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3-
"핑계"
혜영이 까르르하고 웃는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만화속의 인물이 내는것처럼
커다랗고 코믹했다.
"왜 웃니?'
영은은 그런 그녀의 팔을 툭하고 쳤다.
"언니!왜그래?머리랑 화장이랑...하하...그리고 뭐라고...?
남자를 소개시켜달라구?왜그래?그 아저씨랑 끝냈어?응?"
영은은 그냥 웃기만 했다.
혜영의 숨이 찰것 같은 웃음소리가 자신에게로 옮아오길
바라는것처럼 그녀의 목젖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유난히 검고 숱이 많은 영은의 머리색이 거의 분홍빛에 가까워졌으니
혜영이 놀랄만도 했다.
게다가 짙은 립스틱이라곤 한번도 바른적 없는
그녀가 보라빛이 감도는 진한 입술화장까지 했으니...
어찌보면 혜영이 평소 말하던 '노는 아이'같아보일지도 몰랐다.
영은이 거울을 꺼내 들며 걱정스럽게 혜영에게 물었다.
"나...너무 이상하니...?"
혜영이 웃음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언니!꼭 요술공주 밍키같아.너무 웃겨.언니!언닌 어떻게 그렇게
하고 있어도 귀엽냐?너무 귀여워.하하하...!"
사실 혜영의 귀엽단 말은 촌스럽단 말일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해도 영은은 내심 만족했다.
머리색과 입술화장만으로도 자신의 우울한 기분을 감출수 있음이
그나마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검은색으로 머리를 염색하려 했다.
그러나 거울속에 비친 조금은 달라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를 생각하며 눈물 흘릴 검은 단발머리 여자애를 버리고 싶었기에..
그래서 머리카락까지 짧게 잘랐다.
어깨에서 찰랑대던 머리카락이 조금 그리워도 질것 같았지만
무엇으로라도 자신에게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그의 뒤에서 맴도는 자신의 무기력한 사랑을 버릴수 있다는 것을...
방법이 유치하다고 해도 그녀 자신은 만족스러웠다.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직도 아프지만 더이상 상처를 내기도 싫다.
어머니가 지원의 얘길 물었다.
영은이 대답했다.
'싫지 않더라.엄마가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긴 하네.'
만날거냐고도 물었다.
'그사람 마음도 중요하지.보게되면 물어봐.그리고 맘에 있음
연락하라고...한번 더 보지.뭐.'
어머니는 영은의 담담한 대답에,그리고 무심한 그녀의 표정에
조금 당황스러운듯했다.
오히려 영은이 그런 어머니를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괜찮아.그사람 나 싫다고 해도...그리고 나 이제 괜찮아.
걱정마요.정말이야'
그렇게 말은 했지만 괜찮을리 없었다.
우산도 없이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던 그의 모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라면 그의 마지막 모습조차
우울하게 간직해야하는것이다.
한동안 노래 부르던 카페에도 그는 더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에게 어떤 해명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불미스런 소문을 더이상 듣게 되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가 행여라도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나준다해도 영은은 어떤말도
그에게 따져 물을 수 없을것임을 안다.
그의 앞에만 서면 또다시 마냥 무기력해지기만 할것을...
그를 떠나 이제는 잊고 있었던 취업문제나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을 해야할것 같았다.
그가 잡을 수 없는 허상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한동안 영은은 취업준비를 위해 작품에만 몰두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그가 떠올라 가슴이 아파
견딜수 없었으므로...
그러나 그러는 사이에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떠올라 잠들수 없는 밤이면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목소리라도 숨죽여 듣고는
눈물흘리며 살며시 수화기를 놓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숨을 쉴수가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그렇게
가볍게 그녀에게서 잘려 나가지 못했다.
그를 잊기는 커녕 그날 그렇게 그를 보내버린 자신을 오히려
원망하기까지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영은은 알수 없는
좌절감을 느낀다.
어머니가 소개시켜준 그 사람.
그남자에게서라도 진작 연락이 오길 내심 기다렸지만
남자는 영은이 별로였던지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영은이 먼저 물었다.
'그남자 눈 좀 높은가봐.나 별루래요?'
좀 어색한 웃음을 지을뿐 아무런 대답이 없는 어머니의 태도로
보아선 그런것 같았다.
무엇이든 그를 잊기 위한 핑계가 필요했다.
온전히 그에게 제대로 열어보이지도 못한 자신의 사랑을
접을만한 한가지의 구실이더라도...
