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6-
"바람"
어둠속에서 가만히 고개를 드는 남자는 민재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의 얼굴위로
매장간판의 네온불빛이 몇줄 그려졌다.
영은은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건 아닌가싶어 숨을 멈추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가는 행인들,자동차의 경적소리,상점들의 간판불빛...
모든것은 현실이었다.
다시 그를 보았다.
하얗고 가지런한 그의 치아가 어둠속에 드러났다.
이사람...
어떻게 이런 미소를 지을수 있는걸까...?
그렇게 날 아프게하고서...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것처럼
어떻게 이런 그늘한점 없어뵈는 웃음을 지어 보일수가 있는걸까...?
'정말 나쁜 사람이야.당신...
당신땜에 내가 못살겠어.정말...'
갑자기 밀려드는 서러움에 영은은 목이 메일것 같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것만 같은 영은의 눈을
그가 예전처럼 다정하게 내려다 보았다.
조금 두터워보이는 티셔츠를 입었을뿐 여전히 그는
외투를 어딘가에 벗어두고 잠깐 나온 사람같았다.
외투를 걸친 그의 모습은 그녀의 기억속에 없다.
늘 불안해보이는 그였지만 이런 옷차림으론 쉽게
떠나버리지 않을것 같아 영은은 마음을 놓곤 했었다.
아무말도 못한채 자신을 멍하니 보고 서있는 영은에게
열쇠를 쥐어주는대신 그는 그녀대신 철문을 내리고
문을 닫은뒤 열쇠를 채웠다.
그의 뒷모습에 영은은 늘 그랬듯 가슴이 떨려왔다.
이런 자신이 바보같아 싫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영은도 어쩔수가 없다.
그가 돌아선다.
자신이 건 최면에 걸린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웃음을 보이고 만다.
하얗게...
그가 열쇠를 건넸다.
그제서야 그의 사고소식을 기억해낸 영은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목이나 팔 그리고 다리 어디에도 사고의 흔적은 없어보였다.
"어떻게...된거예요...?"
감정이 격해져 목소리가 울먹이듯 떨렸다.
"뭐가...?"
그는 능청스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려는것 같았다.
물어볼것이 너무도 많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자신의 것인양 너무도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있는
영은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자신의 손을 잡아쥔 그의 커다란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낯익은
온기가 영은의 가슴을 다시 뭉클하게 했다.
'당신이 어떻게 된건 아닌가싶어 얼마나 놀래고 마음 아팠는데...
당신...내 얘기 하나도 못듣고 가 버리는건 아닌가해서 얼마나
가슴 졸였는데...
당신...아프지 않아요?정말 괜찮은거지...?
나...궁금한게 너무 많은데...
얘기해줄래요...?
하지만 당신...말할수 없는 얘기라면...
말해서 안될 얘기라면...
만약에 그렇담...나 묻지 않을께요.
듣지 않을래요.
나...답답해서 미칠것같아도
참을께요.그러니...내앞에서 다신 사라지지마요.다시는...'
영은은 자신이 다시 어리석은 다짐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숨길수 없는 진심이었다.
그를 보지 않고는 살수 없을것 같았다. 자신의 마음속 바램대로 그는 이렇게 돌아와주었다.
그가 이대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은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어디에도 갈수 없도록
그를 잡아두고 싶다.
눈물흘리는 사랑,바보같은 사랑이라해도 그를
보내버리고 후회하며 살아가는것보다는 나을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이긴해도 시내와 조금 떨어진곳이라
그런지 늦게까지 문을 연 가게가 없어 마땅히 들어가 얘기를
나눌만한 데가 없었다.
어디 문을 연 커피숍이 없나 열심히 두리번거리는 영은을 보며
그가 말했다.
"너때문이라도 잠바를 입어야겠다."
그가 불쑥 외투얘기를 꺼내자 영은은 순간 '안돼요'라고 외칠뻔했다.
그는 영은의 손을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영은이 당황하자 그는 쑥스러운듯 말했다.
"왜 이렇게 손이 차니...?"
라고...
그의 한쪽바지주머니에 나란히 들어가 있는 그와 자신의 손.
영은은 뭐라말할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
자신이 늘 그려왔던 평범한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그도 영은의 얼굴을 자꾸만 힐끔힐끔 쳐다보며 멀쑥한 웃음을 웃었다.
그는 영은의 집앞에서 낯선 남자와 인사를 나누던 그녀를 분명히
보고 있었다.그리고는 되돌아가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영은에게 묻지 않는다.
