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20-
"기억"
"그래.그날 눈이 왔었지.아침부터 모두들 눈치우느라 정신이
없는데...난 외출 준비에 신이 났었지.동기애들이 면회를 왔거든.
군인들에게...그것도 처음으로 맞는 외출허가란 ...후...
얼마나 가슴 설레는지...군화를 수십번 닦고 군복바지는
주름을 칼처럼 세워 다림질을 하며...시간은 왜그리
더디기만한지...넌 모르지?그 기분..."
영은은 언제나 그의 얘기를 들을때면 긴장이 되어
입안의 침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어느 대목에서 여자의 얘기가 나올까 기다리고 있으려니
입천정까지 타들어가는것 같았다.
"애들이 장난을 쳤어.소희랑 나 둘만 남기고 모두 가버린거지."
"얘기하지마요.나...안 들을래요."
"나...소희하곤 아무 감정 없는 그냥 써클 동문이었을 뿐이었어."
"그만해요.안들을래요."
"그냥 들어가기 싫었어.처음으로 외출한 날이었거든."
"..."
"소희는 날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했지.아니 그땐 선배였었지."
"이해해요."
"뭘...?니가 뭘 이해하니?"
그가 갑자기 화를 냈다.
"...!"
"그때의 난...사랑하는 사람과의 첫날밤을 꿈꾸는 순진한
남자애였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동기였는데...그앤 내 맘을 모르는것 같았어."
"지금은요?"
"소희랑 내 사일 오해해서...떠나버렸지."
"그래서...지금도 잊지 못하는건가요?"
영은의 담담한 음성에 그는 알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잊은지 오래야.잠깐이었어.그냥 잠시 좋아했을뿐이야.
사춘기때 동네 여학생을 좋아하듯이...우습다.지난 얘기..."
"그래요.지난 일이에요.나...그런거 알고 당신이랑 시작했어.
아무 상관없어.그런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러나 그는 고집스럽게 계속 말하고 싶어했다.
이렇게 긴 얘기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영은은 어쩌면 그는 자신의 지난 얘기를 그녀가 진작 물어봐 주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희는 가지 않았지.하지만...난 아니 우린 아무일 없었어.
술을 많이 마셨지만...분명히 아무일 없었어."
그는 고회성사라도 하듯 영은의 얼굴은 보지도 않고
들뜬 목소리로 얘기를 계속했다.
"학교에 가서 그앤 자랑이라도 하듯 나와의 일을 떠벌리고 다녔지.
있지도 않은 일을 말야."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은의 시선을 느낀것 같았다.
여자의 거짓말에 상처를 받았던걸까...?
그의 말에 문득 진이의 거짓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진이를 대하던 그의 차가운 눈빛도...
그제서야 그를 이해할수 있을것 같았다.
자신을 믿지 않았던 영은을 대하던 그의 굳은 얼굴...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후...우스운 애지.이젠 무서운 애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나라는 놈 좋아한게 잘못이지.불쌍한 여자야..."
영은은 한동안 그가 한 말들이 정리가 되지 않아 머리가 복잡해졌다.그래서 어떻게 된것일까...?
정작 영은이 궁금해하자 그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진이의 말이 별안간 떠올랐다.
'소희선배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싫어해.끝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가 겨우 진정된 목소리로 영은을 불렀다.
"영은아!내 말 믿어주는 사람이 없더라.넌 나 믿니?"
영은이 말했다.
"그럼요.믿어요."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걸까...?
자신의 사랑을 비켜가게한 여자를 원망하는걸까...
아니면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음을 가슴 아파한
것이었을까...?
그의 손을 잡고 다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영은은 그의 옆모습을
가만 올려다 보았다.
밤털같은 머리를 하고 설레임으로 얼굴이 분홍빛으로 상기되어있는
어린 그의 얼굴이 아직 그 속에 있었다.
"...진작 우리 만났더라면 좋았을텐데...동네에서라도..."
그의 웃음이 영은의 눈을 가득 채웠다.
영은의 얼굴을 그의 두손이 조심스럽게 감싸안았다.
"그래.네 잘못이야.너...어디 있다 이제 온거니...?"
"나...모르는것투성이지만...내생각에는 지난일보다는...
지금 이순간이 중요한것 같아.누굴 얼만큼 미워하고 사랑했는지
이제와서 뭐가 중요해.당신 복잡한거...이제 이해가 가네.
