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2-
"단념"
'후두둑-뚜욱-뚝-뚜둑'
영은은 이렇게 마루끝에 앉아
동그란 공처럼 몸을 말고 처마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늘 편해졌다.
혼자 있는 일에 익숙한 그녀에게 비는 말솜씨좋은 친구같았다.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후련해지는데 거기다 굵은 비가 소리까지
낼때는 마음속 응어리까지 확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분이 이상했다.
제법 굵은 빗방울이 힘차게 내려주는데도 오히려 답답하기만 하다.
게다가 내리는 빗방울을 한참 보고있으려니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루하루 사는일을 즐겁고 설레이게 만들어준
어떤 사람때문일까...?
하필이면 그 어떤 사람은 왜 남자였으며
하고 많은 남자중에 그는 또 왜그리도 이상하게 얽히고
꼬인 그런 사람이었을까...
이런 감정이 사랑이라면 영은은 그를 더이상 사랑하고 싶지 않다.
비록 화통한 성격은 못되어도 이렇게
바보같이 살진 않았던것 같다.
그에게는 왜 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걸까...?
사실 한마디의 말로라도 그를 잃을까 두려웠다.
그를 잃을까 두려워 자신의 아픈 감정을 그에게
속시원히 드러내지도 못하는 바보같은 사랑을
그럴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만 놓아버리고 싶건만...
영은은 자신의 마음이,모습이 싫다.
어머니의 말처럼 그를 만나고부터 늘 눈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얼굴.
그를 처음 본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그에게 끌리는 감정을
주체할수 없었다.그렇게 마구 달려간 자신의 사랑.
그의 과거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얘기들은 귀막고 못들은체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눈으로 본 일들은 잊어버리려해도 잊혀지지 않았다.
먼저 프로포즈를 받고 달콤하기만 할것 같았던
그와의 만남은 늘 조마조마하고 가슴 아팠다.
그는 그녀를 보듬어주는 어떤 위로도 사과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다 지친 그녀가 늘 다시 그를 찾았다.
그의 얼굴을 볼수 없는 괴로움은 지독했다.
초라함이나 비참함따윈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사랑에 빠진 촌스런 여자아이의 모습을 보며 색다른 즐거움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만약 그런것이라면 그는 너무 잔인했다.
영은은 그를 처음 만난후
지금까지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듯했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 한구석이 견딜수 없이 답답했다.
그러다 다시 자신을 보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미소를 볼때면
또 자신의 슬픔따위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하며...
그는 그 어떤것으로도 자신을 속박하지 않는데 아무리 그에게서
떨어져나오려해도 그녀는 한걸음도 옮기질 못했다.
그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열병같았다.
영은은 뜨거워지는 자신을 식히기라도 하려는듯 손을 길게 뻗어
떨어지는 차가운 비를 느꼈다.
빗방울을 가두려 손바닥을 힘껏 오무려본다.
그러나 빗방울은 툭하고 손바닥을 적시며 힘없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갈 뿐이었다.
'그래.당신도 이 비같아.날 슬프게 적시기만 할뿐 내 손안에
머물러 주질 않잖아.당신은 마음대로 내리고 난 당신을 보고,
듣기만 할뿐 만질수도 없는걸.난 온힘을 다해 당신을 느끼려하지.
그러나 당신은 비웃듯 나를 적시고 금새 나에게서 빠져나가지.
그래.꼭 당신같아.올때도 갈때도 당신마음대로지.비가 멎으면
당신도 차라리 나에게서 멎어버렸으면...'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오기를 일주일을 기다렸다.
하루하루가 지옥같이 길게 느껴졌다.
정말 바보같고 한심하다.
늘 긴 한숨과 눈물보따리를 안고 다니는 모습이 얼마나 답답했으면
차가운 어머니마저 자청해서 더운 눈물과 뜨거운 술로
자신을 녹여서 딸을 위로하려 했을까.
문득 영은은 어머니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음껏 미워해도 시원찮을 존재때문에 오히려
가슴 아파 눈물흘리게 만든 자신이 원망스럽다.
'그래.이 비가 그치면...그 사람 단념해 볼께요.엄마!
나 눈물흘리는 사랑같은거 이제 안할래요.그만 할래요.그럴께요.
꼭 그럴께요.
이 비만 그치면...'
영은은 처마밑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는 좀처럼 멎을것 같지 않다.
영은은 자신이 정말 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래야 할것 같은 마음뿐...
자신을 얻기위해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를
한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시간이 이제는 아무 의미없이 느껴졌다.
그를 너무 빨리 포기하는건지,아니면 너무 늦은건지 모른다.
영은은 아침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그가 너무 원망스럽다.
이렇게 시작도,끝도 혼자 하게 내버려두는 무심한 그가...
