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앞에는 유난히 키 큰 은행나무가 많이 서 있었다. 잎은 한껏 노랗게 물들어 제 스스로 취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무더기로 떨어져 내렸다. 비, 노란 비. 버스 정류장은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밝은 주황색으로 염색을 한 여학생 하나가 정류장 의자에 와서 앉는다.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조금은 짜증섞인 목소리로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무어라고 투정을 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는 듯 하더니, 이내 보드라운 미소를 띄면서 전화를 마무리 하고 뚜껑을 닫는다. 아마도 연인과의 통화가 아닐까 나는 무심결에 짐작을 한다. 여학생은 초록과 주황색의 가는 줄무늬가 번갈아 있는 몸에 딱 붙는 가디건을 입고 부분부분 올이 빠진 청바지를 입었다. 핸드폰을 덮고는 손거울을 꺼내어 잠시 매무새를 매만지더니 이내 저쪽에서 나타난 또 다른 여학생 무리에게 손을 흔들면서 무어라 소리를 지른다. 그들은 금새 한 다발의 화려한 꽃으로 화하고 곧 건널목을 건너 저쪽 편의 골목으로 사라진다.
아름드리의 은행 나무 아래에 나는 등에 업힌 아이 때문에 약간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서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 본다. 그러면서 때때로 고개를 들어 지나가는 차들을 유심히 살펴 보기도 한다. U턴 지점인 이 곳에서 나는 건너편에 있다가 U턴을 하는 차들을 특히 유심히 본다. 저들 가운데 있지 않을까. 얼굴도 모르면서 전화 한 통화로 약속을 하고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더구나 나는 아직 시내 지리에 어두워서 이 곳이 정확하게 어디 쯤 되는 지점이며 우리 집과의 방향이 어떻게 되는 지도 모른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기사에게 물어 가면서 이 곳, 울산에서 하나 뿐인 종합 대학 앞을 나는 찾아 온 것이다. 나는 지금 사채업자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학생들이 사라진 골목을 눈으로 따라 가다가 나는 다시 시계를 본다. 평소에 시계를 차지 않는 나이지만 오늘은 필요할 것 같아서 손목에 차고 나왔다. 기다린지 겨우 오분도 채 안 되었지만 한 시간은 지난 듯 마음이 초조하다.
문득, 버스 정류장에 와서 서는 버스 한 대에 나는 눈길을 멈추고 멈칫 놀란다. 127번 버스, 그 버스의 번호가 아니라 그 버스의 행로에 깜짝 놀라는 것이다. 버스는 부산까지 다니는 시내버스였다. 나는 울산과 부산을 이어주는 시내버스의 존재 자체에 놀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배어 나온다. 저 버스를 타면 부산을 갈 수 있구나, 눈 딱 감고 이대로 이 사지를 벗어나고만 싶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책임"이라고 한다. 참 무거운 짐이지만 결코 내 몫의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는 바로 그것, "책임"의 무게.
나는 엄마가 참 싫었다. 내가 철 든 후에 기억하는 엄마는 한 마디로 말해 쌈닭 같았다. 무슨 시한 폭탄처럼 언제든지 폭발 하기 위해 준비된 것 처럼. 엄마는 체구가 참 작은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바로는 엄마 또래 가운데 엄마는 가장 작은 사람이다. 당연히 완력이 센 편도 못 된다. 엄마는 흥분도 잘 하는 사람이어서 한 번 냉정을 잃어 버리면 겉잡을 수가 없다. 내가 엄마를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엄마의 근거없는 온갖 오해와 편견들에 있었다. 엄마는 오해를 잘 했고 아전인수식으로 남의 말을 해석하는 데 선수였다.
