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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님이 하신 김치를 친정에 나눠주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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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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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BY ggummani 2002-05-02

방 안은 좀 침침했다. 꽤 큰 유리창이 있었지만 창호지로 된 덧문까지 모두 닫아 놓아서 빛이 잘 스며들지 않았다. 게다가 구식으로 지은 집이라 천정은 낮고 넓은 마루에 비해 방은 작았다. 한쪽에 낡은 여섯 자 농이 놓였고 노인은 그 맞은편에 죽은 듯이 누워있다. 나이로는 육십대 중반이었지만 이미 흰머리가 대부분에 쪽을 지기 위하여 땋은 머리를 풀고 있어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빨간 내복위에 실로 짠 얇은 윗옷 하나를 덧입고 이불을 목까지 덮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아버지가 말린다. 아이다, 내가, 내가 일나끼다. 굳이 노인은 일어나고 싶어 하고 아버지가 손을 잡아 준다. 아버지의 손에 의지해 일어 난 노인은 그 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가까이 부여잡고 어헝어헝,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러는 냥을 잠시 두고 본다. 우리는 눈 둘 때가 마땅찮아서 고만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앉았다. 아버지는 고만 하소, 라고 하고 우리들을 향해 세배를 하라고 한다. 우리들, 나와 창건이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세배를 한다. 그래, 아이고 니들이 왔나, 하면서 노인은 또 눈물을 쏟는다. 노인이 내 손을 잡아끄는데 나는 못내 그 손이 불편하여 빼고만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분위기이다.

잠시 후에 너들은 나가 놀아라, 하는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여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는 마루로 나왔다. 창건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이 마루가 낯설지 않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아침이면 햇볕이 방안까지 주욱 밀려드는 넓은 쪽마루. 오래 된 마호가니 소파와 장식장. 장식장 안에 든 아무도 읽지 않는 몇 권의 정치적인 제목을 단 책들과 외국의 풍광 사진을 담은 영어로 제목이 붙은 여행기. 그리고 두어 병의 양주들. 나의 할머니인 노인이 지금 누워 있는 방위에 붙은 커다란 액자 속에는 낡은 흑백 사진 몇 개가 촘촘히 들어있다. 군복을 입고 씩씩하게 서 있는 사진 가운데는 나의 아버지도 섞여있다. 나는 마루를 나와 댓돌위에 신발을 신고 가만히 내려섰다. 마당에는 내가 참 좋아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가운데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오래 된 무화과 나무였다. 낡은 철 대문 옆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는 내가 이 집에서 고모의 손에 자랄 때 늘 먹던 것이었다. 호리병박 모양으로 조그맣게 열리는 열매를 쪼개면 자주빛 속이 비치던 무화과 열매. 보기와는 달리 아주 달고 맛있었다고 기억이 되는 그 열매. 이중으로 된 마당은 중간의 담을 지나면 밭으로 통한다. 할머니는 건강 하실 때는 이 곳에 야채를 손수 가꾸셨다. 아버지가 신혼시절 시멘트 블록 만드는 공장을 하셨다는 터. 아버지는 아는 사람과의 거래가 잘못되어 결국 빚만 지고 공장을 문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직장을 다니면서 빚은 갚았지만 아버지는 못내 아쉬움을 접을 수가 없었나 보았다. 아아, 소리를 지르면 누군가가 있어 대답을 하던 우물도 여전했고 내가 참 좋아하는 주황 장미나무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자라고 있었다. 나는 우물에 내 얼굴을 비춰본다. 그 다지 깊지 않다. 얼굴이 가까이 보일 정도다. 블록으로 쌓은 우물에 초록색의 이끼가 끼어 있다. 나는 어려서처럼 아아, 소리를 질러 볼까 잠시 생각 해 보다가 그만둔다. 대신 물에 비친 이지러진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설날, 우리들은 오랜만에 느긋했다. 아버지와 엄마가 다 집에 있고 집에는 솜씨 좋은 엄마가 만든 먹을거리들이 넉넉했다. 우리들은 아침을 먹고 전 하나씩을 입에 물고 밖으로 뛰어 나왔다. 집안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모두가 시골로 가 버리고 성구네 언니들도 명절을 쇠러 가고 국밥집 할머니는 손녀인 미현이를 이끌고 큰 동서를 보러갔다. 우리는 하릴없이 동네를 배회했다. 주머니에는 아버지가 찔러주신 용돈도 있었지만 만화 보러도 가지 않았다. 성당 마당을 기웃거리다가 이야기가 가득한 성당의 색유리를 좀 구경하다가 집에 갈까, 하는 내 말과 함께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가서 동화책이나 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니 좁은 부엌에 못 보던 구두가 놓였다. 우리가 문간에 섰자, 구두의 주인이 밖을 내다보았다. 작은 아버지였다. 나에게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이 아이들에게는 낯선 얼굴이다. 아이들은 모두 내 등 뒤로 와서 숨었다. 작은 아버지는 우리들 더러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들어갈 염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에 작은 아버지는 돌아갔고 우리들은 설을 하루 넘긴 오늘, 할머니를 찾은 것이었다.

