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497

[제19회]


BY ggummani 2002-06-14

“병국아, 이리 와서 앉아.”
미현이의 말에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본채 벽에는 정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좀 망설이는 듯 하던 그림자는 쭈삣쭈삣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좀 놀라서 병국이와 미현이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언제부터 병국이가 그 곳에 서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미현이가 놀라지도 않고 병국이를 부른 것은 더 당황스러웠다. 너도 여기 앉아, 하고 미현이가 말하면서 엉덩이를 조금 비켜주자 병국이는 조금 떨어져서 내외하듯이 돌아 앉았다. 나는 그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병국이는 중학교에 가면서부터 아니, 육학년 가을쯤부터 우리와 데면데면해졌다. 학교에서 만나도 무슨 급한 일이나 있는 거처럼 피해 가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하면서 병국이네 부엌 앞에서 불러 보기도 하고 했지만 그러는 것도 심드렁해져서 그냥 던져 두었다. 중학교를 가게 되자 여중과 남중으로 나누어 져서 더욱 만날 일이 적어졌다. 병국이 엄마의 말로는 병국이가 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꽤 잘 한다고 했다. 전 학년에서 수위를 다툴 정도라는 것이었다. 병국이는 키가 작았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도 그리 큰 키는 아니었지만 중학교에 가면서 쑥쑥 자라는 또래 남학생들에 비하여 작고 마른 편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미현이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나는 결국 이용이 조용필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조용필은 보통의 노래만 잘 하는 가수들이랑은 달라. 조용필은 노래를 만들 줄을 알아. 우리 나라에 남이 만든 노래 부르지 않고 자기가 노래 만들어 부르는 가수가 누가 있니? 다들 남의 노래 불러서 인기를 얻는 것이잖아. 그렇게 뛰어난 실력이 아니어도 좋은 곡만 받으면 다시 말해서 듣는 사람들 귀에 잘 들어오는 곡을 받아서 부르기만 하면 다 인기를 얻어. 진짜 실력자가 없다는 말이야. 그런데 조용필은 아니거든. 그리고 조용필의 가창력은 어슬퍼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거든. 나는 사실 가늘고 보드랍게 노래하는 포크 가수들은 싫어. 무슨 목소리들이 그러니? 정열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잖아. 나는 미현이의 얘기를 정신없이 들었다. 미현이는 마치 고등학생 아니 대학생처럼 나름대로의 주관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에 대하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미현이는 학교의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책을 많이 읽었고 그만큼 텔레비전도 광적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당시 우리들의 화제였던 로맨스북 시리즈에 대하여 혹은 캔디와 유리가면 같은 만화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의견을 우리 앞에서 당당히 피력하여 우리들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들었다.

병국이가 소리없이 슬금슬금 일어나 나 들어갈게, 하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뒷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잠시 시선을 딴 데 두고 있던 미현이가 내 귀에 데고 말을 했다. 미희야, 나 얼마전에 병국이랑 뽀뽀했어. 나는 소리도 지르지 못 하고 입으로 손을 가린 채 미현이를 바라보았다. 얼마전에 나 바쁜 일 있다고 도서관 일 보지 않고 학교에서 나온 일 있었잖아. 한달쯤 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병국이가 나를 꽤 오래 전부터 좋아했었거든. 육학년 때 우리 바로 옆 반이었잖아. 그 때부터 병국이가 나 좋아하는 것 나 알고 있었거든. 알면서도 계속 모른 척 했었어. 중학교에 들어간 후로는 잘 안 만나지데. 그래서 나도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선물을 하나 받았어. 왜 있잖아. 우리 아빠 왔다 가신 날.

그것은 이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삼월이었다. 속초의 살림을 정리하고 정식으로 이혼 절차를 밟은 미현이의 아버지는 부산에 집을 구해 미현이와 같이 살게 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실현이 되지 못 했다. 미현이의 아버지가 부산에 집을 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미현이와 함께가 아니었다. 새로운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지난 삼월 미현이 아버지는 그 여자와 함께 할머니를 만나러 왔었다.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미현이 엄마 보다는 좀 소박한 느낌을 가진 여자였다. 미현이는 많이 울었다. 미현이 아버지는 그런 미현이에게 이 분이 이제 네 새 엄마라고 했고 미현이는 제 나이보다 열 살 쯤 많은 그 여자를 엄마로 인정 할 수 없다고 했다. 미현이 할머니도 역시 탐탁해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여자가 임신을 했고 어쩌면 아들을 낳을 지도 모른다는 말에 솔깃해져서 허락을 했다. 날렵한 느낌 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기도 했다. 그 날 미현이는 많이 울었고 집을 나가서 하루 종일 어딘가로 쏘다니다가 밤중에야 들어왔다. 미현이 아버지는 미현이를 기다리다가 결국 만나지 못 하고 갔다. 니 아베가 니랑 같이 살자고 하는데 니는 우짰으면 좋겠노? 미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야, 니가 싫으면 그마 여거 있거라. 할매하고 살자. 그리하여 미현이는 언젠가는 아버지와 함께 살 거라는 꿈 하나를 접었다.

“그 날 집 나가서 발 닿는 데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병국이를 만났어. 사상역으로 갔지. 처음 갈 때는 기차를 탈 생각이 있었을 텐데 주머니를 뒤져 보니 회수권 몇장하고 동전 몇 개 뿐이더라. 그것 가지고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물에 떠 있는 오리 구경하다가 핫도그 하나 사 먹고 집에 왔어. 그리고 다음 날, 저녁에 병국이가 우리 집에 와서 시집 하나를 주고갔어. 윤동주 시집이었는데 그 속에 든 쪽지에 나 더러 힘내라고 써 놨더라. 그 뒤로 우리 두 번쯤 따로 만났어. ”
나는 뽀뽀까지 가게 된 경위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 정황 만으로도 좀 충격이기도 했다. 미현이가 또래에 비하여 많이 조숙해 보인 것은 국민학교 때 부터도 느꼈던 바였다. 그런데 뽀뽀까지 하고. 그 보다 더 나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미현이가 나 몰래 ‘연애’를 했다는 사실이었다. 좀 배신감을 느낀 나는 슬그머니 화가 났지만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 했다. 그냥 속상해 하면서 속으로만 무한히 섭섭하여 이 친구를 앞으로 어떻게 대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 듯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미현이 말했다.

“사실 그 뽀뽀는 우연이야. 그 날 빵집에서 빵 먹고 얘기하다가 버스타고 집으로 오는데 버스가 복잡해서 일어난 일이야. 병국이가 키가 작은 편이잖아. 내가 옆에 선 어느 아저씨를 피하려다가 균형을 잃어 넘어졌는데 키 작은 병국이의 목에 뽀뽀를 해 버린거야.”
“그래서...?”
“그래서는 뭐, 우리는 서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집으로 왔지. 버스에서 내려서는 서로 멀리 떨어져서 왔지. 그게 다야.”
여자치고 키가 큰 미현이와 남자치고 키가 작은 병국이, 그 순간의 광경을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날 지경이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초여름 밤의 서늘한 바람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미현이는 아니, 우리는 너무 빨리 나이를 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