나...당신이 내게 첫남자였음 좋겠어.그리고 마지막이었으면...
당신 마음만 진심이라면...나...아무것도 상관없어요.
나 후회하지 않을래.당신따라나선거...그리고 여태 당신땜에
마음 아팠던거...왜 날 좋아하냐고 묻지 않을래.이게 사랑인지도
사실 나 잘 모르겠어.그냥..."
"영은아."
"나도 말 다 할래요.지금 할래.나 그냥 당신이 좋아.당신이랑 있음
가슴이 마구 뛰고 행복해져.당신도 그럴거라고 믿을거야.
나랑 있으면서 당신도 행복해졌음 좋겠어요.나 그럴수 있을것 같아.
당신 웃게 해줄수 있을것 같다구요.다른 건 생각하지 않을거야.
나만...그리고 당신만 생각할거야.그래도 되는거지...?응?"
숨도 쉬지 않고 주절댔다.
그런 그녀의 입술을 그의 젖은 눈이 다가와 입맞춤을 했다.
꼬박 하루를 그와 함께 지냈다.
눈깜빡할 사이 흘러가 버린 시간들이었다.
"소희는 다시 만날 일 없을거야.내가 알아듣게 설명했어.
나...그 애 무서워.다시는 우연히라도 만나지 말았음 좋겠다.
나쁜놈이지.나...어쩌면 널 만나지 않았으면 그애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을것 같아.그앨 떠나려고 일부러 다른 여자들과 만나고 다녔지.
나...순결한 놈은 못된다.하지만...변할거야.너하나만 바라볼거야.
그래도 되는거지?나 잘 숨겨줄거지?응?"
자신을 순결하지 못하다고,
함께 가자는 말 대신 자신을 숨겨달라는 남자...
영은은 기댈수 있는 사랑을 꿈꾸어왔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라면 어깨 하나쯤 빌려줄수 있는 강한 여자가
되어줄수 있을것도 같았다.
함께 있어 더 망가지는 사랑이 있다면 그건 여자와 그일것 같았다.
한사람의 잘못된 집착이 서로를 얼마나 상처주는지,또
그 사랑이 얼마나 위태롭고 권태로운것인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그는 가슴속에 쌓아둔 얘기들을 다 꺼내놓고 싶어하는
사춘기 소년같았다.
그 어느때보다 그가 가깝게 와닿는것도 그때문이리.
그래서인지 영은도 덩달아 뭔가를 꺼내놓아야만 할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떤식으로 시작해야할지
모른다.사실은 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자신의 출생과 가족얘기, 그 어떤얘기도 그가 묻지만 않는다면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
갑자기 그가 자신을 먼저 알고 있었다는 진이의 얘기가 떠올랐다.
"근데...당신 날 언제 처음 봤어요?"
"글쎄...진이랑 써클실 들렀을때...?"
"그때부터 날 좋아했나요?"
그는 부끄러운듯 영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아니...그 전부터..."
그의 목소리는 장난스러웠지만 진지했다.
정말 자신을 알고 있었을까...?
그 사진얘기를 꺼내려다 영은은 문득 그의 가방을 힐끔 쳐다봤다.
저 속에 그의 수첩이 있을까...?
몹시 궁금해졌지만 물어볼수도, 보여달라는 말도 꺼내기가 어색했다.
그때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택시를 잡았다.
"타!집까지 바래다줄께."
그는 영은을 먼저 태우고 자신도 따라 탔다.
함께 가서 허락 받겠다던 그가 자신을 바래다주겠다고 말한다.
영은은 갑자기 실망스러워져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눈치챈듯 그가 말했다.
"가서...혼나야지.너 외박했잖아.내가 대신 혼나줄거야.걱정마."
오는동안 잠시 그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엄마의 존재와 조금 뒤 닥칠 일들을 잊은듯이
영은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엄마도 자신처럼 민재를 마음에 들어할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에 대해 딱히 반대할 이유도 사실 아직 없었으므로...
그러나 집앞에 내려선 두사람을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에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엄...마!"
영은은 그녀가 단순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빛에는 두려움마저 스쳤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보이는 그의 표정에도 어두운 그 무언가가
언뜻 느껴졌다.
"안녕하셨어요?"
"너...!"
너라니...?
'엄마...!"
두사람...어떻게 된거야...?
영문을 모르는 영은은 두사람을 번갈아 쳐다볼뿐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