그러나 영은은 못내 아쉽다.
펼치지 못한 그와의 사랑이...
며칠째 밤 작업을 해서인지
낮부터 머리가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살이라도 날것 같아 영은은 일찌감찌 집으로 가 쉴 생각으로
마지막 수업을 듣다 슬그머니 일어나 뒷문으로 나왔다.
몇발자국 걷지 않아 뒤에서 누군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듯한 느낌에
영은은 별 생각없이 뒤돌아섰다.
아...!
진이였다.
영은은 진이와 눈이 마주치자 어찌해야할지 몰라 잠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외면해본다.
진이가 먼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디...아프니...?"
생각지도 못한 따뜻한 진이의 음성에 영은은 순간 눈물이 핑 돈다.
그제서야 영은은 고개를 들어 진이를 보았다.
그리고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몇번이나 진이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안다.
그러나 영은은 그런 그녀를 모른체 할 수밖에 없었다.
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볼수 없을것 같아서였다.
미안함과 배신감 그리고 질투로 뒤범벅이 된 그녀에 대한 감정을
쉽사리 털어버릴수가 없었다.더구나 그를 만나고 있는 중이었던
그때는 더더욱 그랬다.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어쩌면 진이와의 어색한 긴장감과 적대감들은 그녀에 대한 미안함이나
질투심때문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진이의 따뜻한 음성에 그동안의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드는걸 보면
영은은 자신이 그녀를 피한것은 단지 자신을 대하던 진이의 차가운
눈빛과 말투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한남자에 대한 집착때문에 잠시 가려져 있던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영은은 묘한 자책감을 느낀다.
진이가 그때 그렇게 차갑게 자신을 대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영은은 진이때문에도 그를 따라 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도...
단지 몇개월이 흘렀을 뿐이지만 두사람의 어색한 공백은
무엇으로도 채워지거나 치유될수 없을것 같았다.
이제와서 무슨 변명을 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영은은 애당초 친구를 버리는 비열함을 택한 자신을 떠올리며
아무런 말도 진이에게 건네지 못한다.
진이는 영은을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어떻게 따져 묻고 싶었던걸까...?
자신의 존재따위는 무시한채 그와 당당히 학교안을 히히덕거리며
오갈때 그녀의 심정은 어땠을까...?
영은은 이렇게 짧은 순간 그것도 이제서야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경멸스러워진다.
결국 이렇게 되고 나서야 제법 사람같은 생각을 하는구나싶어...
영은이 짧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동안 미안했다.그만 갈께."
그리고 그 다음 말은 마음속으로 했다.
'언젠가도 너의 곁을 이런 기분으로 지나쳤었지.
그때 깨달았어야 했는데...나역시 닿지 못할 사람이라는거...
너무 많이 걸어와 버린것 같아.그렇지 않니?
내가 많이 미웠을거야.그래.그랬겠지.
이렇게 되어버려서...그래서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냐.
미안하다.미안해.정말 미안해...'
눈물이 뺨위를 주르륵 타고 흘렀다.
그때 진이가 말했다.
"영은아!아니야.내가...내가 잘못했어.너한테 그러는게 아니었어."
돌아서서 본 진이의 뺨위에도 눈물이 굴러내렸다.
'그러지마.니가 그럼 내가 더 나쁜애가 되잖아.그러지마.
제발 그러지마...'
어느새 영은이 진이의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주고 있다.
진이는 예전과 똑같이 응석받이 아이처럼 자신에게 매달려 울고 있다.
자신을 무서우리만치 차갑게 대하던 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진이도 그와 자신의 얘기를 동아리실에서든,과에서든 들어 알고
있는것일까...?그래서 이러는 걸까...?
겨우 울음을 그친 진이는 더듬더듬 무슨 말인가를 했다.
"영은아!너 민재 아저씨랑 헤어진거 나때문이니?...그런거니...?"
영은은 진이의 물음에 다시 고개를 저어 보인다.
"아니야.진이야.그런거...우리...그사람 얘기...당분간 하지말자.
그럼...안되겠니...?"
영은의 대답에 진이는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 아직 모르는거니...?"
진이는 지금 또 무슨 얘길하려는걸까...?
그녀의 묘한 표정에 영은은 다시 잊혀졌던 두려움을 느낀다.
진이가 무어라 말하기전에 영은이 서둘러 부탁하듯 말했다.
