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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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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BY byelover 2002-01-15

-기억17-
"집착"

얼마나 시간이 흐른걸까...?
영은은 그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서 이유도 없이
그가 남기고 간 그 어쩔수 없는 슬픔으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턱턱 막히고 미칠것만 같다.
이렇게 서 있으면 그가 다시 돌아와 줄것만 같아서일까?
영은은 한걸음도 옮길수 없다.
'당신이 나에게 올수 없는 이유라는거...그게 뭐예요?
나...당신을 사랑하면 안되는거였나요...?
그 여자때문인가요...?'
눈물이 가득 고여 앞도 볼수 없을 지경인 그녀에게 누군가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지만 영은이 알아차릴 리 없었다.
자동차속의 여자는 그런 그녀를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다.
한참이 지나도 영은이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여자는 결심한듯 차에서 내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려보았다.
그제서야 영은은 여자를 힘없이 바라본다.
"아...!사장님...!"
"여기서 뭐해?타!내가 바래다 줄께."
"아,아니에요.그냥 버스타고 가면 되요."
영은은 고개를 숙이며 급하게 눈물을 훔쳐 낸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던 여자는 빙긋이 웃으며 영은을 밀었다.
"지금이 몇신데...고집부리지 말고 타세요."
차를 몬지 오분도 채 못되어
여자가 물었다.
"자기 술 잘해?"
영은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스럽다.
"나랑 한잔 할까...?"
"저 ...술 잘 못해요.그리고 시간이..."
영은은 사장과의 이런 자리가 다소 불편함을 느낀다.
게다가 그런 바보같은 눈물까지 들킨 이마당에...
"아가씨가 무슨 시간을 걱정해?나같은 아줌마도
한잔 할땐 시간 안따지는데...자기 촌스럽구나."
영은은 그제서야 웃음이 난다.
그러나 곧 다시 슬퍼졌다.
"나랑 입사기념으로 한잔해.좋은데 알아."
"저...맥주는 한두잔 정도...정말 술 못해요.
괜히 분위기만 망칠텐데..."
영은의 말끝을 여자가 잡아챈다.
"자기 술버릇 나빠?"
"네...?"
여자는 기어이 영은과 술을 마실 작정인것 같았다.
"그냥 같이 있어주기라도 해.나 자기 우는거 보고 전염됐으니까
그 정도는 책임져.괜찮지?"
그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구차한 변명으로
자리를 피할수는 없을것 같아 영은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마치 영화속에서나 나올것 같은 분위기 있는 카페였다.
여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영은에게도 권해본다.
영은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럴줄 알았다는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여자가 담배의 재를 털며 영은에게 말했다.
"일은 할만해?"
"...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장과 직원의 관계.그 관계때문일까...?
영은은 여자가 어렵다.
"어려워 하지마.나 친구가 필요했을뿐이거든."
마흔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
그러나 여자는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듯했다.
자신의 어머니에게서나 느껴지는 삶의 연륜마저 느껴졌다.
여자는 자신의 말처럼 매장에서 만날때도 영은을 동생처럼
편히 대해 주었다.
그러나 여자에게서 배어나오는 상류층특유의 어떤 이질감이
영은을 경직시켰다.
여지껏 누구에게서도 느껴보지 못한 특이한 느낌.
싫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지도 않는다.
"나...영은씨 맘에 들더라."
불쑥 여자가 말을 꺼냈다.
"튀지 않고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뭐랄까...?자연스러움...?"
영은은 여자가 무슨 말을 꺼낼까 궁금해졌다.
길거리에 서서 울고 서 있던 다 큰 여자애에게 빛깔고운 이 여자는
과연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은지...
도도해보이던 여자의 첫인상이 생각났다.
자신은 이혼녀라고 묻지도 않은 얘기를 내뱉던 여자.
그래도 그녀에게는 자신이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구차함의 흔적따윈 보이지 않았었다.
"보통 여자들은 자기같은 스타일을 싫어하지."
영은은 한모금 들이마신 술이 벌써 오르는 느낌이다.
여자의 직선적인 말이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은것도 그때문이리.
"내숭같아서...하지만 남자들은 오히려 매력을 느껴.참 재미있지?"
"제가 그렇게 보이셨어요?내숭떨게...?"
영은이 살짝 웃어보이자 여자가 들고 있던 컵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 한잔 따라 줄래?"
술 따르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미어 터질것 같은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아니.그 반대야.야무져보이고 조금은 반항적인것 같았지."
"그런데요?그런데 왜 내숭얘길 꺼내셨어요?"
술기운이 정말 오르는지 말을 건네기조차 힘들던 여자에게
자꾸만 웃음을 흘리며 이것저것 말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그런 영은이 재미있는지 자꾸만 술을 권한다.
"자기 우는거보고...자기 출근한 첫 날부터 하루에 한번씩 울었지?"
갑자기 술이 깨는것 같다.
"그걸...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았냐구...?내가 달리 여우겠니?
전화목소리만 들으면 알지?"
영은은 할 말이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써 눈물을 옮기고 있었다니...
"울수 있다는거...그만큼 감정이 격해질수 있다는게 부러워."
"죄송해요.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일자리까지 끼고 다니는 자신의 슬픔에
영은은 여자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니야.미안하라고 한 말 아닌데...난 그냥 영은씨 보기 좋아서
그래.사랑하는 모습이 예뻐서..."
영은이 얼굴을 붉히자 여자가 갑자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가슴이 아파서 모든게 힘들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가슴을 다 태워서라도 그 사랑을 해봐.혼자서 체념하지 말고...
나같이 나이가 좀 들면 그럴 용기도 없어져.
쉽게 단념했던 사랑에 후회가 되고...
한번이라도 우연히 마주치길 바래도...
비켜간 사랑은 다시 오지 않더라."
여자의 말처럼 여자는 울고 싶어하는데도 눈물이 흐르지 않는것 같다.
일어서기전에 여자가 한마디했다.
"영은씨 만나기 한 정거장 전쯤인가...?
어떤 남자도 울고 서 있던데...
그림이 똑같아서... 자기를 쉽게 알아봤지."
갑자기 그 소리에 영은이 벌떡 일어섰다.
"사장님!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왜...아는 사람이었어?설마...?"
영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뛰쳐나왔다.
그였어.그가 울고 있었어.그가...
다시 가슴이 미어왔다.
약간 외진 곳이라 택시가 한대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급해진 영은은 여자를 잊고 있었다.
조금후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든다.
"괜찮아?"
"아,네.죄송해요.나...그사람 만나야해요.죄송해요.그런데..."
"알았어.알았다구.근데 어쩌지?나도 운전을 못하고...잠깐만
내가 들어가서 택시 불러 달라고 할께."
바보같은 이 그림을 여자는 정말 부러운 눈으로 감상하고
있는것일까...?
진지한 표정으로 카페로 급히 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영은은 맥을 놓고 보고만 섰다.
시간이 못되어도 새벽세시경은 되었을것 같았다.
요즘 들어 집을 비우는 일이 없으신 엄마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그보다 그가 울고 있었다는 여자의 말에 영은은
그를 만나지 않으면 견딜수 없을것 같다.
택시가 오자마자 영은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를 만나러 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여자의 눈은 걱정스러움보다는
부러움이 앞선다.
여자가 말했다.
"사랑은 타다 남아도 사랑이지..."