창건이가 나와서 내 곁에 붙어 섰다. 머하노, 그냥, 들어가자, 싫어. 그냥 여기 이러고 있을 래. ... ... 창건아, 여기 좋아, 말이 없다. 지난 이년 남짓 동안 우리는 할머니를 찾아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못 되고 사기꾼으로 몰려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거의 한 달간 엄마는 돈을 구하고 보증인을 구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정치권하고도 연관이 닿아있고 경제력도 있는 큰 아버지의 도움을 얻기 위하여 엄마는 많이 노력을 하셨다고 했다. 아직 어린 우리로서야 다 알 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엄마는 큰 아버지와 할머니 앞에서 말로 할 수 없는 곤욕을 치르면서 빌고 빌어 아버지를 도와 달라고 했다고 한다. 모든 잘못된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면서 엄마는 큰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냈고, 검찰에 몸담고 있던 외삼촌의 도움도 받아서 아버지는 풀려 날 수가 있었다. 겨우 아버지가 풀려나고 우리는 정말 몸만 추려서 지금 살고 있는 계란 할머니집으로 피신하다시피 들어가 살게 되었다. 한동안 마음을 못 잡던 아버지가 전부터 하던 목수일을 다시 되었고 차츰 생활도 안정이 되어 갔지만 엄마는 그 굴욕을 용납 할 수가 없었다. 특히, 군대를 막 제대한 막내 삼촌이 술에 만취해서 엄마에게 행패를 부린 것은 두고두고 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지를 씻기고 믹이고 길렀는데,,, 그리하여 우리는 본가와 뜸해졌고 이년 남짓 할머니를 찾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할머니가 병이란다. 손자손녀들을 못 보아서 병이 났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둘째 며느리였다. 아버지의 형제는 자그마치 팔남매나 되었는데 그 중 유일하게 큰아버지만이 대학을 나왔다. 고모들은 당연히 국민학교도 다니다 말았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은 국졸 아니면 중졸이다. 학벌을 기입 할 난이 있으면 고졸이라고 쓰지만 그것은 정규학교가 아니라 공민학교다. 형제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기술을 배우고 일을 해야 했고 큰 아버지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서 나름대로 성공을 하고 가족을 가까이에서 돌볼 수가 없자 이 모든 책임을 아버지가 떠맡았다. 당연히 아버지의 아내가 된 엄마가 맏며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엄마는 우리가 계란 할머니집에 들어가게 되기까지 십년 남짓 할머니를 모시고 집안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아버지는 엄마를 사랑했고 할머니를 잘 모시고 동생들에게도 멋진 형이 되고 싶어 했지만 불행히도 사업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성실하고 곧고 바른 아버지는 융통성도 없었고 발을 넓히는 데도 관심이 적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그러한 성품을 평생을 두고 싫어하였고 자신의 처녀적 이상형은 영웅같은 남자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엄마를 보면 그러한 아버지기에 여하한 경우에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오늘 날까지 엄마와 아버지가 함께 하게 한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여자라는 것을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알게 되었듯이 할머니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일이 아니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고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였다.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가 아니었고 할머니도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니어서 그 분들에게도 처녀시절이 있었고 나아가서 꿈 많던 소녀시절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귀염받는 딸 아이였던 적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야 나는 그 분들의 인생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런고로 아직 어렸던 그 무렵 할머니는 엄마를 곤고하게 하는 존재요, 우리만 보면 때 없이 눈물부터 쏟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불편한 존재였다. 맏딸이라는 의무감으로 나는 매해 할머니를 찾았지만 한번도 할머니가 편안하거나 좋았던 기억은 없다. 그 설날 이후에 할머니는 여전히 잔소리가 많고 먹고사느라 바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해에서 비롯된 온갖 비난들을 퍼붓고는 했다. 이제는 늙고 시어머니로서의 권력도 없고 오직 오래오래 산 당신의 삶에 대한 회한만이 가득한 할머니를 보면 그분도 어려서 소녀였을 때는 이렇게 힘없이 늙어가는 것이 꿈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