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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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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BY 마음 2001-12-21

그는 내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짝꿍이었던 준우가 K시로 이사를 간 것은 그해가 다 끝나가는 12월이었다. 준우의 아버지가 중소기업의 상무 자리에 있다고 들은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컸을 때였다.
엄마하고 준우엄마하고는 비슷한 연배인데다가 이웃하고 살다보니 풍문에라도 사는 모양을 조금씩들은 알고 지냈나 보다 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우리가 살던 마을에서 십리쯤 떨어진 곳에 친정을 두고 있어서 오는 길에 잠깐씩 들려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낸다고 했었다.
그런 준우를 내가 다시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내가 근무하는 변호사 사무실에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그가 대신 들렸던게 인연의 고리까지 된 것이다.
그는 소위 명문대라고 얘기하는 국립대를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도 늘 반장을 하던 아이여서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그 아이가 나를 알아 보는 순간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이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밖으로 끌어내는데 준우의 반가움이 한 몫을 했다.
그때가 막 이학년이 시작되고 있었던 봄날이었다.
봄햇살이 나른한 오후를 더욱 늘어지세 하던 그날,
준우는 내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내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그 시커먼 가방이 날 설래이게 만들었다.

늘 정장 차림의 옷만 입고 다니던 내가 그 아이가 올 것 같은 목요일이나 토요일엔 그 나이에 맞게 조금은 가벼운 옷들을 입기 시작했고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내 감각을 일제히 깨우기 시작했다. 그건 꿈을 단 날개처럼 가벼워서 나조차도 함께 날고 잇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우린 그렇게 일년 가까이를 한달에 두 세 번은 꼭 만났고 만날때도 약속을 따로 정하지 않고 그가 퇴근 시간에 맞추어 날 찾아와 주는 그런 방식으로 데이트를 즐겼다.
만나서 가까운 공원 같은데에서 자판기 커피 빼 먹으면서 일주일 동안 있었던 주변 얘기들이나 하고 아니면 괜찮은 영화 나왔다며 미리 표까지 끊어온 준우를 따라 나설때도 이 세상의 행복을 모두 다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지내오던 우리가, 만난지 꼭 일년쯤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준우의 권유에 시내 외곽으로 빠지는 버스에 올라타기 까지 우리의 속내에 어떤 기대감이 없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조잡스럽게 만들어진 놀이 기구가 한가운데 둥글게 자리 잡고 있었고 양가로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을 지나니 봄꽃으로 길 양쪽을 적당한 크기의 것들로 배열시켜둔 꽃길이 바로 나왔다. 잘 정리된 수목들이며 꽃들가지 모두 보통 정성이 아닌 대단한 안목과 전문적인 수목원이라는 생각까지들 정도였다. 그길로 다시 완만한 언덕 하나를 지나니 초가집 하나가 저만치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 보니 예상했던 대로 전통찻집이었다.
창가로 자리를 잡고 앉은 테이블에 후레지아가 수줍은 모습으로 투명유리화병에 서너가지만 꽂혀 있었다.
향기를 맡을 양으로 준우가 그 화병을 들어 코에 가져갔다.
그 모습은 소년처럼 순박했고 그래서 앞에 앉은 나까지도 교복을 입고 앉아 있는 느낌마져 들게 했다.
우리는 투박한 찻잔이 신기하기라도 한 것처럼 몇 번 씩이나 이리저리 돌려보고 다시 만져 보고 했다.
그것은 우리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어색함 때문이다.
평소하고 다르다는 걸 서로에게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낯선 분위기를 깨고 갑자기 준우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 나온 것은 대추향이 좋다며 이런 대추차는 처음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너스레를 한창 떨고 있을 때였다.
“정은아! 나 너 사랑해.”
그가 무슨 말을 하는가 나는 그를 차마 쳐다 볼 수가 없어서 들고 있던 투박한 질그릇에다 코를 박고 머릿속에 엉켜드는 온갖 상념들을 대책도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생각들 속엔 단연코 우선이 결혼문제였다.
"내말 못 들었니?“
준우의 음성이 처음 보다 더 강하게 내게 밀고 들어왔다.
“모르겠어...”
“뭘 모른다는 건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내 손이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봄날에 갑작스럽게 추위라도 찾아온 것처럼 사지가 다 떨려왔다.
“우린 아직 그러한 말들을 주고 받을 나이가 아니잖아.”
애써 누른 마음으로 떠듬거리며 서성거리는 말투로 그에게 대답대신 다시 이어 말해주었다.
준우가 갑자기 웃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호탕하던지 은근히 자존심까지 상하려 드는데 다시 그가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고 있다는 거 몰랐니?”
“.........”
설마했었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아무말도 서로에게 고백한 적이 없다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서로를 만나고 있었던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내 마음까지 죄다 읽어낼 것 마냥 강렬해졌다.
“너한테 특별하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너 만나는 것 친구 이상의 감정이었어. 처음엔 나 역시도 그런 내마음이 사랑일꺼라고 생각 못했는데....”
그는 잠시 말을 이어가질 못하고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그리고 식은 차를 입에 한모금 물더니 조심스럽게 말이 되어 나왔다.
“너를 자꾸만 만지고 싶어져. 너의 머리칼, 너의 손, 너의 목덜미...”
그의 말은 곧 입김이 되고 촉감이 되어 내 몸 구석구석을 입마추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온몸에 경직이도 생긴 것 마냥 빳빳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