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진짜 다른 문제 생긴건 아니지?”
현화가 계속 내 눈치를 보고 있다.
“아니야. 근데 넌 저녁은 먹었니?”
일곱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아니..... 언니는? 물어보나 마나지...?”
“근데 너 오늘 미팅 있다고 하지 않았니?”
“미팅? 괜히 나갔나 봐.”“왜?”
“하늘이 때문에 나가긴 했지만 왜 그딴데에 시간을 낭비하는질 모르겠어. ”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럼 시간 낭비 안 하는게 무언데?”
“얻어지는게 있어야지..... 머리에 무스 바르고 나도 안 신는 마녀 같은 신발 신고 나오는 거 보면 저 머릿속엔 뭐가 들었나 싶다니까.”
“너도 별 수 없는 내 동생이네 뭐!”
“무슨 소리?”
“왜 내 동생이라는 말 듣기 거북하니? 그런 식으로 이유없이 심각해지는 것, 그거 말이야.”
“아니다. 나는 언니처럼 늘 그렇지는 않아. 확실한 내 주관이 있지.”
현화의 이런 주장은 어제 오늘 있었던 일도 아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여자아이, 아버지에 대한 환상 같은 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스함이 그립다가도 도무지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그래서 그럴까? 현화는 이성문제 만큼은 더 없이 자신을 움추려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이 아이는 자신만의 어떤 주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번 학기말 시험은 학점 잘 나올 것 같니?”
“전액은 안 되더라도 반장학생 정도는 안 되겠나 싶어.”
“그러니? 다행이다.”
반가운 마음에 내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었다.
“미안해..........”
“뭐가? ”
“언니한테는 사실 늘 미안했었어. ”
“얘 봐! 됐네, 됐어..... 그렇게 말하자고 들면 나도 미안하네 뭐!”
나 밖에 모르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우리 엄마, 그러고 보면 영 인복이 없는 것만도 아닌 것 같애. 그치?”
“왜? 우리가 효녀라서?”
“암, 효녀지. 요사이 우리 같이 사는 애들 있는 줄 알어?”
“그래..... 그건 니말이 맞다....”
오랜만에 현화와 외식을 할 양으로 대충 다시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좀 늦은 감은 있었지만 시내 중심가에 있던 풍미당에서 라볶이를 시켜 놓고 먹기 시작하고 있었다.
준우하고도 자주 왔던 곳이고 현화하고도 처음 온 곳은 아니다.
테이블만 해도 수 십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대형 분식 전문 식당이었는데 특히 라볶이는 어디서도 먹어 보지 못한 특별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매운 음식이 빈속으로 들어가더니 기어이 속을 핥고 있다.
딸려나온 국물을 조금씩 입으로 떠 넣다가 오늘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음식이라고는 이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따. 다시 김밥을 주문하려고 잠깐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맞은 편에 앉아 있던 현화 또래의 아가씨와 마주 앉아 있는 한 남자에게 시선이 가서 꽂혔다.
그들을 보면서 부녀지간일까 애인 사이일까를 먼저 생각했다.
현화한테 슬쩍히 귀엣말로 속닥거려본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언니는 무슨 그런데에다 신경을 다 쓰누. 바보같애....”
내가 생각해도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난 가끔씩 저런 모습이 부러울 때가 있어. 우리 또래의 친구 말고......”
젓가락을 손에 든 채 현화가 날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다.
“준우오빠가 갑자기 불쌍해지네......언니, 혹시 준우오빠한테 별로인거 아냐? 그냥 어쩌다 보니까 정들었고 뭐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게 보이니? 그렇게 보인다면 그렇겠지.....”
“점점......”
“나도 준우한테 오빠라고 부를까?”
“내 참..........”
진심이었다. 오빠라는 호칭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쓰는 현화가 오히려 부러웠다.