그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리 없겠지만
영은은 혹시나하는 기대를 버릴수 없다.
여자가 말한 정류장 근처까지 되돌아가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사는 영은의 타는 마음도 모르고 투덜거리기만 한다.
"아가씨.빨리 갑시다.아님 내릴라우?"
실망한 영은은 차라리 내려버릴까하다 마음을 바꾼다.
다니는 차도 없는데다 시간까지 너무 일러 들컥 겁이 났다.
몇번이나 기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더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그가 울고 있을것만
같아 가슴이 쓰렸다.
집앞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잠깐 졸던 영은이 눈을 떴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프다.
갑자기 토할것 같아 차를 세웠다.
영은을 내려놓은 차는 순식간에 쌩하고 가버린다.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영은은 토하기조차 힘들다.
하루종일 먹은거라곤 물 몇컵,맥주 몇잔뿐이니 쓴 액체밖에
나오지않아 속이 더 따가왔다.
이러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끄응 신음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선 영은은 몇발자국 못 가서
갑자기 멈춰섰다.
바로앞에서 그가 영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거짓말같았다.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영은이 먼저 그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기도전에 영은이
숨이 차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께요.당신 말대로 할께요.당신 내가 숨겨줄래요.
나...어떻게 하면 되는거예요?네?나...당신이랑 살래요.
어디...우리 멀리 가버릴까요?네?대답 좀 해 봐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내가 어떤 놈인지 아니...?"
"아니요.그런거 ...그런거 이제 상관 없어.
나...당신 따라 갈래요."
영은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해버린건지 알지 못한다.
그에 대한 이상한 집착마저 그녀는 사랑이라고 믿고 싶을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