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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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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bebestar 2002-07-11

---아랫집 여자(3)

"아휴, 예쁜 꼬마 아가씨가 왜 이렇게 울고 있을까?
아가, 어디 다쳤니? 엄마 잃어버려서 우는 거야?"
누구라도 한마디만 더 거들면 폭발할 것처럼 화가 나있던 김말자씨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신경질적으로 돌아 봤다.
거기에 그녀가 서있었다. 엄마를 잃어버려서 울고 있는거라고 생각을 했던걸까? 아직도 그녀는 혜정이에게서 걸음을 옮겨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더니 여전히 길에 드러누워 악을 쓰며 울고 있는 혜정이를 번쩍 들어서 앉혀서 가슴에 꼭 껴 안아주는게 아닌가...
'어머나, 이를 어째'
김말자씨는 하마터면 고구마가 든 봉지를 엎을 뻔했다.
더운 날씨에 악을 쓰며 우느라 혜정이의 얼굴은 눈물, 콧물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고 더러워진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었던 탓에 얼굴은 꼬장꼬장 말이 아니었는데도,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햇빛을 받아 유난히 더 하늘거리는 그녀의 하얀 원피스의 옷깃에 혜정이의 얼굴을 묻게 해 주었다. 순간 겉으로 말이 터지지 않았을 뿐 김말자씨의 머릿속은 벌써 세탁비까지 계산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악을 쓰며 울던 딸아이가 울음을 그쳤다는 것도 안중에 없었고 김말자씨는 혜정이를 아직 자신의 무릎에 앉혀놓고 땀에 젖은 머리를 열심히 쓸어 넘기고 있는 그녀의 쪽으로 무덤덤하게 걸어갔다.
주위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울 뿐 그 고비만 넘기고 나면 다음부턴 고집을 피워도 소용이 없다는 걸 혜정이가 알았을 텐데 느닷없이 나타난 저 여자로 인해서 김말자씨의 오늘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게 아닌가 하는 언짢은 마음이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 또한 걷어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혜정이, 너 ..."
그녀에게로 다가간 김말자씨는 감정이 앞서서 고맙다는 말은 커녕 혜정이에게 소리 부터 질러댔다.
제 딴에도 미안했던 건지 혜정이는 다시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딸아이의 더러운 손이 지나간 자리에 거무죽죽한 얼룩이 드는 걸 본 그녀는 순간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어코...
손에서 절대 놓지 않았던 고구마를 바닥에 내팽겨치듯 던져놓고는 혜정이를 그녀의 가슴에서 떼어 놓기위해 번쩍 들었는데, 혜정이도 엄마의 표정을 보고 좀 놀랐던터라 두 손으로 꼭 쥔 그녀의 옷을 놓지 않는 바람에 그녀의 하얀 원피스에서 '후두둑'하며 단추 세개가 길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소리에 놀란 김말자씨가 들어 올리던 혜정이를 순간적으로 놓쳐버리면서 어정쩡한 자세로 서지도 않지도 못하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덮쳐온 혜정이의 무게에 중심을 잃으며 뒤로 벌렁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 시간은 정말 잠깐 이었지만 김말자씨의 머릿속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하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져 나갈것 같았다.
'그냥 도망쳐? 아냐 아냐 그럼 혜정이는...
아니면 세탁비에 병원비까지 다 변상해준다고 그럴까?
아냐, 그건 정말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 할 짓이 아니지.
그럼, 어떻게 하지?
무조건 사과부터 해야겠다. 으이구, 저게 어쩐일로 오늘은 사고 안치고 지나가나 했어. 니가 어쩐일인가 했다구. 아이구 내 팔자야.
내가 살수가 없어. 어후, 미안해서 어쩐다. 어쩌지?'
그때였다.
"애기엄만가 보네. 나 좀 일으켜 줘요. 이렇게 계속 누워 있을 수는 없잖아. 애기를 안아 보던지.."
말에 언짢은 기운은 하나도 묻어있지 않았다. 김말자씨는 그제서야 그녀가 뒤로 넘어져서 혜정이 때문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른 달려들어 딸애를 들어 올렸더니 그제야 깊은 숨을 내 쉬며 몸을 일으켜세운다.
"그래, 어째 애기 얼굴이 눈에 익는다 했어.
주공아프트 살죠? 38동 307호"
엉덩이를 털며 일어서던 그녀가 김말자씨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다가 불쑥 이렇게 말을 건다. 그러고 보니 김말자씨도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인것 같다. 그런데 어디서 봤을까?
"나 같은동에 살아요. 208호에. 기억 안나?
큰애 이름이 경훈이 였던가? 작년에 우리차에 흙 뿌리고 놀다가 우리 애들 아빠한테 혼났었잖아."
그러고 보니 어렴풋이 얼굴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엉망이 되어버린 차 앞에서 무지막지하게 애 멱살잡이를 하던 아저씨를 말리던 아줌마가 저 여자였다는 부분에선 선뜻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았다. 그때 그 아줌마는-남편의 팔에 매달려 꼭 붙어있던- 작달막한 키에 펑퍼짐한 몸빼바지를 입었고, 뽀글뽀글 볶아 놓은 머리하며 정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줌마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는데, 지금 김말자씨 앞에 서있는 여자는 세련된 컷트 머리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원피스, 그리고 가는 허리에 사뿐히 걸쳐있는 벨트하며, 적어도 9cm는 될 것같은 높은 굽의 끈 샌달이 아무리 시간이 1년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두 여인을 겹쳐놓고 하나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예 모르는 남이었다면 얼마나 낮 뜨겁고 부끄러운 일인가?