그와의 첫 만남,첫키스,그리고 함께 한 시간들...
그의 떨리던 입술,손,입가의 미소,그리고 숨소리...
참아보려 무진 애를 써봤지만 영은은 기어이 또 울고 만다.
이렇게 앉아 그를 떠올리다간 밤새 또 울게 될게 뻔했다.
영은은 옷소매로 눈물을 닦고 세수라도 할 마음으로 단숨에 일어섰다.
그녀의 등뒤로 그는 하염없이 내렸다.
대문을 잠그며 얼핏 전화벨소리를 들은것 같아 잠시 귀를 기울여본다.
마당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때문인지,바로 앞 한길의 차다니는
소리때문인지 전화벨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일것 같아서인지 그이길 바라는 것인지 좀체 발걸음을 집앞에서
떼어놓을수가 없다.
과감하게 돌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기는 그녀의 귀에
빗소리에 섞인 전화벨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비라 영은은 우산을 미리 챙기지 않았을
어머니를 핑계삼아서라도 눈앞에서 내리는 비와 울리지 않는
전화기앞을 피하고 싶었다.
필요한 일외에 가게에 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집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얘기를 들은 그날이후
아무렇지도 않은듯 어머니를 만나러 그곳에 갈 용기가 선뜻
생기지 않았다.
가게 아주머니들의 자신을 보는 묘한 시선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다시 지난 얘기를 들춰내 어머니를 힘들게 할것 같아서였다.
최근 들어 어머니의 가게에 그것도 자청해서 들리긴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갑자기 내리는 비때문인지,손님이 많을 저녁시간인데도
상가안은 다른 날에 비해 한산했다.
어머니는 진열대에 놓인 돌돌말린 천마냥 꼼짝도 않고
촛점없는 시선으로 드문드문 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영은이 그런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엄마'하고 두어번 부르고
나서도 어머니는 얼른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머니는 보이지도 않는 빗소리를 듣고 계셨을까...?
"엄마!영은엄마!"
그제서야 어머니는 영은을 본다.
어머니는 반가운 기색을 애써 숨기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너...여긴 웬일이니?"
"엄마보려고 왔지.저녁은 드셨어요?"
"아니.몇신데 벌써 저녁을 먹니...?"
어머니는 영은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비오는날 짧은치마는 왜 입었으며,다 저녁에 여긴 왜 왔냐,머리색깔은
왜 그모양이냐,시키지도 않은 일은 왜하느냐며 괜한 트집을 잡았다.
영은은 대답대신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엄마!나한테 이젠 더 잘해줄거라면서...?왜 그래요?마귀할멈처럼...
좋으면서..."
어머니는 그런 영은의 안겨붙음이 싫지 않은듯 웃는 얼굴이다.
더이상 잔소리를 하기가 조금은 쑥스러운지 어머니는 나온김에
저녁이나 먹고 가라며 수화기를 든다.
근처에 맛있는 낙지볶음집이 어디있었는데하며 급하게 전화번호를
찾느라 여기저기 장부더미를 뒤진다.
영은은 자신을 보고 이렇듯 반가워 어쩔줄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정에 굶주리기는 어머니나 영은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작 좀더 살가운 딸이 되어주지 못했음에 죄스러운 마음마저 든다.
순간 영은은 뭔가를 끄는듯한 이상한 소리에
갑자기 뒤로 몸을 돌렸다.
"앗!아..야..!"
무언가가 영은의 얼굴을 쿵하고 쳤다.
그소리에 놀란 어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웬 희멀건 사내가 서 있다.
사내는 영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려는것처럼 보였다.
그런 사내를 어머니가 먼저 아는체하며 돌려세웠다.
어머니는 이제껏 본적 없는 온화한 얼굴로 사내와 인사를 나눈다.
영은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알수 없는 질투가 솟아오르려한다.
곱지 않은 시선으로 사내를 보고 있는 영은에게 어머니는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일전에 말했지?그 총각이다.인사해라.우리 딸이야."
엉겁결에 두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비가 와서 내일 보내달라고 했는데...차 많이 막히지?"
"아!네.마침 근처에 볼일도 있고 해서 일부러 제가 챙겼습니다.
확인해 보세요."
"원 고맙기도 해라.잠깐만...여기 좀 앉아."
어머니는 너무나 친절하고 자상했다.
남자도 좀 당황스러운지 영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것 같았다.
오히려 영은이 남자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어머니가 점찍어둔
남자라 생각해서인지 괜시리 재미있게 느껴진다.
남자의 얼굴은 하얗고 투명해보였다.
그는 아주 큰 키에 어두운 회색빛 정장차림이다.
잘 차려입은 정장이 남자를 몇살은 더 나이들게 해 보일것이다.