나와 둘째가 학교에 가고나면 어린 여동생 둘이 남았다. 요즈음 처럼 탁아시설이 없었던 그 무렵에 둘은 친구처럼 그렇게 언니와 오빠가 없는 집을 지켰다. 성구 어머니가 점심은 챙겨 주셨지만 자기 집 일 만으로 바쁜 성구 어머니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어느 날, 나이만 먹었지 아직 철이라고는 없는 주인 집의 막내 아들이 두 아이들을 데리고 놀아 준다는 것이 우리 집의 사정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얘기들을 한 모양이다. 저녁 밥상에서 다섯살 먹은 막내 진희가 엄마에게 엄마, 빚이 뭐야, 우리가 빚이 많아서 나중에는 엄마랑 아빠랑 같이 살 수가 없을거래. 엄마가 젓가락을 탁 놓았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해. 저기,,어쩌구,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못 했다. 이미 엄마는 신발을 신고 있었고, 눈 깜짝 할 사이 마당 한 가운데 서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할망구, 나이를 물라카먼 곱게나 무라. 아들 데꼬 지금 머하는 짓이고?" 엄마가 할망구라고 지칭하는 이는 바느질 할머니였다. 할머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린 우리들의 눈에 비치는바였고 사실은 오십대 초중반의 나이밖에는 안 되었다. 젊어서 혼자되어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잘 길렀다. 아들은 서울의 유명한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다닌다고 했다. 바느질 할머니는 그 아들과 여고 다니는 딸이 큰 자랑이었다.
바로 며칠 전, 물 문제로 엄마는 이미 바느질 할머니랑 한 바탕 다툼이 있었다. 이제 막 상수도가 보편화 되기 시작하여 교과서에 우리 마을에도 상수도가 들어왔습니다.어쩌구, 하는글이 실리던 무렵이었다. 물은 시간을 두고 공급이 되었고 그 시간을 놓치면 이웃의 우물이 있는 집에 길으러 가야했다. 학교를 마친 후, 어른들이 없는 집인 나와 희순이, 병국이의 가장 큰 일은 물을 받아 놓는 것이었다. 양동이를 데어 물을 받고 각자의 집에 있는 독에 갖다 부어 놓고 사용을 하는데 힘이 약하니 한 번에 많은 양을 받을 수가 없고 그래서 늘 우리들은 물이 부족했다. 그 날은 엄마가 쉬는 일요일이어서 엄마가 집에 있었다. 엄마는 양동이를 데어 물을 받는 한 편으로 노란 바께스를 가져오게 하여 엄마가 물을 받아서 이고 가면 노란 바께스에 물을 채워 나로 하여금 들고 오게 했다. 바느질 할머니네는 여고에 다니는 유리언니가 양동이로 물을 나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잠시 나와 보다가 노란 바께스를 대어 물을 받는 나를 보게 되었다. 바로 다음 순서가 할머니네 순서였는데 할머니는 바께스를 치우고 할머니네 양동이를 갖다 대면서 "니는 좀 있다가 물을 받아라"하는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 뒤에 갖다 대려고 하는데 엄마가 그 광경을 보았다.
"아, 왜 그래요? 우리 순선데."
"방금 받아 갔잖어. 내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그라구만. 빨랑 받아 놓구 갈 데가 좀 있어서."
"아, 바쁘먼 다 바쁘지 아지매만 바쁘요? 미희야, 양동이 이래 대라."
어쩔 줄을 몰라 선 나를 향해 말을 하면서 엄마는 양동이를 수도 꼭지에 갖다댔다.
"순서대로 받는데 어째 자네는 동이를 두개나 두고 혼자 물을 다 받아갈라구 난린감. "
"우리는 아가 맨날 물을 받으니까 물이 맨날 모지란다 아이요. 오늘 내가 있을 때 물을 좀 받아 놀라고 그라요."
