시누에 대한 질투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 지금 아랫집 여자가 한 말속에는 빈정거림이라든가, 아니면 자기의 처지가 조금 더 나아서 상대의 지금 형편을 즐기는 듯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아랫층 여자의 진심이 그렇다고 해도 김말자씨로선 정말 납득이 가지 않는 대답이었다. 애들에게 매어서 외출 한 번, 쇼핑 한 번, 심지어 화장실에 갈때 조차도, 문 밖에서 울며 보채는 통에 문이 없는 중국 화장실 문화를 침이 마르도록 흉보던 그녀가, 버젓이 달려있는 문 조차도 닫지 못하고 볼일을 봐야 하는 형편의 자신을 부럽다고 말하는 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고 싶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고, 김말자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전 오히려 애기 없이 혼자 볼일 보고 다니는 아주머니같은 분이 제일 부럽던데...
아가씨때 말고 결혼 하고 부터는 혼자 외출 한 기억이 한 번도 없는것 같아요. 식 올리고 두 달만에 큰 애가 생겼으니 배에 담고 다니기 시작한 것도 동행은 동행 이니까요."
"진아 엄마예요. 큰애 이름이 진아거든."
말을 걸면서도 내심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지적을 하고 나온다. 한번씩 복도에서 마주치는 애들로 봐서는 초등학교 3-4학년은 됐음직한데 진아 엄마는 나이가 김말자씨와 많아 봐야 두어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아 엄마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은게 분명 한데, 40대에 늦둥이를 봤다면 모를까 자기 감정도 잘 조절이 되지 않던 그 어린 나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을때는 애기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이뻐 보이기만 했을리 없었을테고, 설령 자기 자식이니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웠다고 하더라도 말귀가 트일만큼 키울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6년은 자아실현 운운해가며 여유를 부릴만한 시간이 없었을텐데, 진아 엄마 자기가 그러고 지낸 그 동안의 기억에 의거해서라도 혜정이 만한 애들의 손을 잡고 가는 애기 엄마들을 보면 안스럽고, 저거 언제 키워서 좀 자유로워 지나 하는 생각을 가져주는게, 적어도 언젠가 육아의 주최가 되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김말자씨 생각은 그랬다.

"나이가 몇살이예요?" 진아 엄마가 물었고,
"32살이예요." 김말자씨가 대답했다.
"어머 그럼 나하고 2살밖에 차이가 안나네. 친구 하면 되겠다."
순간 '가까지 지내지 말라'는 동네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날파리 소리처럼 쟁쟁거렸고 '집안일은 절대 말하지 말라'는 충고또한 기억속에서 스물거리고 일어났다.
"그러죠, 뭐..."
생각과는 다른 말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머릿속에선 충고를 해준 친구의 입술만이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안돼를 외치고 있었지만, 공장에서 일률적으로 찍어낸 공산품도 아니고 그 나름의 인격을 갖고 있는 한 인격체를 한번도 직접 겪어보지도 않고 다른사람의 말에만 의존해 판단해버린다는건 그 사람에대한 예의가 아닌것 같았다.
아니 굳이 그런 거창한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더라도 단추세개가 떨어져 나가 가슴이 거의 드러난 옷을, 급한대로 건네 준 혜정이의 토끼핀 두개로 아슬아슬하게 여미고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녀의 배짱에 적잖은 호감이 갔다.
슈퍼에 앉아 졸던 아저씨도 김말자씨와 그녀의 두런두런 말소리에 깨서는 평상에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고는 잠이 확 달아난 눈치다.
애를 업고 오느라 땀 범벅이 된 김말자씨는 둘째치고라도 단추가 세개나 튿어진 원피스에 벌겋게 달은 얼굴을 한 그녀는 짧게 말해 어디서 한판하고 온, 딱 그 분위기였다.
한여름 달콤한 낮잠을 확 깨울만큼 그녀의 모양새는 과히 파격(?)적이었지만, 그런것 쯤은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의 행동을 보며 '아줌마라서 저렇게 용감한걸까'하는 어줍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때 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을때 많이 뽀뽀해주고, 쓰다듬어 주고, 보듬어 줘.
애기들이 항상 이렇게만 있을줄 알지? 지나고 나니까 그것만큼 후회 되는게 없더라구. 나도 애들 어릴땐 제발 빨리 커라, 커라. 그래서 나도 좀 편해지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경훈이 엄마도 애들한테 신경질 많이 부리더라. 예전에 우리 애들 고만고만할때 나 보는것 같아서 좀 그렇더라구."
김말자씨는 그 전날도 경훈이랑 혜정이에게 물장난을 한다며 악을 썼던걸 기억하고는 겸연쩍은 듯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