결혼이라는 것에 연연해서 만나기 보다는 나한테도 그런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우리가 말장난을 하고 있을 때 어느 사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는데 어린 여자 아이가 남자의 팔에다 자신의 팔 한쪽을 끼워 넣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면 나도 아마 저들처럼 밖에서 따로 만나 데이트를 즐겼을 거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갖가지 필름들이 지나가면서 준우의 선한 웃음을 끌어내 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어졌다.
매일 같이 보던 그의 얼굴인데 지금 당장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팔 한쪽을 내가 가지고 싶어진다.
“참! 준우 만났다면서....? 니한테 뭐라고 하든?”
현화가 준우 얘기를 꺼집어 냈을때 부터 궁금해 했던 것들이었다.
내가 그의 엄마를 만난 이후로 보여준 내 태도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강의 시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찾아왔었어. 한참을 기다렸대나. 그런데 좀 초조해 보이는 것이 밝은 얼굴은 아니었어. 누가 날 찾는다고 해서 가 봤더니 영 낯선 얼굴은 아니고 누군세요 했더니 느닷없이 현화야. 나 모르겠냐. 그러는거야. 낯은 있는데... 했더니 그래도 그렇게라도 기억 해주니 고맙다. 그러더니 덕산초등학교에 다녔다고 ,언니 하고 동창이었다고 그러대. 그리곤 곧바로 자기 친 동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얼마나 정감 있게 대하는지....그러면서 언니 좋아한다고 첫 마디가 그랬어. 우리집에도 곧 한번 인사하려 들리겠다고....그 오빠 지금 대학원 다닌다고 하던데 학교에 남을려고 그러는거야?”
“글쎄다. 교수까지 할려면 지금처럼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럴 모양이긴 한가 보더라.”
“오빠 내가 보기에도 성실해 보이고 그렇던데 거기다 지금 K대 다닌다면서....그러면 자기 하기 나름이지....”
“그렇겠지. 그래, 준우는 꼭 해낼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 엄마 때문이라도 안 할 수 없을꺼야.”
“언니! 솔직하게 얘기해봐. 준우오빠하고는 결혼까지 생각하고 만나는 거야?”
“....모르겠어.”
“못 할 것도 없잖아.....”
대답 대신에 김밥 하나를 또 다시 입으로 가져다 넣었다.
아직도 내 대답을 기다리던 현화가 자기의 육수물을 내 그릇에 따라 준다.
동생 앞에서 자칫하면 눈물을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 국물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데 현화는 기어이 끝까지 나를 몰아 부치고 있었다.
“언니! 혹시 준우오빠네 집에서 알고 반대하는거 아냐.?”
“아니야!”
내 말이 너무 강하게 튀어 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현화에게 의심만 더 불려다 주었다.
“내 말이 맞구나. 그치?”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표정관리도 잘 못하면서......”
“그만 두자. 밥한끼 먹으려 왔다가 이게 뭐니?”이미 현화도 나도 수저를 놓은 상태이다.
서둘려 그 식당을 나오는데 현화가 자신의 지갑에서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집어 내어 먼저 계산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럽던지 그 아이가 언니 같은 느낌마져 주었다.
“얘가.... 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러니?”
“용돈 받은지 얼마 안 되었거든...”“엄마가 용돈 많이 주니?”
“적은 것 같지는 않아...밥 사먹고 커피 빼 먹고 차비하고 그리고 약간의 여유로 얼마를 더해서.... 작년까지는 하루에 오천원 꼴로 주더니 올해는 갑자기 그 배로 뛰었어....”
“배라고......? 그럼 만원?”
구체적으로 동생 용돈이 얼마인지 들었던 것도 오늘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배까지 골아가며 밤 낮 없이 사무실로 학교로 뛰어다니는 자신의 용돈보다 동생이 더 많은 용돈을 쓰고 있는 셈이 된다.
“몰라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엄마가 그렇게 해서 주기 시작했었어....”“그러니? 나는 또 니가 다른 애들 한테 늘 얻어 먹고 다니는 건 아닌가 해서 나름대로 마음이 편치가 않았었는데 다행이네. 엄마 장사 그런대로 되나 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속에선 왠지모를 서운함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