허나 아는 사이라고 해도 김말자씨와 아랫집 여자 처럼 한명은 항상 사과를 해야하고 한명은 항상 용서를 해줘야 하는 입장에 선다는 것 또한 그리 유쾌한 사이인 것만은 아니었기에 굳어진 입가에 억지 웃음을 띄우며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이를 어쩌죠? 흰 옷이 엉망이 되어버렸는데...
애가 워낙 고집이 세서요. 죄송합니다. 옷은 제가 세탁소에 맡겨서 깨끗이 세탁해 드릴께요."
"애 들이 그럴수도 있지 뭘 그래요. 난 일보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라 옷은 괜찮아. 어차피 드라이 크리닝은 해야되니까 신경쓰지 말아요. 사람이 너무 경우 없이 구는 것도 밉살스럽지만 너무 깍뜻한것도 난 부담스러워 싫더라. 큰 애가 사고쳤을때도 세차 해준다고 했었지.
시간이 지나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도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였으면 됐는데 이웃끼리 너무 그러니까 좀 그렇더라."
딴에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서 세탁비까지 얘기를 했던 김말자씨는 다시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 여자 입장에서야 이웃끼리 뭐 그렇게까지 깍뜻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의사 전달에 있어서 만큼은 조금 서툴렀었던게 사실이었다. 더구나 지나간 일까지 들먹여 가면서 말이다.
그래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 만큼은 고마운 일이라는 생각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짖고 있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어설픈 미소로 목례를 한 뒤 혜정이의 손을 끌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울음은 그쳤지만 한참을 울었던 탓에 아직 숨쉬는 중간중간 꺽- 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하던 혜정이가 엄마가 손을 끌자 다시 입을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좀 전의 감정이 산뜻하게 정리가 안된탓에 딸아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 갔었던 것이다. 아무리 네살밖에 안된 꼬마라지만 그동안 겪은 경험(?)에 의하면 집에 가서도 편안하지 못하리라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여하튼 겨우 수습된 상황이 다시 시작될 기미가 보이는데 아랫집 여자가 다시 참견을 하며 든다.
"경훈이 엄마. 그러지 말고 그 고구마 나 주고 애기를 좀 안아줘요.
뭔 일인지 몰라도 많이 운 것 같은데 울음이나 그치게 하고 집에가도 되잖아. 그리고 왠 고구마를 그렇게 많이 샀데? 동네 잔치할려고 그래? 그럼 오늘 내가 집까지 들어다 줄테니까 나도 불러줘."
이렇다 저렇다 대꾸 할 틈도 주지않고 그녀는 고구마를 획 낚아채 갔다. 생각 같아서는 집에 올라가는 내내 혜정이에게 잔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김말자씨는 할 수 없이 혜정이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엎히라는 손짓을 했다. 고집이 세서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절대로 안하는 성격이라 집안 식구들 조차도 '독종'이라고 부르는 그녀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싫다는 거절 한번 못하고 아랫집 여자가 하라는 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으며 이마에서 흐른땀이 목덜미를 거쳐 가슴팍으로 흘러내릴때 쯤에 혜정이는 땀으로 범벅이된 김말자씨의 등짝에서 코까지 골며 잠에 떨어져 있었다.
그냥 걸어서 가자면 버스 두 정류장 정도지만 더운 날씨에 잠에 빠져 축 늘어진 애까지 업고 가는 길은 - 더구나 오르막길은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못 걷겠다는 생각이 들때 퍼뜩 그녀 생각이 났다. 분명 처음에는 같이 옆에 걸어 오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자꾸 옆으로 맥없이 쓰러지는 애 바로 고쳐 엎으랴,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차 피하랴, 눈으로 흘러 드는 땀 닦아내랴, 나름대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그녀를 뒤 돌아볼 생각도 못하 고 있었다. 아직 집에 가자면 10분은 더 가야 하는데 등에 엎힌 혜정이가 갈수록 무거워져서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 대로 상점앞에 짜놓은 작은 평상에다 혜정이를 눕히고 주인아저씨가 싫은 소리를 할까봐 음료수 두병을 샀다.
그러는 동안 좀 떨어진 시장 입구에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두 손으로 고구마를 앞으로 끌어 안고 오는 폼이 여간 무거워 보이는게 아니었다. 몇 걸음 못 옮겨서 다시 오른손으로 들었다가 다시 왼손으로.. 고구마가 자리를 옮길때마다 몸도 따라 휘청거리며 기우뚱 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김말자씨는 마음 같아선 달려가서 당장에 고구마를 들어 주고 싶었지만 혜정이를 ?또陟醮?평상이라는 것이 이름만 평상이지 어른들의 허벅지 정도 넓이 밖에 되지 않을 만큼 협소했던 터라 자칫하다가는 혜정이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어서 선뜻 자리를 비울수도 없었다.
"저기, 여기 예요. 이쪽에서 조금 쉬었다가 가죠."
좀 더 가까이 올때까지 기다리던 김말자씨는 고구마랑 씨름을 하느라 자기를 보지 못하고 지나쳐가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벌겋게 달아있는 얼굴엔 온통 땀이 범벅이 되서 조금전 혜정이를 안아 줄때의 단정한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금방 한증막에서 한 30분쯤 땀을 빼고 나온 사람 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여기 내려 놓으시고 이 음료수 좀 드세요. 어휴 얼굴에 땀이..."
여기까지 말하던 김말자씨는 아랫집 여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더 이상 미안한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가 김말자씨의 말허리를 자르며 물어 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누군지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