그도 자신과 같은 바램인걸까...?
물어서,들어서 아플 얘기같은건 하지 말자고,
궁금해도 너를 위해 참겠다고,
그러니 다신 서로 볼수 없어 애타하는 일은 만들지 말자고
...
그러나 그는 과연 그런걸까...?
영은은 그의 옆모습에서 부는 바람을 다시 느낀다.
무슨 슬픈 생각에라도 빠진듯 횡한 눈동자...
그속에 일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영은이 말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그가 말했다.
"병원엔 어떻게 알고 왔었니...?"
그녀가 얼른 대답하지 못하자 다시 그가 물었다.
"왜...다시 오지 않았니...?"
뜻밖의 말에 영은은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기다렸어요...?"
그의 입술이 장난처럼 말했다.
"나말고 우리방 총각."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웃음이 멎자 영은은 자신의 웃음을 설명이라도 하듯 말했다.
"그사람...총각이었어요...?머리가..."
"조금 시원하지."
그의 말에 다시 웃음이 났다.
그도 따라 웃었다.
한참뒤 영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묻는다.
"잘있었니...?"
"...네...."
자신을 너무도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어렸을때 읽은 순정만화속의 여자 주인공처럼 영은은
늘 그의 앞에만 서면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착한 여자가 되어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녹아내리는 바보같은 여자...
답답하고 당당하지 못한 여자들의 모습에 분개하며 자신만은
그런 사랑은 하지 않겠다던 야무진 꿈이 그의 앞에서 너무도
우습게 깨지고 있는것이다.
비단 순정만화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읽은
모든 소설속의 수많은 등장인물중 가장 못난 인물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영은은 이 인물을 결코 포기할수 없을것 같다.
어쨌든 자신은 그의 상대역이었으므로...
"바닷속엔...왜 들어갔어요...?"
갑작스런 그녀의 물음에 그는 약간 당황해했다.
담배를 피워무는 그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어디든...숨고 싶었어."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영은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바지속에서,그에게 잡혀있던
자신의 손을 홱하고 빼냈다.
그는 순간 움찔한것 같았다.
그의 말이 가슴이 저리도록 서운했다.
'정말 당신 죽고 싶었던거예요...?
그냥 사고였을거라고...그렇게 믿었는데...
난...당신이 살고 싶은 이유중에... 하나도 될수 없었나봐요.
난...그냥 여자였군요.나...착각하고 있었나봐요.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이 있는 애였으면 하고 감히 바랬는데
...그래요.역시 아닌가봐요.나 그렇게 축복받은 인간이 못되나봐요.
그런데...그런데...당신 ...왜 이렇게 살아서 나에게 온거죠?
유서라도 전하러 왔나요...?"
한순간 느꼈던 행복이 우습게 느껴졌다.
"서운해...?"
"제가 그럴 자격이라도 있나요?"
영은이 빈정거리자 그가 그녀를 자신의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그의 얼굴은 화가 난듯 일그러져있었다.
"넌 ...누구니...?누군데 날 이렇게 살고 싶게 만드니...?
너...누구니...?내 맘대로 그냥 살게 놔두지.
왜 이렇게 힘들게하니?"
"아파요.놔요.무슨말이에요...?알아들을수 있게... 얘기해봐요.
네...?무슨 일인지 내가 알면 안되는건가요?네...?"
그가 갑자기 영은을 힘껏 끌어 안았다.
영은은 숨을 쉴수가 없다.
아...!
그에게서 묘한 향기가 났다.
언젠가 혜영이 자신의 목을 끌어안았을때 나던 향기같았다.
그것은 담배내음과 슬픔이 섞여 부는 바람같았다.
"영은아!그냥 이렇게 있자.그냥...아무말도 하지말고..."
그가 영은의 머리카락을,그리고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영은은 손끝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다.
그녀의 귀에다 그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나...니가 좀 숨겨줄래?나...너한테 못갈거라면.."
영은은 그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알수 없었다.
그에게서 몸을 떼어내려하자 그는 그녀를 더 힘주어 안았다.
순간 그가 울고 있는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너랑 ...살고 싶어.너랑..."
영은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본다.
"뭐라구요...?"
그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떼어 놓는다.
그리고 뒤돌아 뛰어갔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말도,아무것도 할수 없다.
마치 한점 바람이 그녀를 스쳐간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