그러면서 엄마는 할머니네 동이를 치우고 우리 바께스를 놓았고, 할머니는 또 우리 바께스를 들어 치웠다. 엄마는 와 이라요, 하면서 굳이 양동이를 치우고 바께스를 놓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유리언니가 할머니를 말린다. 아이구, 엄마 왜 이래, 볼썽 사납게.. 두 사람은 어깨와 발을 맞 붙이고 딱 버티고 섰다. 씨름이라고 하듯 밀고 당기고를 하다가 완력으로 좀 부족한 엄마가 살짝 기우는 듯 보이는 순간, 갑자기 솟구치듯 엄마가 양동이를 던지고 할머니를 화악 밀어버렸다. 한 손으로 양동이를 든 채 할머니는 아이쿠,외마디 소리와
함께 수돗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시멘트 바닥에 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넘어진 할머니는 고만 욕을 섞어 가면서 엄마에게 누운 채로 소리소리를 지른다.
"아이구우, 동네 사람들~~ 좀 나와 보라요오~~ 이 젊은 년이 늙은이를 치네. 물 한동이 욕심 나가지고 사람을 친다아."
"사람을 치기는 누가 쳤다고 지 풀에 넘어지고는.. 마음을 좀 곱게 써, 나이를 먹었으먼 나이 값을 해야지."
"이 년, 그래, 이 년, 한 번 해 보자."
꼼짝 못 할 것 같아 보이던 할머니가 갑자기 벌떡일어나더니 엄마 머릿채를 잡는다. 엄마도 지지않고 할머니의 머릿채를 잡는다. 여자들은 꼭 싸우면 머릿채를 잡고 싸운다. 소싸움에서 소가 뿔을 맞대듯이 여자들은 그렇게 서로 머릿채를 잡고 정수리를 맞대고 싸운다. 그 싸움 한 판에 모든 것을 건 듯 하다. 어찌 되었거나 두 사람의 머리 맞댐은 십분도 못 되어 결말이 났다. 수돗가라서 집안에 세 든 사람들이 모두 나와 있었던 데다가 마침 일요일 이어서 어머니를 보러 온 주인 집 큰 아들이 나와서 환자 있는 집에서 이게 뭔 시끄러운 일인가고 소리를 질러 버렸기 때문이다. 성격이 급하고 덩치가 산 만한 데다가 국밥집 할머니 표현에 의하면 "꼭 임꺽정이 처럼 사납게 생긴' 주인 집 큰 아들은 모든 세 든 사람들이 다 무서워했다.
그 날의 싸움에서 분을 다 못 풀고 끝낸 엄마는 오늘에야 말로 결판을 내 버리고 말겠다는 듯이 마당에 장수처럼 버티고 서서 바느질 할머니의 성을 돋우었다. 저 년이 미쳤나? 먼 소리를 나부랑 댄디야? 하면서 방 안에서 대거리를 하던 바느질 할머니가 엄마가 쉽게 물러 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버선발로 뛰어 나와서 엄마의 가슴께를 확 밀어부친다. 니 시방 미쳐부렀냐? 어데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와서 어데서 행패냐, 시방. 이미 작정을 한 엄마는 다짜고짜 할머니에게 머리를 디밀면서 어데 한 번 해보자, 고 했다. 두 여자는 달빛 아래에서 머릿채를 뽑히고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옷이 찢겨 가면서 싸웠다. 동네 사람들이 그만 싸우라고 뜯어 말리고 할 때 마침 오신 아버지와 유리 언니가 두 여자를 떼어 끌어 각자의 집으로 들어 갈 때 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엉망진창으로 허트러진 엄마를 방안에 밀어 던지면서 좀 조용히 살자, 라고만 했다. 정말 아버지는 조용히 살고 싶어 보였다. 사람들하고 부딪히는 것이 싫고 한달에도 몇번씩 찾아오는 빚쟁이들과 승강이를 하는 데도 지쳤다. 정말 그림자 처럼 살고싶은 것, 그것이 아버지의 소망이었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네?"
"오늘 저 만나러 오시겠다고 오전에 전화하신 분, 맞죠?"
"아, 네."
검은 색의 갤로퍼가 내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