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준은 몇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었다.
인심 좋은 주인은 시원한 수정과를 내주며 자리를 함께 했고, 서로의 사는 이야기로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었다.
곰같은 모습에 말도 잘 하지 않던 선국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달팽이 관의 뚜껑을 닫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고, 분위기는 금새 흐려 지고 있었다.
몇몇 친구들은 말리기도 했었지만 선국이의 성격은 막무가내 였다.
"나쁜놈! 니가 선혜 인생 망친거 알긴 알어? 이 나쁜놈. 죽일놈.
선혜가! 어? 선혜가 왜 그렇게 됐는데... 너때문이야 임마. 너때문"
듣고 싶지 않았던, 잊어 버리려 노력했던 옛애인 선혜 이야기 였다.
입을 닫고, 묵묵히 듣고만 있던 명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픈 과거 였다. 직접적으로 사랑한 여자는 아니었지만, 사랑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고, 미래를 서로 생각했었으니깐...
미국으로 무전 여행을 떠나기 전만 했어도 선혜와 명준은 오누이 처럼, 때론 친구처럼. 과커플로 남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다
대령집안의 외동딸로 자란 선혜는 욕심도 많고, 거기다가 이쁘기 까지 했었다. 내게는 둘도 없는 신부감이었다.
깍쟁이 같은 성격과 외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명준에게만은 따스하고, 친절했었으니깐... 그게 사랑이라고 굳게 믿은 선혜였으니깐...
명준은 선혜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한여자의 인생을 밟아 버린... 선국이의 첫사랑을 모른척 했던 명준이었으니깐...
미국으로 무전 여행을 다년 온뒤 명준은 여러일로 마음이 찹찹했다.
백인들의 세계에서 동양인으로 차별받으면서도, 한국이라는 나라를 생소하게 생각하고 살고 있는 그 여자를 보며 안타까웠다.
하지만 무전여행은 나에게 선혜를 놓아줘야 겠다는 마음을 굳게 서게 하기도 했다. 선혜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 아닌 우정이라는 것을. 내게 있음 행복할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상 옆에 놓아 둘수 없었다.
신촌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이별을 고했을때... 선혜는 기가 막히다는듯 나를 바라봤다.
"기가막혀. 내게 지금 헤어지자고 했어? 그런거야?"
"... 미안해"
"미안해? 미안한건 알어? 왜? 미국 여행에서 꽤 괜찮은 백인 여자를 하나 꼬셨는 가보지?"
"그런거 아냐"
"그럼? 이유가 뭐야? 나처럼 좋은 여자를... 싫다는 이유가 뭐야?"
"... "
"이유 없지? 그래... 그럼 헤어질수 없어"
"널 ... "
"사랑하지 않는 다는 유치한 레파토리? 속지 않아
당신은 여려. 나처럼 강한 여자가 지켜줘야 해"
"그래! 나 약해. 선혜 너처럼 좋은 여자 다시 못만난다 해도 헤어져야 겠다"
"독하군. 최명준 니가 이렇게 독할준 정말 몰랐어!
놀랍다! 새로운걸 알게 되어서...
비참하게 매달리고 싶은 마음 버리겠어!
이것만 알아둬! 니가 내곁을 떠나는 동시에 내 인생은 바닷물에 던져진 조개껍질과 같은 거야! 알겠니?
부모 친구 학교 모두 버릴꺼야! 무참하게! "
"선혜야"
"선혜라는 이름조차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선혜의 강한 자존심을 종이 조각 구기듯 구겨 버린 내가 진정한 남자 일수 있는가?
이렇게 좋은 여자를 보내고, 후회 하진 않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1997년 겨울밤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