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중학생이 된다, 그것이 우리를 부쩍 큰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했다. 미현이와 나는 같은 학교에 배치가 되었다. 희순이는 중학교를 포기했다. 희순이 엄마가 오빠도 돈을 벌어서 고등학교를 마쳤는데 정 공부하고 싶으면 나중에 니가 벌어서 하라고 하는 바람에 희순이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희순이 엄마를 찾아가서 그래도 중학교는 보내주라고 얘기를 하고 미현이 할머니도 희순이 엄마를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희순이 엄마의 논리는 간단했다. 나는 국민학교 딱 석달 다니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지가 정말 머리가 따라주면 지가 벌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여자 혼자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아들도 제대로 못 시킨 공부를 딸아이를 돈 들여 시키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저녁 식탁에서 희순이 엄마를 좋지 않게 말을 했다. 엄마는 여자도 배워야 살 수 있는 시대라고 했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내가 힘닿는 데 까지는 시켜 줄 테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딸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사실 엄마에 대하여 미안함이 많다. 나는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엄마가 생각 한 만큼 그렇게 까지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고 배우는 일을 즐긴 것뿐이다. 나는 내가 관심이 있는 것만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어린 나이에 좀 건방지게도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 같은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좀더 현명하지 못 했던 것을 엄마에게 미안하게 생각을 한다.
우리 셋은 겨울 방학 내내 뭉쳐서 지냈다. 미현이는 연극에 나는 시에 관심이 있었다. 우리는 미현이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맞추어 동생들까지 동원하여 연극을 꾸며 보기도 했다. 미현이가 꾸미는 연극은 주로 고전적인 동화들을 각색한 것이었다. 주인공은 늘 미현이였다. 신데렐라나 콩쥐팥쥐 같은 책들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함께 모여 배역과 대사를 정하고 공연을 했다. 옷장을 뒤져 엄마의 옷을 꺼내어 걸치고 엄마의 화장품으로 화장도 했다. 우리의 연극놀이를 시연해 볼 기회를 가진 것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나보다 두 살 아래로 곧 5학년이 되는 창건이가 반에서 양로원을 방문하기로 했는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 미현이는 우리를 공연에 참가시켜 주는 조건으로 극본을 써 주겠다고 했고 반장인 창건이가 그러겠다고 했다. 양로원이라는 특성상 효성스러운 주인공이 필요 할 것 같아서 우리는 함께 머리를 맞댔다. 오랫동안 몸져누운 어머니를 위하여 효성스러운 소녀가 온갖 고생끝에 하늘 복숭아를 가져다가 어머니에게 드려 병을 낫게 한다는 줄거리였다. 주인공은 물론 미현이였고 내가 병든 어머니역을 희순이는 선녀 역할을 했다. 동생들을 두고 집을 비울 수가 없어서 동생들에게도 나무나 돌이나 바람같은 역할을 주어 모두 참여를 시켰다. 분장도 어설펐고 실수연발에다가 무대도 제대로 못 갖춘 연극이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좋아했다. 미현이는 양로원 공연 이후에 한껏 고무되어 나는 꼭 훌륭한 배우가 되고 말거라고 주먹을 쥐었다.
미현이를 보면서 나도 가끔 종이에 시 비슷한 것을 써 보면서 꿈을 키웠다. 그 무렵에 쓴 시들은 모두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 든 소녀의 감성이 마구 드러나는 것이어서 매우 어설펐다. 내가 그 즈음에 참 좋아했던 작가는 동시인 윤석중선생 이었다. 선생의 동시“넉점 반”에 꼴딱 넘어가서 오직 이러한 감칠 맛 나는 시를 쓰는 것만이 소망이었지만 생각과는 달리 내가 쓰는 시들은 치졸한 온갖 감정과 유치한 정서의 반복이어서 이래서는 시인이고 뭐고 가능성이 없을 것 같기는 했다. 그 점은 지금도 고쳐지지 않아서 여전히 나는 글을 쓸 때 감정의 통제가 잘 안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스로 참 기특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일기만은 참 열심히 썼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 할 때 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는데 이사를 다니면서 그 모든 기록이 없어져 버렸다. 그 기록을 잃어버린 후에 나는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 내 일기를 누군가가 일일이 한 장한 장 읽고 즐거워하는 상상이었다. 내 속살을 통째로 드러내 버린 것 같은 잔인한 고통이 밀려왔고 나는 어른이 되면 이사 같은 것은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도 했었다.
그 때에 우리가 했던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에 대한 상상에는 집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목욕탕에 관련한 것이었다. 6학년이 되고 난 다음부터 딸들은 함께 목욕을 다녔다. 창건이는 남자여서 이웃에 있는 친구와 같이 가거나 아버지가 데리고 가거나 했다. 일요일이면 나와 미현이, 희순이, 그리고 정순이와 선희, 진희가 함께 목욕을 갔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 까지는 그다지 창피하지 않았지만 중학교에 들어 간 시점부터 목욕탕에 가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을 먹고 소쿠리에 비누며 수건, 갈아입을 속옷 등을 챙겨서 목욕탕으로 향하는데 시장통을 통과하여 사상역 방향으로 500M쯤 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목욕탕이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아래 목욕 바구니를 들고 걸어가노라면 삶이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느껴 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 때 어른이 되면 반드시 목욕탕이 있는 집에 살거라는 결심 아닌 결심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