남자는 몇살쯤 되었을까...?
남자는 멋쩍은지 괜히 헛기침을 해댄다.
이 남자의 어디가 어머니의 마음에 들었던걸까...?
처음보기에도 호감이 가는 얼굴이긴 하다.
찬찬히 자신을 보고 있는 영은의 시선에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수줍은듯 바라보았다.
영은도 괜히 흠흠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제서야 자신의 차림을 의식한 영은은 벌떡 일어선다.
집에서 마음대로 색깔을 만들어 마치 장난처럼 염색한 머리칼에
어머니의 말처럼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치마
그리고 어색하게 둔탁해보이는 워커화에 얼룩달록한 양말...
남자는 복수라도 하듯 장난스러운 눈길로 영은을 빤히 보고 있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른다.
영은은 장부에서 눈도 떼지 않고 있는 어머니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다 아무말없이 남자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서 나왔다.
그때 남자가 장난스럽게 큰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따님 도망가는데요!"
"어머니가 꼭 밥 같이 먹으라 하셨어요."
영은은 싫다고 도망치는 자신을 기어이 데리고 와 숟가락까지
쥐어주는 낯선 사내의 얼굴을 흘겨보듯 바라본다.
"자 봐요.돈까지 주셨다니까요."
남자의 해맑은 웃음과 너스레에 영은은 기어이 웃고만다.
"웃으니까 예쁘네요.눈이 아주머니 닮았어요."
영은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남자의 말에 코끝이 찡해진다.
어머니와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화장을 시작했다.
늘 어머니의 짙은 반달눈썹의 눈썹모양을 따라 그렸다.
처음 들었다.
어머니와 어딘가가 닮았다는 말.
영은은 눈물이 날것 같아 국물을 후루룩소리내어 떠먹는다.
"봐요!맛있죠?비오는 날은 뜨거운 순대 국밥이 최고라니까요."
남자는 귀티나보이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뚝배기에 담긴 뜨거운
국밥을 후루룩후루룩 잘도 먹는다.
싫지 않은 느낌.
이 남자를 처음 본 소감을 어머니가 물어보신다면 아마 영은은
그리 대답할것 같다.
밥을 먹고 함께 차를 마시고 나서도 영은은 집에 갈래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늦도록 자신앞에 내리는 그를 혼자 감당할수 없을것 같아...
남자가 말했다.
"집에 바래다 줘도 되나요...?"
영은은 민재가 한번도 자신을 집까지 바래다 준적이 없음을 떠올린다.
처음 만난 남자도 이렇게 자신을 여자로 대해주는데 그는 그녀를
여자로 느끼지 않았던걸까...?
아무것도 아닌것 같은 그 다정한 배려를 얼마나 원했던가...
영은이 대답했다.
"안될것도 없죠.바래다 주세요."
남자는 영은을 재미있다는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집앞까지 그의 큰 우산하나를 받쳐들고 나란히 걸어오면서도
무슨 얘길 나누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함께 빗속을 걷고 있는 이 남자가 그였으면...하고 바랬던것밖에...
집앞 가로등밑에서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바로 앞이에요.저...이럴땐 이렇게 말하는거죠?
오늘 즐거웠어요라고..후...진짜 재미있었어요.오래간만에..."
고개까지 숙여 인사하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영은의 시선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남자의 뒤로 그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떨어진 거리였지만 분명히 그였다.
영은은 갑자기 가슴이 탁 막힌다.
그는 담장에 그림자처럼 몸을 기대고 서서 영은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체 영은을 보며 연신 웃기만 했다.
"진짜 너무 하네요.영은씨!이럴거예요?섭섭하게..."
영은은 애써 민재의 시선을 외면하며 남자를 본다.
"뭘요?"
"끝까지 제 이름 석자도 안 물어볼거에요?"
영은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에 들리지 않는다.
갑자기 두사람을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이쪽으로 걸어온다.
영은은 결심이라도 한듯 남자의 팔짱을 꼈다.
남자도,민재도 움찔하는것 같았다.
영은이 남자를 끌며 오던 길을 다시 돌아 걸었다.
"기분이다.제가 술 한잔 살께요.좋죠?"
민재는 영은의 행동에 걸음을 멈춘듯 했다.
남자는 영은의 팔을 조심스레 떼어놓으며 말했다.
"영은씨!난 서지원이라고 해요.그리고 처음 만난 여자랑은
술 안해요.그러니 다음에 사요.알겠죠?"
자신을 돌려 세운 남자는 영은에게 그녀의 우산을 펴 주었다.
그리고 오던 길을 혼자서 저만치 걸어갔다.
영은은 남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영은은 민재가 서 있던 자리를 급히 바라본다.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원래 있지도 않은 그를 본것처럼...
빗방울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