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경제용어의 하나처럼 되어버린 IMF체제 아래서 남편은 남들이 그러하듯 실직자가 되었다. 만 삼년을 실직 상태로 있는 동안 빚은 산처럼 높아만 갔다. 간간 일용직으로 일을 했지만 그것으로는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었다. 남편이 겨우 직장을 구해 일을 시작했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빚 갚기에도 허덕여 결국 시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때 나는 엄마의 그 지겹고 길었던 겨울을 수없이 많이 떠 올렸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비가 많은 장마철은 쉬는 계절이었다. 비가 오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 늦은 봄부터 장마철까지 일을 하는 날 보다 쉬는 날이 더 많았다. 그 보다 더 심한 것이 겨울이었다. 윗 지방과 달리 눈이 적은 부산에는 겨울에도 비가 많았다. 윗지방에 눈이 올 때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겨울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당연히 쉬었지만 기온이 많이 내려가서 추운 날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시멘트가 얼어버려서 미장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한 편이 일을 못 하면 다른 사람들도 같이 쉬어야 했다. 불의가 들끓는 공사판에서 재료공급이 제때에 되지 않아서 일을 못 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결근을 몰랐고 꾀 부리는 것을 몰라서 성실한 것으로 이름난 아버지 였지만 일개 노동자인 아버지가 그 모든 상황을 마음대로 바꿀 능력은 없는 것이어서 겨울 동안 아버지는 주로 집에 계셨다.
엄마는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우리가 부엌일을 돕는다고 하지만 반찬을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하고 한달에 두 번 쉬는 휴일에 우리 네 아이들을 데리고 묵은 때를 벗기러 가는 것도 엄마의 일이었다. 때로는 엄마가 미처 못 챙기는 사이에 학교에서 옮아 온 이를 박멸 시키는 것도 엄마의 주요한 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아직 철없는 아이들은 우아함과 고상함을 기대했다. 엄마는 우아하고 싶어도 우아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저녁, 퇴근을 하고 온 엄마가 더운 물을 안 끓여놓았다고 화를 냈다. 지금처럼 보일러만 켜면 더운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던 시절에 우리는 솥에 더운 물을 끓여서 세수를 하고 머리도 감고 설거지도 했다. 그런데 노느라고 바빠서 그 날은 더운 물 끓이는 것을 소홀히 했다. 얼굴이 시뻘겋도록 화가 난 엄마는 더운 물이 끓는 동안 찬 물에 걸레를 빨아 오게 하여 방을 닦게 했다. 손의 색깔이 푸르딩딩하게 변하고 눈물이 낫지만 참을 수 밖에 없었다. 엄마가 무섭기도 하고 내가 동화 속에 나오는 신데렐라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럽기도 했다.
어느 날은 밥상에서 밥을 먹다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어느 아주머니가 도시락을 싸 왔는데 딸이 담근 김치를 반찬으로 가져왔다는 얘기였다. 공교롭게도 그 딸은 나와 동갑내기였다. 갑자기 넘어가던 밥이 목구멍에 걸렸다. 주눅이 드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죄스럽고 갑갑하여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 겨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엄마가 우리들의 작아 진 개바지를 풀어서 뜨거운 김을 쐬어 잘 감아서 떠 주었던 장갑과 목도리이다. 개바지라고 불렀던 그 옷은 엄마가 아버지의 옷이나 집에 남아있던 헌 실들을 모아서 대바늘로 뜬 것이었는데 겨울에 바지 속에 내복 대신에 입기도 하고 잠옷 대용으로도 입었다. 어려서 입던 개바지를 풀어서 엄마는 선희를 위해서 색동 무늬가 있는 알록달록한 장갑을 떠 주었고, 진희와 창건이에게는 모자를 만들어 주었다. 나에게는 엄마의 스웨터를 풀어 하늘색의 폭신한 목도리를만들어 주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의 꿈도 앞치마 예쁘게 입고 요리하고 따뜻한 난로 곁에서 행복하게 웃으면서 과일을 깎고 아이들을 위해 뜨개질도 하고 수도 놓는 평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렇게 사소한 꿈을 이루기에도 우리의 현실은 각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