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5-
"그의 이야기(2)"
"내 말이 안믿어지니?
영은은 진이의 눈을 뚫어질듯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처음엔 너랑 좀 닮은 여자애려니 생각했지.아저씨가 계속해서
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길래...자세히 보니 네 사진이 맞더라."
영은은 진이가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수가 없다.
그가 어떻게 자신의 어릴적 사진을,그것도 여러장씩
지니고 있을수가있을까...?
그럼 그가 먼저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걸까...?
그는 진이에게 사진속의 여자아이를 누구라고 설명했을까...?
"왜 얘기하지 않았니?왜 이제서..."
진이는 얘기를 하는동안 내내 영은의 안색만 살피더니 영은이 겨우
입을 열자 그래도 다행스러운듯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눈동자에 물기를 머금었다.
"미안해...질투가 나서...그래서 그랬어.
아저씨 혼자만의 관심이니까...
...그사람 혼자 접으면 끝날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너일줄 몰랐어.
정말이야.지금모습이 남아있긴해도 ...
다른 사람일거라 믿고 싶었나봐.소희언니하곤 끝난 관계니까
할수만 있다면 내가 시작하고 싶었어.아저씨 군복무할때
휴가나왔을때보고...
그때부터 좋아했지.그래.많이 좋아했어...
편지도 여러번 했었어.한번 답장이 왔길래 난 아저씨도 날 조금은
마음에 두고 있다고 믿어버렸지.후...너한테 얘기하고 싶었어.
근데 너 그땐 많이 힘들어보여서 ...다음에 할려고 미룬게...
이렇게 되버렸구나.아저씨 군복무할때부터 많이 힘들어 보였어.
너도 알잖아.소희언니...그 언니랑 사이가 안좋았거든."
그 여자 이름이 '소희'였니...?
술에 취해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그래도 자신은 그의 여자라고 울부짖던 ...그 여자...?
'그냥 여자였어'라고 그는 말했지.
나역시 그에겐 그냥 여자일뿐이었을까...?
그날 이후 그녀를 만난적은 없었지만 영은은 왠지 그 여자를 내내
마음속에서 떨쳐내기 힘들었다.
진이의 입으로 듣는 여자의 존재는 또다시 새롭게 느껴졌다.
"우리 써클에서는 두사람 얘기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야.
소희언니를 아는 사람은 다 욕해...끝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두사람 얘기... 어디까지 들은거니...?"
진이는 영은이 무슨 심정으로 자신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는것인지는
알고 싶지 않은지 아니면 이왕 어렵사리 시작된 그의 얘기니
이제껏 숨겨온 자신의 속내까지 다 담아 들려줄 심사인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영은은 그에 대해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생각하면...
그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까지 다 잊어버릴정도로
무진장 가슴이 떨렸다는것밖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늘 어떤 거리를 두고 대하는 그의 주변을 배회하며
가슴아팠던 기억, 그의 알수 없는 말과 행동들로 상처받았던것
그래서 흘린 자신의 눈물들이 그가 자신에게 남겨준 추억이었다.
그의 얼굴마저 흐릿하게 떠올랐다.
정면에서 그의 얼굴을 쳐다본 기억보다 몰래 훔쳐보듯 바라본
그의 얼굴선이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를 마주보기라도 할때면 보이지도 않는 슬픈 바람이
자신에게 묻어와 알수 없는 그 슬픔으로 엉엉 소리내어
울것 같은 청승맞은 느낌.
그러나 그 느낌마저도 그의 것이기에 감미롭게 와 닿았었다.
그가 자신의 얘길 들려주지 않는것에 대해 서운해 한적은 없었다.
입으로 자신들의 살아온 얘기들을 다 주고 받아야 하는것이
사랑이었다면 영은 역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두사람 모두 살아온 자신의 얘기를 내뱉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므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가 더 좋았다.
그래서인지 영은역시 그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볼수가 없었다.
그냥 만나서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웃음소리, 숨소리를
가까이 느끼는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것이 사랑일거라고 영은은 믿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것이었을까...?
그러나 여자의 몸을 이미 알고 있을거라는 그에 대한
자신의 어떤 선입견으로 영은은 점점 괴로워졌었다.
늘 같은 거리에서 더이상 다가오지 않는 그를 느끼며,또 자신과는
다르게 대하는 여자들에 대한 그의 행동에 필요이상으로
예민해지고 화가 났었다.
질투심이 앞서 그의 얘기따윈 들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언제나처럼 영은은 자신을 버려두어 혼자 포기하게 만드는
그의 무심함과 냉정함따위는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또다시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싶다.
모든것이 자신의 오해였으며 잘못이었을거라고,그는 늘 자신에게
돌아오고 싶어했을거라고...
영은은 진이가 자신의 그런 마음에 확신을 주기만을 바랬다.
그런 심정으로 영은은 숨죽여 진이의 얘기를 듣고 있는것이다.
진이가 조심스럽게 다시 여자의 이름을 들먹였다.
"소희언니얘기 들었니...?
"...무슨...?"
"그 언니 아저씨랑 같이 산다는 얘기..."
"...아...그거...?응.들었어."