"진이야.나...미안한데...몸이 좀 안 좋아.우리 다음에 얘기하자.
그사람얘긴 이제 안 듣고 싶어.처음부터 나하곤 안 맞았어...
인연이 아닌가봐...그리고..."
진이가 갑자기 영은의 팔을 두손으로 힘껏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민재아저씨...사고난거...너 몰랐니?"
사고라고...?그사람이...?
영은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낀다.
하얗게 질린 영은의 얼굴을 보며 진이는 가는 한숨을 내쉰다.
"그래.몰랐구나.니가 알면서도 오지 않는다고 널 원망했어."
진이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지 들리지 않는다.
영은은 알아들을수 없는 진이의 입모양만 멍하니 바라본다.
사고라니...?그사람은...?그사람은 괜찮은거니...?괜찮은거지?
진이가 영은을 흔들었다.
"너...너 괜찮은거니...?영은아!이 바보야!아저씨 안 죽었어.
살아있다고...나랑 같이 가자.응?일어나.너도 아저씨도 ...
나한테 보란듯 잘 되가고 있어야지.그래야 ...그래야 내가
니네 두사람 맘껏 미워할거 아냐.아저씨 너 기다리더라..."
너 기다리더라...는 그 말에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영은은
아무런 생각을 할수 없는 멍한 상태로 무작정 잡아끄는
진이의 손에 못이기는체 그렇게 택시를 탔다.
그사람이 왜...언제...어떻게...지금은 어디에서..어떠한지
물어보고 싶은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한마디도 묻지 못한채
영은은 진이의 옆모습만 맥을 놓고 쳐다본다.
주먹도 제대로 쥘수 없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영은이 말했다.
"나...그사람 잊을수 있을거라 생각했어.그런데...아니었나봐.
진이야.나...안되나봐.너한테 미안한데...미안한데도..."
"말하지마.나...아저씨한테 얘기 다 들었어.며칠전에 얘기듣고
애들이랑 같이 병원갔었거든...너랑 아저씨...니네 서로
얼마나 좋아하는지...그래.알아.
나 알고 있어.그러니까...말 안해도 안다구.알겠니?"
'서로'라는 진이의 말이 영은을 아프게 찌른다.
'그사람이 정말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했니?
우리가 서로 사랑했다고...?
그것도 니앞에서...?
참 나쁜 사람이구나.
정말 못말리게 뻔뻔한 자식이구나.
근데...근데 우린 그렇게 나쁜 인간을 왜 이렇게 그리워하는거니?
나는...나는 왜 또 이렇게 널 따라나서고 있는거니...?'
정리되지 못한 진이의 말투에서 영은은 아직도 온전히 접지못한
그에 대한 그녀의 아픈 마음을 읽는다.
진이와 나란히 그의 앞에 서야 할 일이 꿈만 같다.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런 얘길 전해 듣고...
그가 병원에 누워있다는 사실보다 그를 만나러 가고있는
지금 이순간 이현실이 영은을 떨리게 했다.
진이가 말했다.
"미안하다.영은아!너한테 거짓말한거...그땐 그렇게라도 네가
그사람에게 달려가는걸 막고 싶었나봐...
널 마음 아프게 했다면...용서해라.아저씨한텐...내가 사과했어.
...지금은...나...괜찮아.너희 두사람 사이를 내가 조금이라도
갈라놓았던 거라면...이젠 그러지마.내가 잘못했어..."
진이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걸까...?
낮은 둔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기사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앞좌석 등받이에 영은이 이마를 제법 아프게 부딪쳤다.
미안하다는 기사의 사과를 귓등으로 받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영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드는것 같았다.
진이의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니 병원건물이 벌써 두사람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진이를 일층 로비에 남겨둔채 혼자 그의 병실로 가는
계단을 한칸한칸 오르는 그때서야 영은은 진이의 말을 알아차렸다.
그런데 이상한건 그얘길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자신이었다.
진이는 자신의 거짓말을 진심으로 용서받고 싶었던것일까...?
누구에게...?
자신도 모르게 그를 만나게 될 구실을 찾고 있던 영은에게
다시 그를 만나게 해준건 뜻밖에도 진이였다.
그것만으로도 영은이 진이를 용서해줄 이유는 충분했다.
그의 병실앞이다.
문이 조금 열려 있다.
영은은 그를 처음 만날때처럼 떨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진저리나게 싫다.
그런데도 바로 코앞에 있는 저 문을 밀고 들어갈 수가 없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