영은은 애써 담담한듯 대답했지만 다시 마음이 아파옴을 느꼈다.
"그거...사실하고 틀려.소희언니가 일방적으로 집을 나와서
그렇게 된거야.영은아!이런 얘기 괜시리 꺼내는거 아냐.
너 오해하고 있을까봐 내가 얘기해주는거야.
아저씨는 너한테 암말 하지 말랬지만...
나...너 많이 좋아해.너 알지...?
너랑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수 있음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해도 원망하지 않을께.그러니 너도 나...용서해라."
"진이야!넌 내가 밉지 않니...?왜 이런 얘길 나한테 해주는거니?
사실 난 널...이해하기 힘들어.나한테 무슨 용서를 해달라는거니?"
영은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직 그를 얘기하는 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는데 그런 그녀가
왜 그와 자신사이의 오해를 풀어주려 이 긴 얘기를 시작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첨엔 ...니가 미웠어.하지만 지금은 아냐.두사람 잘되기를 바래.
진심이야.어쩌면 너보다 아저씨를 위해 이런 얘길 하는지도 모르지.
지금 아저씨에겐 네가 가장 필요할테니까...
영은아!나 아직 아저씨 좋아해.하지만 널 위해서라도
여자로서의 그마음만은 접을거야.약속해."
진이는 지금 이렇게 영은에게 하는 약속으로
자신의 마음을 다잡으려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은은 진이의 진심을 도무지 헤아릴수 없다.
아니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그 마음을 접을수 있다고
말하는 여자의 마음을 믿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이런식으로 나쁜 사람이 되어야하는 현실이
더없이 불만스러워 견딜수가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원인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하고마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아무것에도 열중할 수가 없었다.
과사무실에 앉아있다 우연히 일을 맡게 되었다.
의상에 맞는 안감과 단추를 고르는 일이었는데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던 일이 생각보다 까다로왔다.
더구나 머릿속이 엉뚱한 생각들로 가득차 단추의 크기조차
분간하기 어려울정도였다.
저녁 일곱시부터 열한시까지,늦으면 거의 열두시까지 옷가게 일을
하게된지 사흘째.
원래 의상학과 학생에게 알선된 자리였지만 염색학과로 전화가 잘못
연결되었고 전화를 직접 받은 영은이 바로 그 자리서 부탁해 얻어낸
일자리였다.
개인 브랜드의 고급 옷가게로 잘 모르는 영은이 보아도 제법 괜찮은
자리에 디자인도 고급스러워 손님이 많았다.
마침 판매를 하면서 디자인을 공부할 사람을 찾고 있었고
영은은 그 자리에 욕심이 나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고
약간의 억지를 부려 일자리를 쉽게 얻어냈다.
원래는 다음달부터나 출근할 예정이었지만
지금 있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샵을 내기위해
일찍 퇴근하게 되어 그 시간을 영은이 채우게 된것이었다.
멍하니 그를 생각하며 가슴 답답해하느니 무엇이든 새로이 시작하고
싶은 그녀에게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러나 영은은 어디에 있든 무슨 일을 하든지
잠시도 그의 생각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진이가 해 준 얘기들까지 더해져 뭐가뭔지 알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를 알기도 전부터 자신의 사진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과 사진속의 여자를 어떻게 알고 있냐는 진이의 물음에
그가 했다는 대답이 영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잘 아는 사람의 딸이라고 그는 대답했다고 했다.
사진속의 여자아이의 이름도 나이도 모르면서 진이와 함께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수첩속에 있던 빛바랜 사진 몇장을
진이에게 내보이더라고 했다.
그리고 영은에 대해 묻더라고 했다.
부모님이 다 계시냐고,이름이 뭐냐고,몇살이냐고,어디서 사냐고...
자신에게 한번도 묻지 않았던 자신의 얘기를
진이에게 아주 여러번 물었다고 했다.
자신의 과에 가서 시간표까지 보고 와선 영은을 아는체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자신을 알고 있었던것일까...?
자신이 누구의 딸이라는걸까...?
엄마를 알고 있는걸까...?
그러고보니 한번도 자신의 집앞까지 바래다주지않던
그가 생각났다.
일부러 엄마를 피한걸까...?
이미 예전부터 그가 자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일부러 자신에게 접근해왔던 것일까...?
소희라는 여자얘기도 놀라웠다.
진이의 얘기로는 일방적인 그녀의 사랑의 표현일뿐이라곤 하지만
자신의 집까지 찾아와 머물고 있는 그녀를 그렇다면
그는 왜 뿌리치지 않는것인지 도무지 어느것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고와 이 얘기들이 또 무슨 연관이 있다는것인지
영은의 머리로는 도무지 풀어질것 같지 않는 수수께끼같기만하다.
다만 이 순간 역시 그의 얼굴을 볼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뿐...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먼저 퇴근하라는 사장의 전화를 받고 가게안을 대충 정리하고
나와 문을 잠그느라 서 있는 영은의 등뒤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기도하고 궁금하기도해서 급하게 돌아보느라 그녀는
들고 있던 열쇠꾸러미를 툭하고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녀대신 그것을 주워드느라 등을 굽히는 남자의 얼굴위로
영은의 시선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